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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6. 구원:은혜의 승리] ④ 거듭남:칭의와 성화

열려라 에바다 2014. 9. 6. 20:39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6. 구원:은혜의 승리] ④ 거듭남:칭의와 성화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6. 구원:은혜의 승리] ④ 거듭남:칭의와 성화 기사의 사진칭의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 삶의 적용인 성화로 연결안되면 공허

우리는 종종 ‘거듭났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혹은 ‘주님을 영접했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두 질문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다. 기독교에서 ‘거듭남’의 체험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최근에 ‘거듭남’이 매우 공허해졌다. 오늘은 거듭남의 의미를 보고, 거듭남이 왜 공허해졌는지 그 이유와 대책을 보려 한다.

칭의

거듭남은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거듭남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을 의미한다(고후 5:17). 새 피조물은 ‘옛 사람’에 대비하여 사용된다. 옛 사람은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인간, 또는 어둠 아래 있는 인간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선언한다(롬 3:23).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죄인이기에, 죄인으로서 한계를 가진다. 이런 상태에서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임으로 옛 사람은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이다.

‘거듭남’은 신학적으로는 ‘칭의’(稱義)에 해당한다. 칭의는 이신칭의(以信稱義)를 줄인 말로서,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의미이다. 종교개혁가들은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칭의 교리’로 가톨릭의 선행사상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종교개혁가들은 ‘칭의’를 혼신의 힘을 다해 주장했고, 이 교리 위에 ‘개신교’가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칭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모든 신자가 거쳐야 할 과정이다. 물론 칭의의 체험은 다양하다. 때로는 칭의가 점진적이고, 때로는 극적인 체험이 없는 경우도 있다. 체험의 형태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어도, 칭의는 기독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룩한 체험이다.

성화

칭의 교리는 종교개혁에서 비롯된 개신교의 생명이다. 그런데 오늘날 왜 ‘칭의’가 나약해졌는가? 그 이유 중 하나는 칭의가 성화(聖化)와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화’는 칭의 이후에 지속되는 삶의 과정을 지칭한다. 성화는 구체적인 삶의 계획을 가지고 신앙적으로 사는 것이다. 칭의는 거듭남이라는 그 순간에 초점이 주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성화와 연결이 돼야 한다. 종교개혁가들도 칭의와 성화의 삶을 연결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칭의’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즉 ‘거듭남’에 온 힘을 기울인다. 그렇기에 설교도 ‘믿으라!’ ‘주를 영접하라!’는 결신에 초점이 주어진다. 이 결신의 요청에 따라 신자들은 기도하고, 결단한다. 그런데 거듭남 자체는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감격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신자들도 처음에는 그리스도인으로 새로운 결단을 하면서, 의욕적으로 신앙생활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단이 시들해진다. 거듭남의 체험은 지나간 추억이 되고 만다. 그 이유는 바로 거듭남이 성화로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듭남을 성화로 구체화하지 않으면 거듭남은 공허해진다.

그렇기에 매주 ‘거듭남’만 강조하는 설교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삶의 적용이라는 성화가 빠진 설교, 거듭남을 성화로 연결시켜주지 못하는 설교가 한국 개신교의 위기를 초래했다. 거듭남과 함께 신앙을 구체적인 삶으로 연결할 수 있는 성화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 개신교가 가톨릭에 대해 ‘오직 믿음’의 교리를 내세우며 자긍심을 가졌지만, 사실은 성화와 연결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실천이 매우 취약해졌다. 교회의 사회와 역사 속에서의 역할도 위축됐다. 한국개신교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

칭의와 성화의 확장

개신교는 오랫동안 칭의와 성화를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차원에서 이해했다. 즉 거듭남의 체험을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서 받아들였다. 물론 칭의에는 개인적인 차원이 있다. 종교개혁가들의 칭의 교리가 실존적 차원에 치중된 것도 사실이다. 그 당시 행위를 강조하는 가톨릭의 구원관에 대항해 ‘믿음’을 강조하고 실존적 차원을 강조했다.

종교개혁가들의 칭의 교리는 훌륭하다. 하지만 교리는 언제나 새롭게 해석된다. 21세기, 이제 칭의와 성화를 넓은 차원에서 해석해야 할 때가 됐다. 먼저 칭의의 근거를 생각해 보자. 칭의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 죄를 속량하고,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신 것에 바탕을 둔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 개인의 죄만을 대속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피조물과 우주를 하나님과 화해시켰다. 죄는 개인적인 것도 있지만, 구조적인 것, 사회적인 것도 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죄와 허무의 힘 일체를 이기셨다. 예수님의 속죄가 인간과의 화해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나’의 죄만을 위해 돌아가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선다. 칭의는 개인적인 차원, 사회적 차원, 자연계의 차원 등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 그 각 영역들이 모두 의로워져야 한다. ‘나’ 개인만 의로워지고, 사회적 영역, 경제적 영역, 생태계의 영역을 의롭지 않게 그냥 둘 수는 없다.

거듭남은 ‘나’에게서 시작하며, 결단은 실존적 차원을 가진다. 하지만 거듭남이 개인적 차원에 머물 때 오히려 공허해진다. 즉 칭의는 ‘나’에게서 시작하여, 사회적 영역과 피조세계의 영역으로 확장돼야 하며, 각 영역에서 구체적인 성화의 실현으로 나아가야 한다.

오늘날의 거듭남은 하나님의 정의에 참여하고, 가난한 자를 도우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피조세계의 화해에 참여하는 성화로 연결돼야 한다. 각 그리스도인의 거듭남이 사회, 이웃, 정의, 자연으로 확대돼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거듭나서 혼자 기뻐해서는 안 된다. 대속의 기쁨이 이웃과 사회와 피조세계를 향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응답하고 그의 뒤를 따르는 성화의 삶이다.

김동건 교수 <영남신대 조직신학, 저자연락은 페이스북 facebook.com/dkkim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