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이파리 밑에 숨은 듯 피어 있던 붉은 동백꽃잎들이 중대한 심장수술을 받는 것처럼 붉은 피를 흘리며 바닷물 위로 뛰어드는 것… 아름다운 의문투성이의 찬란한 절명… 우리 시대의 속물생태학에 비추어서 나는 동백꽃을 더욱 사랑하고 싶어진다’
김승희(1952∼) 시인이 예찬한 동백꽃이다. 고려시대 문장가 이규보는 동백화(冬栢花)라는 한시에서 최초로 동백을 읊었다.
‘복사꽃 오얏꽃 비록 아름다워도 / 부박한 꽃 믿을 수 없도다 / 동백은 아리따운 맵시 없지만 / 추위를 견디기에 귀히 여기도다 / 여기에 좋은 꽃 달린 나무가 있어 / 눈속에서 능히 꽃을 피우도다 / 곰곰이 생각하니 잣나무보다 나으니 / 동백이란 이름이 옳지 않도다’
동백은 한겨울에 추위를 견디며 꽃을 피우기 때문에 우리 선조들은 그 기개를 높이 사 매화와 함께 귀히 여겼다. 소나무·대나무·매화나무를 세한삼우(歲寒三友)라 칭하고, 여기에 동백을 더해 엄한지우(嚴寒之友)라 치켜세웠다.
동백의 꽃말은 ‘겸손한 마음, 그대를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이다. 여느 꽃처럼 꽃잎이 낱장으로 떨어지지 않고 꽃이 가장 아름답게 피어 있을 때 꽃송이째 ‘툭’ 떨어지는 동백은 예로부터 애절함의 대상이었다.
경남 거제도 장승포에서 뱃길로 15분이면 닿는 지심도(只心島)로 ‘동백아가씨’를 만나러 이른 봄마중을 나섰다. 겨울을 참고 넘긴 동백 꽃망울들이 따스한 봄볕을 기다리며 개화를 서두르고 있다.
지심도는 하늘에서 내려다본 섬의 모양이 ‘마음 심(心)’자를 닮아서 얻은 이름이다. 거제 8경의 하나로 전국의 걷고 싶은 길 17선으로 선정된 ‘보물섬’이다. 동백꽃이 피는 12∼4월이 파도소리를 벗 삼아 동백꽃을 즐기기에 가장 좋은 시기로 꼽힌다.
동백꽃이 절정을 이룰 때는 숲길을 걸을 때마다 바닥에 촘촘히 떨어진 선홍빛 꽃을 일부러 피해가기도 힘들 정도로 무성하다. 난대성 수목인 동백은 제주도를 비롯한 남해안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지심도에 자생하는 동백숲은 현재 국내에서 원시 상태가 가장 잘 보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갈매기를 벗삼아 배를 타고 15분만 가면 둥근 모양의 무인 휴게실과 화장실이 있는 선착장에 닿는다. 지심도 동백 구경은 여기서 시작된다. 선착장에서 200m 올라 동백하우스 펜션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잡고 해안절벽 이정표를 따라 내려서면 ‘마끝’에 닿는다.
마끝은 남쪽 따뜻한 바람인 마파람이 닿는 자리다. 벼랑 위 수십 그루 곰솔이 한폭의 그림이다. 눈이 오면 ‘세한도’가 따로 없겠다. 마주하는 건너편 해안 능선에는 봉수대가 이어지고 그 끝에 서이말 등대가 자리잡고 있다.
지심도는 아름다운 풍광 속에 아픈 역사를 품고 있다. 일제 강점기 말 태평양전쟁에 혈안이 된 일본군이 해안 방어를 위해 섬 곳곳에 군사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포진지와 탄약고, 그리고 동백숲 부근에 있는 서치라이트 보관소와 일본기 게양대 등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한다.
마끝 해안에서 돌아 나와 경사가 완만한 시멘트 포장도로를 3분여 오른 뒤 정면으로 폭신한 숲길에 접어들면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에 의해 만들어진 군사 시설인 2개의 포진지와 탄약고를 만날 수 있다. 탄약고 안에는 일제 강점기 일본군의 포대 설치 상황과 지심도 주민들의 생활 사진이 전시돼 있다.
숲길을 다시 거슬러 나와 동백터널로 발길을 옮기면 시멘트 포장이 끝나는 지점에 흔들의자가 있는 넓은 활주로가 시야를 열어준다. 일본군 경비행기가 이착륙했던 자리다. 이제는 해돋이 명소로 바뀌었다. 바다 쪽에서 뜨는 해를, 뒤편 옥녀봉 쪽에서 지는 해를 한 곳에서 즐길 수 있다.
활주로를 지나면 지심도 동백 여정의 백미인 동백터널을 지난다. 지심도는 예로부터 동백나무가 많아 동백섬이라 불렸다. 60∼70%가량이 동백이니 놀랄 건 없다. 족히 수백 번의 겨울을 이겨냈을 거목은 가지끼리 얽히고 꼬이고 옆 나무와 뒤엉켜 있다. 비밀의 화원으로 통하는 입구 같은 이곳에 들어서면 하늘도 바다도 작은 점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가느다란 햇살만이 스며드는 울창한 상록수림에 들면 쉼 없이 들려오는 동박새의 노랫소리에 잠시 쉬어가고픈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시간도 쉬어갈 법하다.
동백꽃은 향이 없다. 대신 새빨간 꽃잎으로 동박새를 유혹해 가루받이를 한다. 겨우내 나비와 벌이 활동을 안 하니 꽃가루를 옮기는 이 새가 동백섬의 귀조(貴鳥)다. 삼색 깃털이 예쁜 새를 보지는 못했지만 파도소리와 새 소리를 듣고 걷다 보면 힐링이 저절로 된다. 아직은 꽃이 덜 피어 온통 붉게 물들지는 않았지만 군데군데 수줍게 고개를 내민 동백꽃은 유난히 붉다. 샛노란 수술을 감싼 꽃잎이 피를 뿜었다. 3월초에는 섬이 붉은색으로 물들 것이다.
왼편에 대나무숲을 끼고 부드러운 흙길을 지나면 일본군 서치라이트 보관소를 만난다. 가덕도, 절영도, 장승포 등 총 6개 방향으로 표지돌이 있었다. 현재는 5개뿐이다.
농염한 동백꽃 얼굴빛을 감상하며 터널 속의 오솔길을 걷노라면 파도의 철썩거림이 만든 해안 절벽을 만나고, 쪽빛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선다. 이어 끝점인 전망대에 다다르면 샛바람이 오랜 세월 동안 깎아낸 해식 절벽이 장관이다. 북쪽으로 눈길을 옮겨보면 출발지였던 장승포항과 방파제 끝 등대가 마주하고 있다.
섬끝 전망대에서 타오르는 듯한 동백꽃 뒤로 시리도록 푸른 바다를 마음에 담고 돌아나오면 처음 들머리에서 만났던 동백하우스 펜션을 다시 만난다. 여기서 200m 내려서면 트랙의 시작과 끝점인 지심도 선착장이다. 쉬엄쉬엄 걸어도 2시간이면 족하다.
지심도는 2009년 6월 예능프로그램인 ‘1박2일’로 방송을 타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관광객들이 사시사철 찾고 있다. 동백꽃이 절정을 이루면 하루 3000명이 넘게 몰려든다고 한다.
동백꽃 여행을 마친 뒤에는 장승포동에서 해금강까지의 약 28㎞에 이르는 14번국도 드라이브 코스를 놓치지 말자. 눈앞에 와현해수욕장, 구조라해수욕장, 학동 흑진주 몽돌밭, 학동 동백림, 바람의 언덕, 신선대 같은 명소들이 줄줄이 펼쳐진다. 해금강에 도착하면 사자바위, 미륵바위, 촛대바위, 신랑바위, 신부바위 등 이름도 재미난 바위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지심도(거제)=글·사진 남호철 선임기자
hcnam@kmib.co.kr
꽃피는 동백섬 수줍은 봄마중… 동백 꽃망울 터뜨리기 시작한 경남 거제 지심도
국내 동백숲 중 원시상태 가장 잘 보전… ‘비밀의 화원’ 동백터널선 힐링이 절로
‘동백섬’으로 불리는 경남 거제시 지심도에 선홍빛 동백꽃이 따스한 봄볕을 기다리며 수줍게 피어 있다. 꽃이 가장 아름답게 피어 있을 때 꽃송이째 떨어지는 동백은 애절함을 상징한다. 지심도는 동백 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 말 태평양전쟁의 아픈 역사도 안고 있다.
지심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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