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연주하고 숲이 노래한다.’
전남 담양의 대나무숲을 거닐면 꼿꼿한 바람을 만난다. 그 바람은 대나무 잎사귀에 생명을 불어넣어 푸른 화음을 만들어낸다. 귀기울여 대나무가 전하는 메시지를 듣노라면 온 마음은 죽향(竹香)에 물들고 정신은 청아해진다. 힐링이 저절로 된다.
예부터 사군자의 하나인 대나무는 충신의 절개를 상징했다. 한겨울에도 푸르고 비바람에도 굽히지 않는 외양이 많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단심가로 유명한 고려시대 충신 정몽주가 최후를 맞은 선죽교에는 대나무가 돋았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민영환의 피 묻은 의복을 보관한 방에서도 대나무가 솟아올랐다. 양기훈(1843∼?)은 이를 ‘혈죽도’라는 그림으로 남겼다.
대는 의연해도 파르라니 칼날처럼 빛나는 잎사귀들은 조그만 바람에도 흔들린다. 날개를 마찰해 연주하는 귀뚜라미처럼 자기들끼리 맞비비고 부딪치며 노래한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주인공들은 바람소리보다 더 시원한 대 잎사귀 소리를 채집하기 위해 기다리다 사랑을 시작했다.
대나무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이 담양이다. 우리나라 대나무 면적의 35%를 차지하는 최대의 대나무 산지다. 담양 354개 마을 중 350개 마을에 대나무밭이 있으며 면적은 총 16.5㎢로 축구장 1800개를 지을 수 있는 넓이다. 대나무 제품을 사고팔던 300년 역사의 죽물시장도 있었다. 죽녹원은 담양군이 조성한 16만여㎡의 죽림욕장이다. 한낮에도 볕이 잘 들지 않을 정도로 빼곡한 대숲 사이로 구불구불 산책로가 잘 정비돼 있어 연인들의 발길이 잦다. 이국적 정취 때문에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한국영화 ‘알포인트’의 촬영지로도 잘 알려졌다. 인공폭포와 생태전시관, 생태연못 등도 마련돼 있다.
죽림욕을 즐길 수 있는 산책로는 약 2.2㎞다. 운수대통길·죽마고우길·철학자의 길 등 8가지 주제에 따라 꾸며졌다. 높이 15∼20m의 쭉쭉 뻗은 대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산책로 입구에 들어서자 향기로운 대숲의 공기가 온몸을 감싼다. 코로 빨아들이는 시원한 공기가 머리까지 맑게 한다. 죽녹원 전망대 ‘봉황루’에 올라서면 가까이로는 영산강을 비롯해 관방제림을, 멀리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등을 조망할 수 있다.
대나무숲길에서는 늦가을 푸른 하늘을 뚫고 가차 없이 내리닫던 햇빛이 대나무 마디마디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진다. 조각난 빛은 대나무 사이로 내려앉으며 눈부시게 빛을 발한다. 대나무와 바람이 서걱거리는 소리는 일상의 생채기를 어루만지고 몸과 마음에 청량감을 불어 넣어 평온한 휴식을 준다.
대숲이 뿜어내는 음이온 덕분이다. 음이온 발생량이 700가량이면 시원함을 느끼는데 대숲은 1200∼1700 정도의 음이온을 발산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음이온 발생량은 10배 정도 더 늘어난다.
죽녹원과 전남도립대 일대에서 오는 17일부터 10월 31일까지 45일간 ‘대숲에서 찾은 녹색 미래’를 주제로 ‘2015담양세계대나무박람회’가 열린다. 지난해만 150만명이 다녀간 죽녹원은 박람회 기간 ‘지붕 없는 주제관’으로 재탄생한다. 주제체험구역 입구에 봉황이 지구를 감싸 날아오르는 형태의 구조물이 눈길을 끈다.
박람회의 핵심인 주제영상 ‘뱀부쇼’는 다른 박람회의 주제영상물과 달리 공연이 합쳐진 이색 콘텐츠로 관심을 모은다. 에디슨이 필라멘트를 발명할 때 대나무를 사용했다는 점에 착안한 ‘대나무 필라멘트 전구 만들기 체험프로그램’이 독특하다.
박람회장 주변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출입제한을 없앤 ‘원티켓 프리패스제’가 도입됐다. 관람객들은 행사기간 박람회 입장권으로 담양군이 운영하는 모든 관광지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또 박람회장인 죽녹원 일대와 종합체육관 및 전남도립대 구역에 교통혼잡이 예상됨에 따라 박람회 전 기간 ‘차 없는 거리’가 운영된다. 대신 행사장을 찾는 분들의 교통불편 해소와 관람객 편의를 위해 최대 1만대를 수용할 수 있는 주차공간이 마련되고 셔틀버스도 운행된다.
지난해 9월 17일부터 시작된 입장권 사전판매가 지난달 13일 56만장을 돌파해 목표량 54만장을 넘어섰다. 박람회조직위원회가 목표로 내세운 관람객 90만명 유치는 무난해 보인다.
담양에서는 죽녹원 외에도 둘러볼 곳이 많다. 죽녹원에서 영산강을 건너면 약 2㎞의 관방제림이 푸르름을 자랑한다. 1991년에 천연기념물 366호로 지정됐고 2004년 산림청 주최 전국 아름다운 숲 대회에서 당당히 1위에 올랐다. 수해를 막기 위해 조선 인조 때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었으며, 철종 때 숲을 조성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300∼400년 수령의 느티나무, 푸조나무, 팽나무, 벚나무 등 아름드리 고목들이 두터운 그늘을 드리운다.
죽녹원에서 차량으로 10분 정도 거리에 연인들의 데이트 명소로 자리 잡은 메타세쿼이아 길이 있다. 1972년 가로수길 조성 시범사업으로 심은 메타세쿼이아 길은 이제 명품길이 됐다. 40여년 된 높이 30m에 가까운 메타세쿼이아 2700여 그루가 짙은 초록빛을 발산하며 하늘로 뻗어 올라간 모습이 시원하다. 한때 허용됐던 자전거 통행도 완전히 금지되고 군데군데 쉬어갈 수 있는 벤치도 설치돼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름다운 정원으로 으뜸가는 소쇄원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세속의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산속 깊은 곳에 은거해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려고 만들어 놓은 조선시대 별서정원 중 본래의 양식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공간이다. 평범하고 소박한 한옥 두 채가 주변의 산과 계곡, 대숲과 잘 어우러져 황홀한 풍경을 자아낸다.
소쇄원과 함께 담양 민간정원의 쌍벽을 이루는 명옥헌원림에는 요즘 배롱나무꽃이 만발해 있다. 조선 중기 오희도가 자연을 벗삼아 살던 곳으로, 건물 앞뒤에 네모난 연못을 파고 주위에 꽃나무와 소나무 등을 심어 아름답게 가꿨다. 주변에는 송강 정철이 성산별곡을 지은 식영정도 있고 그 바로 옆에 가사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담양=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
竹香에 취하다… 대나무숲 벗삼아 떠나는 담양 생태여행
죽림욕 즐길수 있는 2.2㎞ 산책로 운수대통길 등 8가지 주제로 꾸며
올해 '한국관광 100선'에 이름을 올린 전남 담양 죽녹원을 찾은 연인이 울창한 대나무 사이 숲길을 걷고 있다. 대나무는 음이온을 발산해 혈액을 맑게 해주고 저항력을 증가시켜주는 등의 효능을 지닌 것으로 알려졌다.
담양세계대나무박람회 주제체험구역 입구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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