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6. 구원:은혜의 승리] ⑤ 구원과 예정

열려라 에바다 2014. 9. 6. 20:41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6. 구원:은혜의 승리] ⑤ 구원과 예정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6. 구원:은혜의 승리] ⑤ 구원과 예정 기사의 사진‘구원 받을 사람 결정돼 있다’는 잘못

기독교 역사에서 구원의 ‘예정’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예정론은 가장 오해가 많은 교리이다. 오늘은 예정론에 대한 주요 주제를 보려한다.

예정론과 결정론

상당수 기독교인은 ‘구원 받을 사람이 결정’돼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심지어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까지 정해져 있으며 그 숫자는 불변한다고 믿는다. 이렇게 예정론을 이해하면, 그 예정론은 결정론과 차이가 없다. 미래가 고정돼 있다면, 그것은 기계적 결정론이 되고 만다.

결정론으로 이해된 예정론은 아주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첫째, 선교의 타당성이 상실된다. 모든 것이 결정돼 있다면 선교할 이유가 없다. 둘째, 인간은 어떤 책임적 행위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셋째, 하나님의 현재적인 선택의 자유가 박탈된다. 하나님은 이미 결정된 예정을 구경만 해야 한다. 넷째, 모든 것을 결정해두고 심판의 날을 기다리는 하나님은 자의적이고 폭군적이다. 이런 하나님은 성경의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개념과 모순되며, 모든 피조물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지와도 충돌된다. 그러므로 구원의 예정을 결정론적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예정론을 결정론처럼 해석하게 된 이유 중에 하나는 칼뱅의 예정론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칼뱅의 예정론에 구원은 선택(選擇)과 유기(遺棄)에 의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나님은 구원될 자와 버려질 자를 이미 정하셨다는 것이다. 칼뱅이 창세전에 선택과 유기가 결정되었다는 ‘이중예정론’을 주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예정론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칼뱅의 예정론은 인간의 타락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구원에 무능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예정론이 형성됐다. 칼뱅에게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의 행위’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정론을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차원을 떠나서 다룰 때 오해가 생긴다. 칼뱅도 예정이라는 이름으로 구원 받을 사람을 관찰하거나, 그 숫자를 계산해서 제시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경직된 형태의 예정론은 칼뱅이 아니라 칼뱅의 후학들에 의해 나타났다.

그렇다면 예정론은 무엇을 주장하는 교리인지를 보자. 예정론은 하나님이 은혜로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은혜’, 구원이 오직 하나님에게 달려있다는 ‘주권’, 하나님의 구원 선택에 대한 ‘감사와 찬양’에 초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정론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에 대한 감사, 찬양, 혹은 송영의 성격을 가진다. 즉 구원에 대한 감격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정론에서 가장 피해야 할 부분은 하나님의 예정을 ‘미래적’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또 ‘사변(思辨)’으로 접근하는 것도 위험하다. 구원을 지적인 호기심의 차원에서 사변으로 취급하면 예정론의 핵심을 벗어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칼뱅, 바르트와 같은 예정론에 대한 대표적인 신학자 중에 예정론을 결정론처럼 구원의 숫자를 고정되게 해석한 자는 한 명도 없다. 물론 결정론에 대한 성경적 근거도 없다. 또한 개신교 역사에서 결정론적인 예정론이 정통교리로 채택된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은총론

20세기 이후 예정론을 삼위일체적 구조 안에서 해석하기 시작했다. 구원을 성부 하나님의 단독 행위로 보지 않고, 삼위의 틀 안에서 보는 것이다. 새로운 시도 중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해석은 바르트에 의한 것이다.

바르트는 예정론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하나님은 철학과 사변의 신이고, 그리스도와 연관 없는 예정론은 잘못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과 주권도 그리스도 안에서 다루었다. 바르트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의지를 중요하게 보았다.

바르트의 예정론에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택은 언제나 복음과 축복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 축복, 사랑으로 부른다. 그래서 바르트는 예정론의 핵심은 인간을 구원하는 환희의 소식인 복음이기에, 예정론을 ‘복음의 총화’라고 말했다.

바르트는 선택받지 못한 자에 대한 저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즉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했고,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속량을 얻었다. 그는 이중예정을 십자가 사건으로 보았고, 유기는 인간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로 보았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을 선택하고 자신을 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크신 사랑과 은총으로 스스로 버려지는 대속의 죽음을 통해 모든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을 열었다고 해석했다.

살아계신 하나님

예정론은 닫혀진 교리가 아니다. 삼위 하나님의 은혜, 사랑, 구원의지가 드러나는 매우 놀라운 교리이다. 선택과 유기를 한 평면 위에 두면 충돌을 일으키는 위험한 사변이 된다. 삼위의 섭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현재적 선택을 함께 입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구원의 숫자를 고정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현재성을 부정하는 것이고, 살아있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서 고정된 것은 없다. 구원의 숫자가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불변하는 것이고, 인간과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지가 불변한다.

성경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로 넘친다. 하나님은 현재 살아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우리와 대화하고, 이 역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결정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을 죽은 신으로 만든다. 살아있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은 어떠한 종류의 결정론도 거부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살아있는 하나님이다. 하나님께 돌아오라. 그의 은총을 갈구하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지금 현재적으로 일어난다. 구원의 미래는 열려 있다.

김동건 교수 <영남신대 조직신학, 저자연락은 페이스북 facebook.com/dkkim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