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입 시험은 무난하게 잘 치렀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중 한 곳에 지원할 수 있을 만한 성적이었다. 당시 상대적으로 안정권이라고 생각한 고려대에 지원서를 넣었다. 그러나 상황은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해 유독 고려대 의대에 학생이 몰려 경쟁률이 연세대 의대보다 높아진 것이다. 졸지에 뚜껑을 열기 전까지 합격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기도해 왔던 ‘아프리카 의료선교사’의 꿈을 이룰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혹시 이것이 가짜인 나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아닐까.’ 그래서 막무가내로 이렇게 기도했다.
“좋습니다. 하나님! 만일 제가 의대에 떨어진다면 당신께서 저를 ‘진짜’로 인정해 주시지 않겠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의과대학에 입학하지 못하면 교회를 떠나겠다고 하나님께 엄포를 놓은 것이다. 오랜 시간을 오로지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달려왔는데 하나님과 약속한 아프리카 의료선교사가 될 수 없다면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되돌아보면 어쩜 그렇게 괘씸한 생각을 했나 싶다. 다행히 합격 통지서를 받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진짜로 여겨 주시기로 했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전히 내 안엔 자유함이 없었다.
전주에서 서울로 유학을 와서 처음 맞이하는 주일이었다. 교회를 아직 정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갈 교회가 없었다. 어디를 가야 하나 고민하다 한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주일인데 갈 교회가 없어. 혹시 아는 곳 있어?” “야, 마침 잘됐다 재훈아. 전주침례교회 전도사님이 목사 안수 받으시고 인천에 교회를 개척했다고 들었어. 한번 전화해 봐.”
전화를 해보니 교회는 인천 백운역 근처였다. 학교가 위치한 서울 성북구와는 대중교통으로 왕복 4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잠시 고민했지만 당장 알아본 교회가 없으니 일단은 몇 주간만이라도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신앙생활은 졸업 후까지 내내 지속됐다. 다른 교회를 알아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목사님께서 개척교회를 일궈내기 위해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발목을 잡았다. 수요예배와 금요철야예배, 토요일 청년부, 주일학교 봉사, 성가대 지휘까지. 일인 다역을 감당해야 하는 게 개척교회 교인의 삶이었다.
신앙생활에 시간을 많이 쏟다보니 신앙과 학업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매주 월요일마다 시험을 봤는데 공부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교회 활동을 줄여야 하나 고민하는데 묵직한 고민이 가슴을 눌렀다. ‘너 이거 실패하면, 네 신앙이 가짜인 거 드러나는 거야. 하나님께서 너를 인정하지 않으실 거야.’
학교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결국 1년 낙제를 하고 말았다. 공부에 관해선 늘 자신감이 있던 나였다. 의대 입학 전만 해도 ‘내가 공부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대 공부는 달랐다. 일단 양이 너무 방대했다. 더 큰 장벽은 영어였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동기들과 영어실력에서 큰 차이가 났다. 원서를 읽기 위해 나는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하는데 친구들은 쓱 한 번 보곤 귀신같이 이해했다. 좌절을 맛봤다.
돌아보니 이 또한 하나님의 이끄심이었다. 낙제로 1년을 더 다니면서 생리학과 병리학, 외과책을 한 번 더 읽을 수 있었고 그렇게 한 번 더 머릿속에 넣었던 게 훗날 아프리카 의료현장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역경의 열매] 이재훈 <4> 하나님께 “의과대학 입학 못하면 교회 떠나겠다”
의대 다니며 인천 개척교회 출석… 공부할 시간 부족해 결국 낙제
![[역경의 열매] 이재훈 <4> 하나님께 “의과대학 입학 못하면 교회 떠나겠다” 기사의 사진](http://image.kmib.co.kr/online_image/2017/1113/201711130005_23110923847172_1.jpg)
1993년 고려대 의과대학 졸업식 모습. 왼쪽부터 아버지, 필자의 아내 박재연 선교사, 필자,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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