[이 땅의 희망지기-양희창] 중학 과정만 마치고 목공기술 배운, 내 아이는 실패했나요?
양희창 간디교육공동체 대표
“너한테 하나님은 좋은 분이겠지. 나한테 하나님은 나쁜 분이다.” 1982년 가을 양희창(51) 간디교육공동체 대표가 동갑내기 K를 죽음에서 막 끌어냈을 때 들은 얘기다. 연세대 사학과 2학년 휴학 중이던 양 대표는 대구 갱생보호소에서 생활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노래를 가르치고 있었다. K는 징역 3년을 살고 갱생보호소에 온 출소자였다. 고아였다.
“너는 좋은 부모 만나 잘 먹고 잘 살지. 대학도 다니지. 나 같은 사람 죽어도 하나님은 모를 거다.” K는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여겼다. 양 대표는 연탄가스에 콜록거리는 K가 하나님의 대언자(代言者)처럼 느껴졌다. ‘하나님이 침묵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건 너다. 사랑을 보여 주어라.’ 그는 갈 곳 없는 수많은 ‘K’에게, 꿈을 잃어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보여주며 살아가기로 했다.
아무도 ‘양쌤’이 ‘양도사’인 걸 몰랐다
지난 10일 아침 제천간디학교가 있는 충북 제천 덕산까지 가는 길. 월악산 동산 대덕산 명산들이 굽이굽이 길을 지켰다. ‘내륙의 바다’라 불리는 67.7㎢ 청풍호가 산 아래 넓게 누워 있었다. “서울에서는 3시간 가까이 걸리는데 일찍 오셨네요.” 검정 머플러에 회색 재킷을 걸친 그는 활기차 보였다. 젊어 보인다고 인사했다. “제가 유치해요. 애들이랑 노느라(웃음).”
학교 안에서 사진을 찍자고 하자 약간 곤혹스러워했다. “제가 교장에서 물러난 뒤로는 학교 안엔 잘 들어가지 않아요.” 왜냐고 물었다. “선생님들이 불편할까 봐요.” 2002년 9월 제천간디학교를 세우고 10년 동안 교장으로 일한 뒤 2012년 8월 물러났다. 그동안 공동체 운동에 매진했다. “아이들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도록 하려면 삶의 터전인 공동체 ‘마을’이 복원돼야 해요.”
양 대표는 학교가 있는 선고리 마을회관으로 안내했다. 회관 담벼락에는 앞뒤로 학생들과 주민들이 그린 작품 30여점이 빼곡했다. “한 70대 할머니는 처음으로 붓을 잡아본다면서 기뻐했어요.” 알록달록한 벽을 가진 집이 주변에 즐비했다. 집집마다 있는 얼굴 모양 문패도 아이들과 함께 만든 것이라고 했다.
그의 공동체 운동은 K를 만난 해부터 시작됐다. 처음에 노래를 가르쳤지만 금방 반발했다. “난 노래 부를 필요 없다. 매일 먹고사는 게 걱정이다.” “그럼 같이 먹고살 길을 찾아보자.” 양 대표는 맞받아쳤다. K를 포함해 갱생보호소 출신 또래 10여명과 ‘샬롬회’를 만들었다. 방을 얻어서 같이 살았다. 나중엔 20여명까지 늘었다.
“포장마차 5∼6개를 운영했어요. 대구 삼덕교회 철야기도회 가서 우동 많이 팔았어요(미소). 이웃을 가장 가까이 만난 거죠. 같이 먹고 자면서….” 양 대표는 공동체 생활을 1년 남짓 했다. 그의 신앙관 교육관 목회관이 만들어진 결정적 시기다. 평생 이들의 친구가 되기로 했다. 양 대표는 86년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90년 대구에 빈들교회를 세웠다. 그는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소속 전도사다.
매주 일요일 그는 대구로 간다. 한참 주변에선 물었다. “양쌤, 주말마다 어디 좋은 데 놀러가요? 같이 가요.” 설교하기 위해 대구에 가는 걸 몰랐다. 제천에선 양 선생님의 준말인 ‘양쌤’으로 불리고 교회에서는 ‘양도사’로 불린다. 양 전도사의 줄임말이다. K 등 샬롬회 형제들도 띄엄띄엄 빈들교회에 나온다. 다짐처럼 30년 넘게 공동체 형제들과 함께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아니라 ‘형제들’이 나를 가르쳤다
양 대표와 대화를 위해 도전리 누리마을빵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먹음직스러운 빵들이 진열돼 있었다. 필리핀 이주 여성이 파트타임으로 카운터를 보고 있었다. “주민들이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하는 곳이에요. 지역 생산물로 빵을 만들어요. 사랑방 같은 곳이죠.” 주인장은 간디학교 전 교사였다. 빵카페 인근에는 공동체 운동의 일환으로 운영되는 다문화가정 자녀를 위한 보육센터, 다문화 여성을 위한 한글교실을 위한 공간이 있었다. 학교가 담 밖까지 퍼져 마을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 가는 듯했다.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목사 안수를 왜 받지 않으셨어요?” 양 대표는 간단히 말했다. “제가 자질이 안 됩니다. 놀기도 참 좋아하고요.”
신학교에 가게 된 이유가 궁금해졌다. “저희 아버지가 저를 얻고 목회자로 내놓겠다고 서원기도를 하셨대요. 제가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아버지 뜻대로 신학교에는 갔지만 교회를 키울 생각은 없었어요. ‘학교도 선교’라면서 대안교육 운동에 관심을 가졌죠.”
대구는 양 대표에게 ‘제2의 고향’이다.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양 대표의 부모 고 양영모 대구문화교회 장로와 김강희(74·샘깊은교회) 권사는 대구에 마지막 터를 잡았다. 아내 김현숙(53) 간디학교 교사도 고교 2학년 때 대구에서 ‘교회 누나’로 처음 만났다. 신대원을 졸업하고 다시 대구로 내려왔다. 86년 아내와 신혼여행을 간 곳은 소록도였다. 샬롬회 형제들과 자원봉사를 가던 곳이다.
“사실 제가 그 형제들에게 해준 건 별로 없어요. 그 친구들이 제게 세상을 보여주고 하나님을 가르쳐줬지요.”
90년 대구 경제정의실천연합, 96년 대구 녹색소비자연대를 창립할 때 힘을 보탰다. 대구의 대표적 시민단체 창립 코디네이터였다. 형 양희규(53·현 필리핀간디학교 교장)씨가 95년 대안교육 운동을 선언했다. 부친의 도움으로 경남 산청에 터를 마련했다. 아버지는 은행원으로 평생 모은 돈을 아껴 군부대에 교회 20여개를 설립했던 분이다. 97년 3월 간디청소년학교를 시작했다. 이름은 생명평화운동과 비폭력저항운동에 앞장선 간디의 정신을 따른다는 의미에서 간디로 붙였다.
공동체를 알아가고 나를 사랑하도록 교육
간디학교의 핵심 교육철학은 ‘사랑’과 ‘자발성’이다. 양 대표는 교사로 합류했다 2000년 6월 산청간디학교 교장이 됐다. “산청에서 도교육청 인가 문제로 도교육청과 갈등이 있었어요. 학생들이 교육청 가서 시위하느라 공부를 제대로 못했어요. 그때 가장 힘들었어요. 아이들 생각하면 그만두고 다른 데로 가야 할 것 같고 포기하면 대안교육 운동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 같고….”
간디교육공동체는 2002년 9월 제천으로 중학교 과정을 분리·이전했다. “경쟁적인 교육체제를 못 견뎌 온 애들에게 가장 먼저 줘야 할 걸 ‘자유’라고 생각했어요. 수업을 선택할 권리, 수업을 안 받을 권리까지.” 다음에는 대안적인 삶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했다. “식의주(食衣住) 수업을 했죠. 비누 만들어서 동네에 내다 팔고, 화장실 똥도 퍼서 텃밭에 뿌리고요. 음악 미술 같은 감성 교과를 도입하고, 프로젝트 수업을 진행했어요.” 프로젝트 수업은 한 학기 동안 한 가지 주제를 탐구하고 결과를 발표하는 수업이다.
“예를 들어 사회과에서 덕산마을 알기를 프로젝트 수업으로 진행하면 모둠별로 의논을 해요. 마을지도를 만들자, 할머니들 얘기를 들어보자. 독거노인에게 도시락을 싸주자 등등. 각자 관심별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그걸 발표해요. 교사들은 진행 과정에 조언하고 발표에 의견을 주는 방식이죠.”
식의주, 감성, 지식 교과가 균형을 이루도록 교과를 구성했다. 목공을 할 수 있는 작업장을 만들었고 고3 때는 진로 탐색을 위해 인턴십 과정을 도입했다. “요즘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컴퓨터로 PDF 화면 넘기는 역할이 전부라는 얘길 들었어요. 안 그래도 애들이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스마트좀비’가 되어 가는데 수업마저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지 참 걱정이에요. 가장 효과 높은 교육은 사람이 눈을 맞추고 들려주는 이야기예요.”
대학 진학률을 물었다. “50%가 안 될 거예요. 올해 졸업생 중에는 딱 1명이 대학에 갔어요. 저희 교과에는 입시 교육이 없어요. 2, 3년 준비해서 대학 간 애들이 절반 정도예요.” 간디학교의 교육 목표는 분명해 보였다. 아이들이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찾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도록, 공동체를 알아가도록 돕는다. 대안학교 대명사로 불리는 간디학교. 학교에 대한 평가를 물었다. “저는 아직 올바른 대안교육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 최종 목표는 대안교육이 필요 없는 공교육인지도 모르죠. 저희는 기존 교육이 아직 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계속 고민해요.” 양 대표와의 대화는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식당에서 이어졌다.
차라리 적게 벌고 적게 쓰는 법 가르치자
간디교육공동체는 97년부터 경남 산청, 충북 제천, 충남 금산에 간디학교를 설립했다. 필리핀 두마게티와 중국 남양에도 학교를 설립했다. 필리핀간디학교는 고교생을 위한 국제학교다. 2012년 개교한 아시아평화학교는 20∼25세 청년들을 주 대상으로 한다. 아시아 청년들이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법에 대해 공부하는 곳이다. 대안교육을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로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만둣국을 먹은 뒤 간디학교 기숙사 근처에 있는 양 대표의 집으로 갔다. 53년 지어진 한옥을 개조한 집이었다. 사과를 말려 만든 간식에 차를 내왔다. 앨범을 꺼냈다. 결혼, 가족, 샬롬회…. “자녀들은 뭘 하세요?” 간디학교를 마치고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한 딸 다은(27)씨는 상담사 인턴 과정을 밟고 있다. 간디학교에서 중학교 과정만 마친 아들 원중(25)씨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목공술을 배웠다. 여기저기에서 목공을 가르친다.
“졸업생이 300여명쯤 될 거예요. 30대 초반 졸업생 중에 유엔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어요. 제가 성공했다고 보는 건 이 친구가 유엔에서 일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정말 잘할 수 있는 국제구호를 진로로 삼았다는 점이에요.” 그는 ‘배우는 것은 꿈꾸는 것이고 가르치는 것은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지은 간디학교의 교가대로다.
양 대표는 주 3∼4차례 외부 강연을 다닌다. “지방 국립대 강연에 간 적 있어요. 한 친구가 자긴 너무 못난 것 같다면서 엉엉 울었어요. 1등이 아니면 모두를 패배자로 만드는 경쟁적 교육체제에서 모두가 처절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는 거죠.” 그 친구에게 무슨 얘기를 해줬는지 궁금했다. “저희 집에 놀러오라고 했어요. ‘스펙보다는 실력이 중요하다. 자신을 발견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지요.”
현실에서 스펙이 직장을 결정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노동인구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해요. 이건 현실이에요. 차라리 적게 벌고 적게 쓰고, 좋아하는 일 하고 행복하게 사는 법을 고민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부모들에게도 할 말이 있었다. “대안학교 학부모조차도 아이가 반드시 ‘공부’를 잘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분들이 있어요. 대학은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는 거예요. 부모의 욕망을 아이에게 강요해선 안 돼요. 아이들이 진정으로 행복하길 바라는 것으로 자녀교육은 이미 된 걸 수도 있어요.” ‘대안교육의 대가’는 자신 있는 표정이었다.
“하나님 보시기에 남들 보기에 ‘괜찮은 신앙인’이면 좋겠어요. 전 서울 대구 산청 제천부터 두마게티, 남양까지 그냥 여기저기 오가며 나그네처럼 일했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 같아요.” 어느덧 해가 월악산 가까이 내려와 있었다. 그는 돌아가는 방문객에게 밝은 얼굴로 손 흔들었다. “봄 되면 여기 꽃과 나무 참 예쁘답니다. 놀러오세요.”
제천=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너한테 하나님은 좋은 분이겠지. 나한테 하나님은 나쁜 분이다.” 1982년 가을 양희창(51) 간디교육공동체 대표가 동갑내기 K를 죽음에서 막 끌어냈을 때 들은 얘기다. 연세대 사학과 2학년 휴학 중이던 양 대표는 대구 갱생보호소에서 생활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노래를 가르치고 있었다. K는 징역 3년을 살고 갱생보호소에 온 출소자였다. 고아였다.
“너는 좋은 부모 만나 잘 먹고 잘 살지. 대학도 다니지. 나 같은 사람 죽어도 하나님은 모를 거다.” K는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여겼다. 양 대표는 연탄가스에 콜록거리는 K가 하나님의 대언자(代言者)처럼 느껴졌다. ‘하나님이 침묵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건 너다. 사랑을 보여 주어라.’ 그는 갈 곳 없는 수많은 ‘K’에게, 꿈을 잃어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보여주며 살아가기로 했다.
아무도 ‘양쌤’이 ‘양도사’인 걸 몰랐다
지난 10일 아침 제천간디학교가 있는 충북 제천 덕산까지 가는 길. 월악산 동산 대덕산 명산들이 굽이굽이 길을 지켰다. ‘내륙의 바다’라 불리는 67.7㎢ 청풍호가 산 아래 넓게 누워 있었다. “서울에서는 3시간 가까이 걸리는데 일찍 오셨네요.” 검정 머플러에 회색 재킷을 걸친 그는 활기차 보였다. 젊어 보인다고 인사했다. “제가 유치해요. 애들이랑 노느라(웃음).”
학교 안에서 사진을 찍자고 하자 약간 곤혹스러워했다. “제가 교장에서 물러난 뒤로는 학교 안엔 잘 들어가지 않아요.” 왜냐고 물었다. “선생님들이 불편할까 봐요.” 2002년 9월 제천간디학교를 세우고 10년 동안 교장으로 일한 뒤 2012년 8월 물러났다. 그동안 공동체 운동에 매진했다. “아이들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도록 하려면 삶의 터전인 공동체 ‘마을’이 복원돼야 해요.”
양 대표는 학교가 있는 선고리 마을회관으로 안내했다. 회관 담벼락에는 앞뒤로 학생들과 주민들이 그린 작품 30여점이 빼곡했다. “한 70대 할머니는 처음으로 붓을 잡아본다면서 기뻐했어요.” 알록달록한 벽을 가진 집이 주변에 즐비했다. 집집마다 있는 얼굴 모양 문패도 아이들과 함께 만든 것이라고 했다.
그의 공동체 운동은 K를 만난 해부터 시작됐다. 처음에 노래를 가르쳤지만 금방 반발했다. “난 노래 부를 필요 없다. 매일 먹고사는 게 걱정이다.” “그럼 같이 먹고살 길을 찾아보자.” 양 대표는 맞받아쳤다. K를 포함해 갱생보호소 출신 또래 10여명과 ‘샬롬회’를 만들었다. 방을 얻어서 같이 살았다. 나중엔 20여명까지 늘었다.
“포장마차 5∼6개를 운영했어요. 대구 삼덕교회 철야기도회 가서 우동 많이 팔았어요(미소). 이웃을 가장 가까이 만난 거죠. 같이 먹고 자면서….” 양 대표는 공동체 생활을 1년 남짓 했다. 그의 신앙관 교육관 목회관이 만들어진 결정적 시기다. 평생 이들의 친구가 되기로 했다. 양 대표는 86년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90년 대구에 빈들교회를 세웠다. 그는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소속 전도사다.
매주 일요일 그는 대구로 간다. 한참 주변에선 물었다. “양쌤, 주말마다 어디 좋은 데 놀러가요? 같이 가요.” 설교하기 위해 대구에 가는 걸 몰랐다. 제천에선 양 선생님의 준말인 ‘양쌤’으로 불리고 교회에서는 ‘양도사’로 불린다. 양 전도사의 줄임말이다. K 등 샬롬회 형제들도 띄엄띄엄 빈들교회에 나온다. 다짐처럼 30년 넘게 공동체 형제들과 함께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아니라 ‘형제들’이 나를 가르쳤다
양 대표와 대화를 위해 도전리 누리마을빵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먹음직스러운 빵들이 진열돼 있었다. 필리핀 이주 여성이 파트타임으로 카운터를 보고 있었다. “주민들이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하는 곳이에요. 지역 생산물로 빵을 만들어요. 사랑방 같은 곳이죠.” 주인장은 간디학교 전 교사였다. 빵카페 인근에는 공동체 운동의 일환으로 운영되는 다문화가정 자녀를 위한 보육센터, 다문화 여성을 위한 한글교실을 위한 공간이 있었다. 학교가 담 밖까지 퍼져 마을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 가는 듯했다.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목사 안수를 왜 받지 않으셨어요?” 양 대표는 간단히 말했다. “제가 자질이 안 됩니다. 놀기도 참 좋아하고요.”
신학교에 가게 된 이유가 궁금해졌다. “저희 아버지가 저를 얻고 목회자로 내놓겠다고 서원기도를 하셨대요. 제가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아버지 뜻대로 신학교에는 갔지만 교회를 키울 생각은 없었어요. ‘학교도 선교’라면서 대안교육 운동에 관심을 가졌죠.”
대구는 양 대표에게 ‘제2의 고향’이다.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양 대표의 부모 고 양영모 대구문화교회 장로와 김강희(74·샘깊은교회) 권사는 대구에 마지막 터를 잡았다. 아내 김현숙(53) 간디학교 교사도 고교 2학년 때 대구에서 ‘교회 누나’로 처음 만났다. 신대원을 졸업하고 다시 대구로 내려왔다. 86년 아내와 신혼여행을 간 곳은 소록도였다. 샬롬회 형제들과 자원봉사를 가던 곳이다.
“사실 제가 그 형제들에게 해준 건 별로 없어요. 그 친구들이 제게 세상을 보여주고 하나님을 가르쳐줬지요.”
90년 대구 경제정의실천연합, 96년 대구 녹색소비자연대를 창립할 때 힘을 보탰다. 대구의 대표적 시민단체 창립 코디네이터였다. 형 양희규(53·현 필리핀간디학교 교장)씨가 95년 대안교육 운동을 선언했다. 부친의 도움으로 경남 산청에 터를 마련했다. 아버지는 은행원으로 평생 모은 돈을 아껴 군부대에 교회 20여개를 설립했던 분이다. 97년 3월 간디청소년학교를 시작했다. 이름은 생명평화운동과 비폭력저항운동에 앞장선 간디의 정신을 따른다는 의미에서 간디로 붙였다.
공동체를 알아가고 나를 사랑하도록 교육
간디학교의 핵심 교육철학은 ‘사랑’과 ‘자발성’이다. 양 대표는 교사로 합류했다 2000년 6월 산청간디학교 교장이 됐다. “산청에서 도교육청 인가 문제로 도교육청과 갈등이 있었어요. 학생들이 교육청 가서 시위하느라 공부를 제대로 못했어요. 그때 가장 힘들었어요. 아이들 생각하면 그만두고 다른 데로 가야 할 것 같고 포기하면 대안교육 운동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 같고….”
간디교육공동체는 2002년 9월 제천으로 중학교 과정을 분리·이전했다. “경쟁적인 교육체제를 못 견뎌 온 애들에게 가장 먼저 줘야 할 걸 ‘자유’라고 생각했어요. 수업을 선택할 권리, 수업을 안 받을 권리까지.” 다음에는 대안적인 삶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했다. “식의주(食衣住) 수업을 했죠. 비누 만들어서 동네에 내다 팔고, 화장실 똥도 퍼서 텃밭에 뿌리고요. 음악 미술 같은 감성 교과를 도입하고, 프로젝트 수업을 진행했어요.” 프로젝트 수업은 한 학기 동안 한 가지 주제를 탐구하고 결과를 발표하는 수업이다.
“예를 들어 사회과에서 덕산마을 알기를 프로젝트 수업으로 진행하면 모둠별로 의논을 해요. 마을지도를 만들자, 할머니들 얘기를 들어보자. 독거노인에게 도시락을 싸주자 등등. 각자 관심별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그걸 발표해요. 교사들은 진행 과정에 조언하고 발표에 의견을 주는 방식이죠.”
식의주, 감성, 지식 교과가 균형을 이루도록 교과를 구성했다. 목공을 할 수 있는 작업장을 만들었고 고3 때는 진로 탐색을 위해 인턴십 과정을 도입했다. “요즘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컴퓨터로 PDF 화면 넘기는 역할이 전부라는 얘길 들었어요. 안 그래도 애들이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스마트좀비’가 되어 가는데 수업마저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지 참 걱정이에요. 가장 효과 높은 교육은 사람이 눈을 맞추고 들려주는 이야기예요.”
대학 진학률을 물었다. “50%가 안 될 거예요. 올해 졸업생 중에는 딱 1명이 대학에 갔어요. 저희 교과에는 입시 교육이 없어요. 2, 3년 준비해서 대학 간 애들이 절반 정도예요.” 간디학교의 교육 목표는 분명해 보였다. 아이들이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찾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도록, 공동체를 알아가도록 돕는다. 대안학교 대명사로 불리는 간디학교. 학교에 대한 평가를 물었다. “저는 아직 올바른 대안교육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 최종 목표는 대안교육이 필요 없는 공교육인지도 모르죠. 저희는 기존 교육이 아직 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계속 고민해요.” 양 대표와의 대화는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식당에서 이어졌다.
차라리 적게 벌고 적게 쓰는 법 가르치자
간디교육공동체는 97년부터 경남 산청, 충북 제천, 충남 금산에 간디학교를 설립했다. 필리핀 두마게티와 중국 남양에도 학교를 설립했다. 필리핀간디학교는 고교생을 위한 국제학교다. 2012년 개교한 아시아평화학교는 20∼25세 청년들을 주 대상으로 한다. 아시아 청년들이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법에 대해 공부하는 곳이다. 대안교육을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로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만둣국을 먹은 뒤 간디학교 기숙사 근처에 있는 양 대표의 집으로 갔다. 53년 지어진 한옥을 개조한 집이었다. 사과를 말려 만든 간식에 차를 내왔다. 앨범을 꺼냈다. 결혼, 가족, 샬롬회…. “자녀들은 뭘 하세요?” 간디학교를 마치고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한 딸 다은(27)씨는 상담사 인턴 과정을 밟고 있다. 간디학교에서 중학교 과정만 마친 아들 원중(25)씨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목공술을 배웠다. 여기저기에서 목공을 가르친다.
“졸업생이 300여명쯤 될 거예요. 30대 초반 졸업생 중에 유엔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어요. 제가 성공했다고 보는 건 이 친구가 유엔에서 일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정말 잘할 수 있는 국제구호를 진로로 삼았다는 점이에요.” 그는 ‘배우는 것은 꿈꾸는 것이고 가르치는 것은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지은 간디학교의 교가대로다.
양 대표는 주 3∼4차례 외부 강연을 다닌다. “지방 국립대 강연에 간 적 있어요. 한 친구가 자긴 너무 못난 것 같다면서 엉엉 울었어요. 1등이 아니면 모두를 패배자로 만드는 경쟁적 교육체제에서 모두가 처절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는 거죠.” 그 친구에게 무슨 얘기를 해줬는지 궁금했다. “저희 집에 놀러오라고 했어요. ‘스펙보다는 실력이 중요하다. 자신을 발견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지요.”
현실에서 스펙이 직장을 결정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노동인구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해요. 이건 현실이에요. 차라리 적게 벌고 적게 쓰고, 좋아하는 일 하고 행복하게 사는 법을 고민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부모들에게도 할 말이 있었다. “대안학교 학부모조차도 아이가 반드시 ‘공부’를 잘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분들이 있어요. 대학은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는 거예요. 부모의 욕망을 아이에게 강요해선 안 돼요. 아이들이 진정으로 행복하길 바라는 것으로 자녀교육은 이미 된 걸 수도 있어요.” ‘대안교육의 대가’는 자신 있는 표정이었다.
“하나님 보시기에 남들 보기에 ‘괜찮은 신앙인’이면 좋겠어요. 전 서울 대구 산청 제천부터 두마게티, 남양까지 그냥 여기저기 오가며 나그네처럼 일했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 같아요.” 어느덧 해가 월악산 가까이 내려와 있었다. 그는 돌아가는 방문객에게 밝은 얼굴로 손 흔들었다. “봄 되면 여기 꽃과 나무 참 예쁘답니다. 놀러오세요.”
제천=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기본폴더' 카테고리의 다른 글
2년째 담임목사 없는 서울 세움교회의 설 연휴 기도제목은? “설교 목사님께 기름값이라도…” (0) | 2014.02.05 |
---|---|
美·中 방공식별구역 신경전…中, 日 항공기 3시간 추격 쫓아내자 美 "군사태세 바꿀 것" (0) | 2014.02.04 |
설레는 설 귀성길, 2014년도 고향 예배당 꼭 들르실거죠? (0) | 2014.01.30 |
영성과 재미 온 가족 은혜 받으세요… 설연휴 기독TV·라디오 프로그램 (0) | 2014.01.30 |
수많은 여학생 성폭행, 독재자 카다피 ‘비밀 섹스방’ 공개 (0) | 2014.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