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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선도 <32> 1989년 시작한 호렙산 새벽기도회로 영적 각성

열려라 에바다 2018. 9. 18. 07:54

[역경의 열매] 김선도 <32> 1989년 시작한 호렙산 새벽기도회로 영적 각성

치유 목회 결실, 성도 4만명 넘어서… 양로원 세워 사할린 동포 귀국 도와

 

[역경의 열매] 김선도 <32> 1989년 시작한 호렙산 새벽기도회로 영적 각성 기사의 사진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왼쪽)가 1992년 10월 강원도 춘천에 건립한 무료 양로원인 ‘사랑의 집’에 입소하는 사할린 동포와 악수하고 있다.

1980년대 민방위 교육을 교회에서 하며 폭발적인 성장이 이뤄졌다. 건축할 때 졌던 빚도 다 갚았다. 교회의 모든 시스템과 구조 자체를 조정해야 할 상황이 됐다.

먼저 3개 교구를 묶어 선교구라 하고 부목사를 뒀다. 각 교구는 지역별로 한 명의 심방전도사를 뒀다. 교구는 10∼12개의 지구로 구성해 평신도 지구장을 세웠다. 지구는 다시 10개의 속회로 구성하고 속장이 인도하게 했다.

‘그릇’을 만드니 ‘물’이 채워졌다. 전도 후 정착하는 교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절실한 것은 평신도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래, 본래 감리교 운동은 평신도 운동이었다. 교역자 중심의 목회는 자칫 평신도들에게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성향을 갖게 할 위험성이 있다.’ 매년 새해가 되면 평신도 지도자 전지훈련을 실시했다. 교회의 목회 방향성을 제시하고 임원의 책임과 사명, 속회의 활성화 방안, 현대신학 동향 등을 가르쳤다.

교회는 영감 있는 설교·음악·의식·안내라는 4가지 핵심가치를 붙들었다. 특히 영감 있는 안내를 위해 교회 입구부터 예배당 꼭대기까지 100여명의 안내위원을 배치했다. 복장과 표정, 인사하는 자세와 말투까지 교육했다.

8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광림교회는 성도 수가 4만명을 넘어섰다. 인간에 대한 치유라는 목회학적 관점이 교회성장이라는 선교적 방향성과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사람들은 삶의 안정적 토대를 만들어가면서 동시에 물질적 안정성에 상응할 만한 정신적 풍요, 영적 성숙에 이르고 싶어 하는 갈망이 있었다.

그 열망을 터뜨린 것이 89년 6월 시작된 호렙산 새벽기도회였다. 새벽 3시30분부터 성도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다. 본당 4300석은 만석이었다. “여러분, 우리가 모인 것은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호렙산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자리입니다. 모세가 사명을 받은 자리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자리입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호렙산 새벽기도회를 통한 영적 각성은 기도운동으로 이어졌다.

기도의 불길을 잇고자 강원도 춘천 서면에 기도원 건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기도원 허가가 나지 않았다. ‘뭔가 하나님의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기도원보다 복지관을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기도응답을 받고 계획을 바꿔 무료 양로원 사업을 하겠다고 신청했다. 그러자 곧바로 허가가 떨어졌다.

무료 양로원 ‘사랑의 집’을 통해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러시아의 사할린 동포 1세들이 영구 귀국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사할린 동포들은 일제 징용에 끌려갔다가 2차대전 후 소련의 출국 거부로 고독하게 생을 마감하고 있었다. 당시 안기부(현 국가정보원) 대한적십자사 법무부 보건복지부와 교회가 연합해 150명의 사할린 동포를 모셔왔다. 교회는 이분들에게 의식주 제공은 물론 사망 후 장례와 묘지문제까지 해결해줬다.

고향을 떠난 지 50여년 만인 1992년 꿈에 그리던 고국 땅을 밟고 좋아하던 노인들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세월이 흘러 무료 양로원은 치매 요양원인 ‘사랑의 집 광림노인전문요양원’으로 전환했다. 모셔왔던 무의탁 사할린 동포들이 연로해지면서 치매환자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웨슬리가 개인적 성화뿐만 아니라 사회적 성화도 중시했듯 우리 교회도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늘 고민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