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수 소박
제목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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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은 여자가 돈없이 시집 못 갈 세상이지만 옛날에는 남자가 돈없이 장가 못 갈 세상이었다. 고구려 결혼 습속을 살펴보자. 사위될 사람이 돈과 베를 잔뜩지고 장인집 문전에 가 엎드린다. 이름을 대고서 사위로 맞아줄 것을 애걸한다. 재삼 엎드려 애걸 을 하면 그때야 문을 열어주고 집 뒤에 지어놓은 사위집에 들인다. 이렇게 아들 딸 낳 고 살면서 5년 동안 처가에 노동을 공여해야 해방된다. 조선초(朝鮮初) 정도전의 `삼봉집(三峯集)'에 보면 딸가진 집에 혼담이 들어오면 납채 (納采)를 흥정하는데, 경매(競賣) 식으로 보다 비싸게 부른 집을 선택했으며 불러놓은 만큼 납채가 적으면 송사(訟事)를 일으키기까지 했으니 이를 납채 송사라 한다 했다.
연산군 때는 이 혼수 사치가 극심하여 조정에서는 혼인날을 신고하도록 의무화-의녀( 醫女)를 보내어 납채할 혼수를 수색시키기까지 했다. 역사도 유구한 혼비(婚費)의 신 랑 과당 부담이 근대화 과정에서 신부 과당 부담으로 자리바꿈을 했다. 그리하여 3천만 원 혼수가 적다고 아내를 구박-소박하고 처가에가 행패를 부린 일이 보도되기까지 했다. 요즈음 젊은이들의 배금주의를 새삼 탓하고 싶지는 않다. 여류 문화인류학자 도로시 리가 조사한 푸에볼로 인디언의 혼속(婚俗)을 보면 신랑은 침상(寢床)의 겉틀만 메고 가고 신부는 돗자리 엮을 갈대만 머리에 이고 간다. 예식이 끝나면 신랑은 숲에 가서 나무를 꺽어다가 침상을 완성하고, 신부는 갈대로 돗자리를 엮어 첫날밤의 보금자리를 만든다. 이렇게 손수 세간을 장만해 가는 것으로 삶의 낙 을 찾고 있었으며, 백인들이 세간을 사다주면 화를 내며 내동댕이치는데 자신들의 낙 을 빼앗은 행위가 되기 때문이라 했다. 캐서린 안 포터의 단편 소설에 한 넝마주이의 아내가 하루에 한 조각 씩의 베 나부랭 이만을 주워다 이를 이어 커튼 하나 만드는 이야기가 있다. 한꺼번에 주워다가 단번에 만들 수도 있지만 보다 고운 무늬와 보다 고운 색깔의 꼭 한 조각씩만을 주워 여미는 그 과정에서 생활의 낙(樂)을 건지고 있음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가정의 화락(和樂)이란 이처럼 외부에서 송두리째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만 들어가는 그 과정에서 기대하고 노력하고 진척하고 그리고 성취하는 데서 진국 우러나 듯이 우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과다한 혼수는 시집 장가간 자녀들의 세상사는 낙을 약 탈하는 행위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