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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6. 구원:은혜의 승리] ② 인간:운명과 미래

열려라 에바다 2014. 9. 6. 20:36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6. 구원:은혜의 승리] ② 인간:운명과 미래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6. 구원:은혜의 승리] ② 인간:운명과 미래 기사의 사진인간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정체성 가져, 미래는 운명이 아닌 기도-응답통해 변화돼

인간은 정의 내리기 어려운 존재다. 동서고금 다양한 철학에서 종교까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시도했다. 인간은 창조적이면서 파괴적이고, 이성적이면서 비합리적이다. 어떤 철학자는 인간을 선하게 보았고, 어떤 철학자는 인간을 악하게 보았다. 인간은 천사일 수도 있고, 악마일 수도 있다. 모두 일리가 있다. 인간에게 그런 다양한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 강좌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인간을 보려 한다.

하나님의 형상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됐다. 그렇기에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차적으로 규정된다.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자신의 근원을 상실한 인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찾는다. 창조기사는 인간의 근원적 위치를 보여준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따라 지어졌다(창 1:26). 여기서 ‘형상’은 어떤 외형적 이미지나 형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형상은 ‘관계적’ 개념이며, 인격적인 ‘대화성’을 의미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부를 수 있고, 하나님에게 응답할 수 있는 존재다. 즉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가진다.

따라서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 있을 때, 인간은 근원적인 불안과 한계 속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상태를 죄라고 하는 것이다. 죄인은 하나님을 떠나 삶의 목적과 존재를 상실한 인간이다. 이때 인간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한계, 근원적인 무력, 허무의 힘에 놓이게 된다. 이것을 원죄로 표현해도 좋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자신이 만든 목적을 가지고 산다.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사회적 업적도 이룬다. 하지만 문득 근원적인 불안과 허무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이렇게도 살아보고 저렇게도 살아본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 얼마의 성공에 우쭐하고, 얼마의 실패에 좌절하며,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공허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답하지 못한다. 때로는 자신을 찾아 명상을 한다. 혹은 길을 떠난다. 그러나 결국 그 길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답을 찾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의 근원을 잃고, 다른 곳에서 답을 찾으러 방랑한다. 그리고 언젠가 죽음 앞에서 허무하게 삶을 떠나는 존재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자신을 직시한다고 해서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간에 대한 근본 규정이다.

반면 인간은 하나님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찾을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알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자신의 삶을 설정하며, 그 뜻 안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한 순간에 되는 것은 아니다. 삶의 목적과 의미를 하나님의 뜻, 하나님과의 대화 안에서 하나씩 찾아가야 한다. 이런 대화적 관계가 지속되면, 삶 자체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된다. 성경은 인간의 성취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하나님과 관계라는 근본적인 자기 정체성 위에서, 인간의 모든 성취도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기준은 성취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혹은 ‘삶의 동행’을 성취나 복(福)의 차원에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현대는 인간의 가치를 다양하게 평가한다. 경제적 능력, 사회적 성취, 외모, 학력 등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달라진다. 이런 기준에 의해 하나님의 ‘복’을 가늠해서는 안 된다. 이는 성경의 인간관이 아니다. 즉 하나님과 관계가 바로되었다고 해서, 사회적 성취나 세상적인 복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축복관은 잘못된 기복신앙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물어보자. 루터가 훌륭한가, 그의 말을 몰아주던 시종이 훌륭한가? 사회적으로 보면 루터는 위대한 종교개혁가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고, 그의 시종은 이름 없이 필부로 생을 마쳤다. 하지만 그들이 각기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안’에서 살았다면, 루터나 그의 시종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같다. 즉 한 평범한 가정주부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평생 자신의 삶을 살았다면, 그 주부는 가장 큰 성취를 이룬 목사와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간이다. 다시 말해, 평생 시골에서 감자만 재배하던 할아버지가 경건한 신앙을 간직하며 살았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사람보다 귀하다. 입으로 말만 그럴 듯하게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목사 100명보다, 글을 몰라 무식하다고 업신여김 당하는 한 할머니 권사의 진실된 기도를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성경의 인간관이다.

운명은 없고 미래는 열려있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은연중에 운명을 믿는 사람이 있다. 물론 운명이라는 말은 다양하게 사용된다. 젊은 사람이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 ‘운명적 만남’이라고 고백하는 정도라면, 애교로 봐줄 수 있다. 하지만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팔자 탓을 하면 곤란하다.

성경은 인간을 고정된 존재로 보지 않는다. 인간에게 결정된 어떤 운명도 없다. 인간은 결정된 존재가 아니라 형성되어 가는 과정 중에 있다. 인간의 삶은 역동적이고 방향을 가진 운동 가운데 있다. 인간은 하나님, 다른 인간, 피조물과의 관계에 따라 미래를 향한 개방성을 가진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소명과 삶의 의미를 추구하도록 지어진 존재다.

성경은 어떠한 운명론에도 반대한다. 하나님의 응답은 언제나 현재적이다. 하나님의 응답은 언제나 그 사람을 변화시켰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기도에 응답했고, 모세의 기도에 응답했고, 이사야의 기도에 응답했고, 바울의 기도에 응답했다. 하나님의 응답 속에서 그들의 삶은 놀랍게 달라졌다. 성령이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고 있다. 그러니 고정된 운명이 있을 수 없다. 운명이나 팔자를 말하며 낙담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 반문해보라. ‘하나님이 죽었는가?’ 미래는 열려 있다. 미래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에게 부르짖으라. 하나님은 살아있고 운명은 없다.

김동건 교수 <영남신대 조직신학, 저자연락은 페이스북 facebook.com/dkkim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