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사이자 선교사다. 내가 있는 곳은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누군가에겐 애니메이션 영화나 바오밥 나무가 우뚝 서 있는 신비로운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땅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는 것이 일상인 ‘생의 전쟁터’다. 최근엔 흑사병으로 불리는 페스트가 창궐해 120여명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 곳이다.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 깊은 고민들이 제자리걸음에 머물 때가 있다. 벗어나려 발버둥을 쳐도 도무지 내 맘대로 되는 게 한 톨도 없을 때 말이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적잖았다. 하염없이 고민하던 그때, ‘나의 하나님’은 아주 멀리 떨어져 계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삶을 정리하고 돌이켜보니, 그 순간 그 일이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오늘날 나를 여기 오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프리카에서의 이동진료사역은 그야말로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이재훈’이란 제목으로 철저하게 계획된 하나님의 작전이었다.
“재훈아, 너 교회 다녀? 거기 가면 친구도 많고, 맛있는 것도 준대. 같이 갈래?”
내가 교회에 처음 나가게 된 건 네 살쯤이었다. 동네 형이 교회에서 빵을 준다기에 따라갔던 게 시작이었다. 우리 집은 동생과 형, 부모님은 물론 할머니와 친척 어른들까지 아무도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신앙 자체가 전무한 집안에서 그렇게 나 혼자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내가 다니던 전주침례교회에서는 출석은 물론, 전도와 헌금을 잘하는 학생에게 책갈피를 선물로 주곤 했다. 멋진 그림과 성경구절이 적혀 있는 책갈피였다. 그때 나는 성경책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였는지 내 눈엔 성경구절이 적힌 책갈피가 보물 제1호였다. 그 책갈피를 얻기 위해 전도를 매우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철제로 된 ‘고려인삼통’에 책갈피를 모았었는데 그 통이 꽉 찰 정도였다. 집에 돌아오면 그렇게 모아둔 책갈피를 바닥에 쭉 펼쳐놓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순서대로 보는 게 행복한 놀이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다. 그때 나는 평일에도 교회에 자주 가곤 했다. 문제의 그날도 학교를 마치고 교회에 갔던 날이다.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건너편 장의자에 성경책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게 보였다. 평소 그렇게나 갖고 싶어 했던 성경책 말이다.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예배당 안엔 나뿐이었다. 누가 볼 새라 얼른 성경책을 훔쳐 달아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심장이 쿵쾅거려 터질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성경책을 꺼내는 내 손이 덜덜 떨렸다. 그렇게 읽고 싶던 성경이었는데, 막상 훔쳐온 성경책을 읽으려니 겁이 나서 볼 수가 없었다. 결국 한 자도 읽지 못한 채 책상 속에 넣어뒀다가 다음 날 다시 교회에 찾아갔다. 그리고 마치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는 듯, 처음 그 자리에 다시 올려뒀다. 그리고 하나님께 성경책을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약력 △1967년 전주 출생 △고려대 의과대(1986∼1993년) △연세대 의과대 외과학 석사(2001∼2003년) △아프리카오지선교회 의료선교사(2003∼2011) △FBDB(Fiainana Be Dia Be, 현지기독단체) 대표(2012∼현재) △밀알복지재단 마다가스카르 지부장(2013∼2017)
[역경의 열매] 이재훈 <1> 초등생 시절, 성경책 욕심 나 교회서 훔쳐 달아나
펴보려니 덜덜 떨려 다음날 제자리 반납… 그런 나를 의료선교사 되게 계획하셔
![[역경의 열매] 이재훈 <1> 초등생 시절, 성경책 욕심 나 교회서 훔쳐 달아나 기사의 사진](http://image.kmib.co.kr/online_image/2017/1108/201711080000_23110923844732_1.jpg)
이재훈 선교사가 2011년 3월 마다가스카르 수도 안타나나리보에서 이동진료를 위해 오지 마을로 이동하기 전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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