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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6. 구원:은혜의 승리] ① 죄와 구원

열려라 에바다 2014. 9. 6. 20:35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6. 구원:은혜의 승리] ① 죄와 구원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6. 구원:은혜의 승리] ① 죄와 구원 기사의 사진죄=하나님을 떠남, 구원=하나님께 돌아감

교회에서 ‘죄인’이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설교시간에 목회자가 신자에게 ‘죄인’이라고 소리쳐도, 반발하는 신자는 없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쓴다. 죄를 떠나 구원으로 향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죄’가 무엇인지를 물으면, 쉽게 답하지 못한다. 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이해에 따라 구원의 개념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남

죄는 기본적으로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율법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하다. 그런데 성경에는 율법에 대해 뚜렷이 구별되는 두 입장이 있다. 율법을 엄수해야 할 ‘규례’로 보는 것과 ‘하나님의 뜻’으로 보는 두 시각이다. 율법을 대하는 자세와 해석에서 확연한 차이를 나타낸다. 이 차이는 바리새인과 예수님으로 대변할 수 있다.

조금 구체적으로 보자.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은 ‘율법 준수’ 여부에 따라 죄인을 구별했다. 그래서 세리, 창기, 이방인 등이 죄인으로 지칭되었다. 이 기준에 의하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누구나 죄인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율법을 해석했다. 율법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이 기준이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바리새인은 안식일법, 정결예법, 성전에 대한 태도, 금식, 살인, 간음, 이혼 등의 율법 해석에서 충돌했다.

‘죄’가 바리새인에게는 율례를 지키지 못하는 것이었고,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었다. 율법을 벗어나는 것도 분명 ‘죄’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죄’는 보다 근본적인 것을 의미한다. 죄를 지칭하는 말 중에 ‘하마르티아’가 있다. 화살이 과녁을 벗어나서 명중시키지 못한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죄는 하나님을 떠나 목적을 상실하고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사는 삶을 의미한다. 바울은 인간이 죄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죄가 인간을 지배해서 ‘왕 노릇’하는 것으로 표현했다(롬 1:21∼23, 5:17).

죄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상태이다. 바리새인은 십일조를 바치고 온갖 율법을 지키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겼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있었기에 그들에게 분노했다(눅 18:11∼12, 마 23:23∼28). 반면 죄인 세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칠 뿐이었다. 예수님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이라고 선언했다(눅18:13, 마21:31).

하나님께 돌아감

성경에서 ‘구원’은 아주 복합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오늘 강좌에서 ‘죄’와 연관된 한 측면을 본다면, 구원은 소극적 의미에서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바리새인에게 구원은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율법의 모든 조항을 문자적으로 지키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율법의 정신이 살아 있을 때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율법이 경직되고 굳어지면 인간에게 무거운 굴레가 된다. 바리새인이 요청한 율법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무거운 ‘의무’였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의무를 강요했다. 그것이 구원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예수님에게 구원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지배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고, 하나님에게 돌아오라고 말했다. 율법의 조항을 앞세우지 않았다. 정죄가 앞서지 않았고 심판이 앞서지 않았다. 언제나 용서와 사랑이 우선했다.

예수님을 만난 자들에게는 모두 기쁨이 있었다. 그리고 삶의 변화를 가졌다. 제자들이 그랬고, 향유 부은 여인이 그랬고, 삭개오가 그랬고, 창기와 세리가 그랬고, 숱한 병자와 가난뱅이들이 그러했다. 하나님의 지배로 들어가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구원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과 함께 설계하고, 하나님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설정한다.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오늘 한국교회가 어디에 서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바리새인에게 나타난 유혹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나타난다. 얼마의 규례를 기준으로 ‘죄’를 정하거나, 혹은 윤리적으로만 규정하면 율법화의 위험에 빠진다. 한국교회에서 죄라고 하면 거짓말, 도둑질, 성적인 죄, 십일조, 주일성수 등 윤리적이거나 율례화된 조항들이 먼저 떠오른다. 한국교회는 죄를 율법적 조항으로 보는 것에 익숙하다. 그렇기에 구원도 율법적 조항이나 윤리적 조항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된다. 한국교회에는 율법화와 윤리화가 과도하게 일어나고 있다.

죄는 하나님을 떠난 삶이라는 근원적인 상태가 우선이다. 율법적이고 윤리적 조항들은 여기서 파생되어 나타난다. 하나님을 떠난 근원적인 ‘죄성’에서 거짓, 분쟁, 시기, 온갖 악덕, 윤리적, 율법적 죄들이 비롯된다.

죄가 율법적 범주에서 이해되면 안 된다.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다. 교회는 하나님을 떠난 삶,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사는 삶이 허무할 수밖에 없고, 그 마지막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근원을 직시하게 해야 한다. 그 잘못된 삶에서 돌이킬 때, 인간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벅찬 감격을 경험한다. 그것이 하나님 임재의 체험이다.

물론 율법을 지키고 윤리적 조항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율법의 조항은 의무를 앞세워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하나님의 지배로 들어가는 벅찬 감격이 우선되고, 그 감사에 대한 응답으로 율법의 조항을 지키는 것이다. 율법은 당위성으로 마지못해 지키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하나씩 이루어가는 것이다. 교회는 심판과 두려움, 의무와 당위성, 규례와 율법을 앞세워선 안 된다.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었다.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었다.마 11:28∼30).

김동건 교수 <영남신대 조직신학, 저자연락은 페이스북 facebook.com/dkkim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