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역경의 열매] 홍수환 <17> 카르도나·스캔들·프로모터, 3대1로 싸워 패배

열려라 에바다 2017. 9. 18. 07:48

[역경의 열매] 홍수환 <17> 카르도나·스캔들·프로모터, 3대1로 싸워 패배

“옥희 때렸다” 2년 반 동안 시합 못해 50경기 채우고 은퇴… 미국으로 이민

 

[역경의 열매] 홍수환 <17> 카르도나·스캔들·프로모터, 3대1로 싸워 패배 기사의 사진
홍수환 장로가 콜롬비아 카르도나 선수에게 다운을 당했다.

1978년 5월 7일 콜롬비아 카르도나 선수에게 챔피언 자리를 내 준 이야기다. 그리고 왜 50전을 채우고 은퇴하려 했는지도 이야기하고 싶다.

카르도나 선수는 가사하라 다음에 싸운 선수였다. 콜롬비아 출신이었다. 이 선수와 싸울 때 나는 세 가지와 싸워야 했다. 먼저 카르도나 선수, 다음은 가수 옥희와의 스캔들, 그리고 내 제2차 국내 방어전의 프로모터권이었다. 즉 누가 프로모터 할 것이냐를 놓고 싸웠다. 그러다 보니 힘들었고 결과가 뻔했다. 나는 한국에서 시합한다면 프로모터는 당연히 최근호씨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프로모터권은 일본인 아라시다가 쥐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카라스키야의 승자는 무조건 아라시다가 지정하는 두 명의 도전자와 방어전을 치러야 한다는 옵션이 있었다. 그래서 두 달, 세 달 간격으로 가사하라, 카르도나와 붙었다.

연습하랴, 체중 조절하랴, 세 가지와 싸우랴, 여러모로 카르도나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카르도나와의 시합에서 12회 TKO로 졌다. 1회 때 눈이 찢어졌다. 눈 위에서 흐르는 피는 내 눈으로 흘러들었다. 내 눈뿐만 아니라 그날 장충체육관 링과 바닥에도 떨어졌다. 오픈시합 때 단 한명도 피를 흘리지 않았기 때문에 체육관에 묻은 피는 다 내 것이었다. 눈이 찢긴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까지 복싱하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상처가 난 적이 없었다.

3회전 이내에 버팅(부딪치는 반칙)으로 상처가 나면 재시합을 할 수 있었다. 시합을 다시 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앞이 보여야 복싱을 할 것 아닌가. 그러나 일본의 아라시다로부터 주최권을 넘겨받은 친일계 한국인 이시야마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그 시합에서 이기면 옵션에서 벗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카르도나가 이길 수 있게 내버려 둬야 했던 것이다.

피가 양 눈 사이로 흐를 때 눈을 껌벅거리면 눈앞이 붉은 암흑으로 변했다. 1회부터 12회 KO로 질 때까지 앞을 제대로 못 본채 나는 상대방 왼손 하나에 놀림을 당했다.

사람들은 내가 조강지처 옥희를 버려서 졌다고 했다. 파나마에선 4번 다운당하고도 옥희 때문에 힘을 얻어 이겼다. 나는 주위의 축복을 받으며 옥희와 힘들게 결혼했다. 하지만 어느 곳에도 떳떳이 놀러갈 수 없이 살다가 1년여 만에 파경을 맞았다. 딸 아이 하나를 낳았고 “맞았다” “때렸다” 해가며 우리는 꼭 14개월 만에 헤어졌다. 내 나이 28세였다.

한국권투위원회는 내가 같이 살던 여자를 때렸다고 2년 반 동안 시합 승인을 해주지 않았다. 1978년 5월 7일 카르도나에게 챔피언 자리를 뺏긴 후부터 마지막 시합 1980년 12월 9일까지 2년 하고도 6개월 넘게 시합을 못했다.

마지막 시합이 50전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가 49세였고 세계타이틀을 뺏긴 숫자도 49전만이었기 때문에 49라는 숫자가 제일 싫었다. 그래서 친구 염동균 선수와의 시합을 끝으로 50전을 채우고 은퇴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50전을 채우고 링을 떠납니다”라고 기도를 드렸다. 1969년 데뷔전이 무승부더니 80년 은퇴시합도 무승부였다. 링을 떠나고 83년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