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역경의 열매] 이재훈 <14> 혀 종양 어린이 포기할 수 없어 한국 보내 수술

열려라 에바다 2017. 11. 27. 08:09

역경의 열매] 이재훈 <14> 혀 종양 어린이 포기할 수 없어 한국 보내 수술

출생신고조차 안돼 겨우 비자 취득… 무당이 치료 막아 많은 환자들 고통

 

[역경의 열매] 이재훈 <14> 혀 종양 어린이 포기할 수 없어 한국 보내 수술 기사의 사진
2012년 8월 서울 고대안암병원에서 종양제거 수술을 앞둔 마나이(왼쪽)와 수술 한 달 뒤 회복 중인 마나이의 모습.

2011년 ‘희망TV SBS’를 촬영하던 때다. 벤분드루(Benvondro) 지역으로 이동진료를 갔다. 마을에서 만난 한 아이가 열병에 걸려 치료를 해주고 있었다. 함께 촬영을 갔던 배우 이필모씨가 근처 마을에서 마나이를 보고 놀라서 데리고 왔다.

“선생님! 어떤 아이 혀가 엄청나게 커서 입을 다물지 못해요. 이 아이 좀 봐주세요.”

마나이를 보았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수술할 때 피가 많이 날 것 같아 이런 오지에서 수술하기는 힘들겠다는 것이었다. 진찰하려 했을 때 마나이는 쉽게 자신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당시 9세였던 마나이는 태어난 지 몇 개월 안 됐을 때부터 혀가 입 밖으로 나올 정도였다고 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혀가 컸는데 음식은 어떻게 먹는지 궁금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아이가 무엇인가를 먹는 장면을 포착했는데 음식을 혀 위에 올려놓고 씹지도 않은 채 목으로 넘기고 있었다. 음식의 맛이나 알까?

이 아이를 수술해야 할지, 그냥 둘 건지 선택해야 했다. 그냥 둔다는 것은 음식을 씹지 못하는 상태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수술을 한다면 과다출혈, 피가 목구멍으로 역류할 때의 대응 등 매우 높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가장 기본적인 의료장비조차 부족한 마다가스카르에서 진행하기엔 위험 수위가 너무 높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시설과 장비, 우수한 의료진이 갖춰진 한국으로 보내는 거였다. 하지만 당시 마다가스카르엔 한국대사관도 없어 비자를 받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심지어 마나이와 부모는 출생신고조차 돼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우리가 사는 수도 타나에서 마나이네 집까진 1400㎞나 떨어져 있어 쉽게 도와줄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결단을 해야 했다. 쉽지 않겠지만 우린 마나이가 극심한 고통에서 해방되는 모습을 그려보며 한국으로 보내기로 했다. 첫 단추는 출생신고였다. 마나이 가족을 데리고 왕복 160㎞의 비포장도로를 수차례 왕복하며 겨우 서류를 만들었다. 신분증을 만든 후 남아공에 있는 대사관에 서류를 보내 여권을 신청하고, 여권이 나오면 비자를 신청할 수 있었다. 글을 알지 못하는 마나이의 부모에겐 이 모든 과정이 생소한 일이었다. 관공서를 찾아가 신청서를 작성하는 일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었을 거다. 비자가 나오던 날 나는 의대 합격 통지서를 받은 것처럼 환호를 질렀다.

마나이는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됐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얼굴의 거의 반을 가리고 있던 종양을 제거하자 가려져 있던 해맑은 미소가 드러났다. 마나이는 수술 후 빠르게 회복하면서 통닭을 한 번에 두 마리씩 먹을 정도로 식성도 좋아졌다. 이 아이를 한국에 보내기 위해 힘을 보탠 손길들이 열매를 맺었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마나이에겐 죽을 때까지 짊어져야 했을 질병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중요한 사건이기도 했다. 키가 부쩍 자란 마나이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닌 제법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턱관절의 움직임도 많이 돌아와 이제는 음식을 씹으며 먹을 수 있게 됐다.

마다가스카르엔 여전히 수많은 ‘마나이’가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낫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도 타의에 의해 치료를 거부당한 채 생명을 잃기도 한다. 치료를 위해 오지로 찾아갔는데 환자들의 치료를 막는 무서운 사람들. 그들은 바로 ‘무당’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