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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위의 산책, 누비이불 같은 ‘마음의 쉼터’… 강원도 강릉 ‘안반데기 운유길’을 걷다

열려라 에바다 2016. 3. 3. 11:22

구름 위의 산책, 누비이불 같은 ‘마음의 쉼터’… 강원도 강릉 ‘안반데기 운유길’을 걷다

 

구름 위의 산책, 누비이불 같은 ‘마음의 쉼터’… 강원도 강릉 ‘안반데기 운유길’을 걷다 기사의 사진
강원도 강릉의 안반데기 멍에 전망대에서 바라본 고랭지 배추밭의 풍광이 환상적이다. 조각보를 이어놓은 듯한 모습이 근대 추상미술의 선구자 몬드리안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구름 위의 산책, 누비이불 같은 ‘마음의 쉼터’… 강원도 강릉 ‘안반데기 운유길’을 걷다 기사의 사진
파란 하늘과 황톳빛 배추밭
구름 위의 산책, 누비이불 같은 ‘마음의 쉼터’… 강원도 강릉 ‘안반데기 운유길’을 걷다 기사의 사진
돌로 쌓은 멍에 전망대
구름 위의 산책, 누비이불 같은 ‘마음의 쉼터’… 강원도 강릉 ‘안반데기 운유길’을 걷다 기사의 사진
마을회관을 리모델링한 화전민 사료관
구름 위의 산책, 누비이불 같은 ‘마음의 쉼터’… 강원도 강릉 ‘안반데기 운유길’을 걷다 기사의 사진
배추 모양의 ‘느린 우체통’

지금부터 40∼50년 전에는 척박하고 버려진 땅이었다. 화전(火田)과 벌목의 상처는 이 땅에 뻘건 흙과 바위투성이만 남겨놓았다. 겨울이면 백두대간을 넘어오는 칼바람이 살을 에듯 할퀴고 지나가는 열악한 환경이 전부였다. 이곳에 사람들이 쏟아부은 구슬 같은 땀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던 곳이 산자락 가득 펼쳐진 국내 최대 고랭지 배추밭으로 변모했다.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대기4리 백두대간의 우묵한 고지대에 터를 잡은 ‘하늘 아래 첫 동네’ 안반데기다. ‘안반’은 떡메로 반죽을 내리칠 때 쓰는 오목하고 넓은 통나무 받침판을, ‘데기’는 평평한 땅을 말한다. 고루포기산(해발 1238m)과 옥녀봉(1146m)을 잇는 1100m 능선 쯤에 있다. 산이 배추밭이고, 배추밭이 곧 산이다.

조선시대 ‘여지도서’에 대기리라는 이름이 보인다. 당시 대기리는 강릉군 구정면에 속했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 20여 개의 마을을 합병한 뒤 대기리라 이름 짓고 상구정면에 편입시켰다. 이어 1917년 면제 개혁 때 상구정면이 왕산면으로 개칭되면서 왕산면 관할이 됐다.

이후 1965년부터 산을 깎아 개간하고 화전민들이 정착하며 형성됐다. 화전민은 수십m 아래로 굴러떨어질 수도 있는 가파른 비탈에서 곡괭이와 삽만으로 밭을 일구어 냈다. 1995년에는 대를 이어 밭을 갈아 낸 20가구 남짓의 안반데기 주민들이 땅을 정식으로 매입하면서 실질적인 소유주가 됐다. 척박한 땅은 198만㎡(약 60만평)에 이르는 풍요로운 밭으로 변모했다. 한낱 드넓은 배추밭으로만 여겨졌던 안반데기의 풍경이 노동의 신성함으로 다가온다.

‘안반데기 운유(雲遊)길’은 강릉바우길 17구간에 속한다. 운유는 ‘구름도 노닐다 가는 길’이란 뜻. 강릉에 조성된 길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만들어진 힐링로드다. ‘바우’는 바위를 뜻하는 강원도 사투리다. 또 바빌로니아 신화 속에 나오는 토지신(土地神)인 니누르타의 배우여신(配偶女神)으로, 건강의 여신(Bau)이기도 하다. 손으로 한 번 어루만지는 것만으로도 병에서 낫게 해주는 바우의 축복처럼 바우길을 걷는 사람 모두 저절로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길 위에 담았다.

총 연장이 350㎞에 달하는 강릉바우길은 백두대간을 따라 경포와 정동진까지 산과 바다를 지난다. 화전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안반데기 운유길은 안반데기 구간 6㎞, 고루포기산 구간 14㎞를 합쳐 20㎞에 달한다.

안반데기 구간은 운유촌에서 멍에 전망대를 거쳐 피덕령, 일출전망대, 서낭당을 찍고 되돌아오는 코스로 쉬엄쉬엄 느린 걸음으로 3시간가량 걸린다. 식당과 숙박, 주차장 시설을 갖춘 운유촌에서부터 시작해 이정표가 알려주는 곳으로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운유촌을 나오자마자 오른쪽으로 가파른 고갯길이 나타난다. 들머리는 숲이 울창하다. 늙은 소나무와 굴참나무, 신갈나무가 우뚝우뚝 들어서 있다. 10여분 산자락을 오르면 길은 두 갈래로 찢어진다. 곧장 가면 고루포기산 구간이고 오른편이 멍에 전망대다. 돌을 쌓아 만든 성벽 같은 돌담이 반긴다.

멍에는 소를 이용해 밭을 갈 때 사용하는 쟁기의 일부분이다. 전망대는 과거 소와 함께 밭을 일궜던 화전민들의 애환과 개척정신을 기리기 위해 밭에서 나온 돌을 주워 쌓은 것. 그래서 멍에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안반데기를 개척한 화전민과 마을 주민의 도전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2010년 조성됐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간 곳에는 정자 하나와 나무의자 몇 개가 전부다. 하지만 이곳의 풍광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옥녀봉과 고루포기산 사이 밭이 독수리 날개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한눈에 다 보기 어려울 정도로 드넓다. 가슴이 뻥 뚫리듯 시야가 터진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배추밭 산사면은 조각보를 이어놓은 듯하고, 근대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몬드리안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하늘 위 구름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안반데기 최고의 전망대다.

멍에 전망대를 뒤로 하고 피덕령으로 내려선다. 피덕령에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운유 쉼터와 화전민 사료관이 있다. 마을회관을 리모델링해 만든 전시관은 화전민들의 삶과 애환을 엿볼 수 있는 곳. 한낱 드넓은 배추밭으로만 여겨졌던 안반데기가 감동으로 다가온다.

마음을 가다듬고 옥녀봉 쪽으로 이어진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가면 풍력발전기와 마주친다. 능선을 타고 넘는 거센 바람에 윙윙 돌아가는 풍력발전기 날갯소리가 웅장하다.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찔끔 나온다.

종아리가 뻐근해질 무렵 일출전망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일출전망대 역시 사방 거칠 것 없는 풍경이 압권이다. 고요하고 적막한 황톳빛 개간지 너머로 겹겹이 펼쳐진 산자락,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 등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은 풍경을 보여준다. 구름이 무거워지면 안반데기 마을 지붕까지 내려와 앉는다. 그야말로 ‘구름 위의 산책’이다. 멀리 강릉시내 너머로 동해바다가 짙푸르다.

일출전망대에서 옥녀봉 헬기장까지는 완만한 능선길이다. 거대한 분화구처럼 움푹 팬 안반데기의 이국적인 풍경 덕에 길을 걷는 내내 눈이 즐겁다. 안반데기를 유유자적 걷다 보면 서낭당이 때맞춰 마중을 나온다.

서낭당의 숲과 벤치는 여행자들에게 넉넉한 쉼터를 내준다. 벤치에 앉아 걸어왔던 길과 안반데기 마을을 바라봤다. 남북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고랭지 채소밭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 화전민의 굳은살 박인 손이 포개진다. 자연이 연출하는 풍경도 아름답지만 척박한 땅을 일궈낸 화전민의 땀과 노력을 생각하면 저절로 경건해진다.

◆ 여행메모

강릉이지만 횡계에서 접근이 편리
겨울철엔 강릉IC-안반덕길 이용

안반데기는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대기4리다. 하지만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에서 접근하는 게 편하다. 영동고속도로 횡계IC에서 나와 용평리조트 입구 삼거리에서 도암댐으로 가다가 댐 못미처 왼쪽으로 고갯길이 나타난다. ‘안반데기’라는 이정표가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안반데기는 강릉 시내보다 횡계에서 더 가깝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횡계까지 간 다음 횡계에서 택시를 이용하는 게 낫다. 강릉이나 횡계에서 안반데기까지 운행하는 대중교통이 없기 때문이다. 강릉에서 대기리까지 하루 3회 시내버스가 다니긴 하지만, 버스에서 내린 뒤 1시간 정도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야 안반데기에 도착할 수 있다.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횡계로 가는 버스가 오전 6시22분부터 오후 8시5분까지 하루 24차례 운행한다. 2시간 30분 소요. 횡계에서 안반데기까지 택시 요금은 약 2만원.

하지만 겨울철에는 강릉IC에서 나와 경강로·백두대간로를 타고 닭목령을 거쳐 안반덕길을 이용하는 게 좋다. 눈이 내리면 도암댐쪽 길은 제설작업을 하지 않지만 이 길은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치워두기 때문이다.

안반데기에 운유촌(033-655-5119)이 있다.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다. 다른 먹거리는 횡계에 몰려 있다. 오징어와 삼겹살에 고추장 양념을 해서 구워 내는 오삼불고기와 황태구이·황탯국이 유명하다. 횡계에 위치한 황태회관(033-335-5795)의 황태요리는 별미다.

강릉=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