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상의 에세이]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
어쩌자고 종교개혁지 탐방(11)
체코를 떠나, 100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부터는 루터의 흔적을 만나러 간다. 그런데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힌다. 루터의 행적은 독일 전역에 걸쳐있다. 넓어도 너무 넓다. 그것도 대도시 중심으로 굵직굵직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작은 도시들에 흩어져있다. 그만큼 루터의 활약이 활발했다는 뜻이긴 한데, 그렇다 보니 여행자 입장에선 곤란하다. 답사 동선을 잡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특히 주요 지점들이 동에서 서로 길게 늘어서 있어서, 출발지에 따라 동에서 서로 가거나 서에서 동으로 가면서 작은 도시와 마을을 수시로 들러야 한다. 그래서 독일 지역 종교개혁지 탐방은 렌터카를 이용하거나, 투어버스를 이용하곤 한다.
필자도 한번 패키지 투어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좀 있다. 독일은 생각보다 넓은 나라인데, 작은 도시와 시골 마을을 연결하다 보니 길도 ‘아우토반’이 아니다. 도로를 따라 다음 도시가 나올 때까지 꼼짝없이 차에 실려가면서, 무슨 ‘로드무비’라도 찍는 기분이 든다. 루터라는 인물 하나에 이렇게까지 집중해야 하나 싶어진다. 특히 10~15일 정도의 일정으로 유럽에 왔다면, 이 코스는 결코 들어서면 안 되는 길이다. 게다가 그렇게 해서 찾아가는 장소들도 좀 문제가 있다. 루터가 태어난 곳, 첫 세례를 받은 곳, 수도사가 된 곳, 수도사가 되어서 첫 미사를 집례한 곳.... 마지막 설교를 한 곳, 죽은 곳 등등... 우리가 이런 곳을 꼭 다 가봐야 할까? 마치 로마 가톨릭에서 떠받드는 성자의 일대기를 따라가는 성지순례를 연상시킨다. 종교개혁지 탐방이 꼭 그런 식일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접근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을까? 아니, 모든 것을 다 떠나서, 과연 그런 여행이 ”재미“가 있을까?
필자는 정말 중요한 도시 세 곳만 골라보고, 나머지는 과감히 건너뛰는 것을 제안한다. 물론 중간에 동선이 맞아서 – 그것도 너무 잘 맞아서 - 잠깐 들렀다 가면 되는 동네라면 모를까... 굳이 루터의 모든 인생을 다 되짚어가느라 시간과 체력을 쓸 필요는 없다. 그래서 필자가 고른 세 도시는 비텐베르크, 보름스 그리고 바르트부르크이다.
지도를 보자. 각각의 도시는 거리가 다소 떨어져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관련된 ”시간순“으로 나열하면 ‘비텐베르크’ – ‘보름스’ – ‘바르트부르크’ – 다시 ‘비텐베르크’ 순이다. 처음에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곳이 비텐베르크이고, 그 때문에 황제의 종교회의에 반강제로 불려갔던 곳이 보름스이며, 그곳에서 무사히 빠져나와 숨어지내던 곳이 바르트부르크이다. 그런데 여행자 입장에서 동선을 짜려고 보면, 바르트부르크가 중간에 끼어있어서 문제다.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소모적이므로, ”공간순“으로 ‘보름스’ – ‘바르트부르크’ – ‘비텐베르크’ 순으로 움직이거나, 혹은 그 역순으로 움직여야 한다. 실제 여행 동선과 다르더라도, 본 연재글은 시간순으로 비텐베르크부터 진행하겠다.
비텐베르크의 루터 하우스
루터의 95테제가 발표되었던 그 유명한 비텐베르크. 필자가 찾아갔을 때는 마침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었던 2017년도였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개신교 관광객이 이곳을 방문했다. 그래서 비텐베르크도 수년 전부터 이때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도시 전체가 관광 수입으로 한몫 잡으려고 벼르고 벼르는 모습이었다. 루터의 행적을 관광지로 잘 만들어 두었고, 학생들의 수학여행이나 교육 코스로도 활용하고 있었다. 필자가 이곳에 갔을 때, 길목마다 한국인 답사팀을 만날 수 있었다.
도시 전체가 마치 루터의 유적지인 것처럼 포장되고 있지만, 사실 꼭 가봐야 할 곳은 몇 군데에 불과하다. 가장 먼저 가볼 곳은 루터하우스이다. 루터하우스는 루터가 살던 집을 박물관으로 꾸민 것이다. 루터와 그의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가 결혼 선물로 받은 건물이자, 이 가정의 생계를 위해 기숙 학원 비슷하게 운영되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규모가 상당하다. 카타리나가 얼마나 고생했을지 상상해보자.
입장하면 곧바로 화장실과 기념품 숍을 만난다. 만화 캐릭터로 재탄생한 루터 입간판을 보면서 ”준비 많이 했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는 루터에 관한 책과 팸플릿이 전시되어 있는데, 제법 규모도 있고 체계적이다.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고서들을 보관한 서가도 있고, 공공 금고, 십계명을 설명한 그림, 루터의 아내 ‘카트리나 폰 보라’에 관한 그림도 몇 점 보인다.
박물관은 두 개의 건물이 이어져 있으며, 여러 층과 여러 방에 전시물이 가득하다. 당황하지 말고 차근차근 살펴보자. 각 방마다 특징이 있다. 루터의 생활상, 루터의 종교개혁 스토리 등이 삽화로 담긴 포스터와 저서들을 살펴보자. 농민운동 진압에 사용된 무기, 개혁자들의 저서, 루터와 가족들의 초상화, 지인들이 모여 탁상 담화를 나누었던 기다란 테이블이 있는 방도 유심히 살펴보자. 전시물 하나하나에 갖가지 재미있는 일화들이 숨어 있다.
사실, 어디든지 박물관이라는 공간은 그저 아는 만큼 보인다. 최소한 1권의 루터 전기는 읽고 답사를 떠나자. (IVP에서 나온 ”처음 만나는 루터”라는 책을 추천한다.) 참고로 루터의 전기를 보면, 가장으로서 가족들과 늘 함께 하려고 하는 루터의 모습과, 그의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평등하면서도 질서 있는, 분업과 조화가 잘 이루어지는 성숙한 부부의 관계는 오늘까지도 존경받는 요인이다. 루터하우스에서 그런 모습을 더욱 느낄 수 있다.
비텐베르크 대학, 멜랑히톤 하우스
지도를 보면, 도시 중심부의 길 하나를 두고 가봐야 할 곳들이 모여있다. 루터하우스에서부터 걸어서 이동하면 된다.
비텐베르크 대성당으로 가는 길에 당시 루터가 일했던 비텐베르크 대학이 있다. 루터 하우스에서 멀지 않다. 비텐베르크 대학은 프리드리히 3세가 독일에서 세 번째로 세운 대학으로, 개신교 신자들을 육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대학 건물 바닥에 독일 대학이 지어진 순서를 표시하는 동판이 설치되어 있다. 대학 이름과 설립연도만 깔끔하게 적혀 있어서 은은하고 멋져 보였다. 너무 적나라하지 않고 품격이 있다. 역사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표식이나 조형물을 만들고 공간에 배치하는 운영의 묘에 대해서도 비텐베르크에서 배울 점이 많다. 역시 가까운 곳에 루터의 조력자 멜랑히톤 하우스도 눈에 띈다.
성 마리 교회
조금 더 걸으면, 루터와 멜랑히톤 동상이 서 있는 광장이 나온다. 보통 유럽은 도시 중심에 있는 광장에 시장이 열리므로, 이곳에서 간단한 요기를 해도 좋다. 광장 근처에 성 마리 교회가 있다. 루터가 오랜 세월 목회했던 교회다. 그의 아내 폰 보라와 이곳에서 결혼했고, 그의 자녀들이 세례 받는 모습도 그림으로 남아있다. 루터의 절친이자 지지자였던 당대 최고의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제단화라고 한다. 성상과 성화도 교육적 차원에서 미신을 제거한 내용이라면 얼마든지 수용해주었던 초기 개혁 시대에, 루카스 크라나흐는 자신의 그림 실력을 교회를 위해 아낌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여러 작품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성만찬 장면을 패러디한 그림에 눈길이 갈 것이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당당한 종교개혁자로서 온 세계 앞에 우뚝 섰던 루터이지만, 그가 한편으로는 연약한 한 인간으로서,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갔던 인물이었음도 짐작하게 된다. 아마 화가가 루터의 절친이었기에 이런 그림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스도의 품에 안긴 루터의 표정이 한없이 편안해 보인다. 그렇다. 그도 힘들었을 것이다. 신자가 이 생에서 탁월한 은사로 존재감을 빛내고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 자세는, 복음과 인생의 깊이를 절반만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위와 책임의 고하를 막론하고, 신자의 삶은 연단으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이 땅의 신자의 삶은 여러모로 피곤하며, 오직 참된 안식은 주님께만 있다. 주께서 속히 오시기를, 새 하늘과 새 땅이 속히 도래하기를, 그래서 참 평안이 우리에게 주어지기를 매일 앙망할 뿐이다.
※ 주의 : 아무리 관광지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실제 운영되는 교회다. 조용히 둘러보는 것은 기본 예절이고, 사진을 찍을 때는 관리인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자. 2유로 정도 기부하면, 굳어 있던 관리인의 표정이 활짝 개면서, 마음 편하게 둘러볼 수 있다.
비텐베르크성 교회
루터와 멜랑히튼 동상이 있는 비텐베르크 광장을 지나 조금 더 걸으면, 드디어 95개조 반박문이 설치된 비텐베르크성 교회를 만나게 된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95개조 논제를 발표했다는 그곳이다. 그 당시 게시판 역할을 하던 교회 문은, 지금은 아예 95개 논제를 기록해둔 청동문으로 바뀌어 있었다. 루터는 중세교회의 사제 신분으로서 로마서 강해를 하면서 복음을 깨닫게 된 사람이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뒤늦게 비로소 성경을 연구하면서 알게 되었던 것이다. 진정한 복음을 발견한 그는 당시의 관행이었던 면벌부(또는 면죄부) 판매가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그 유명한 95개조 반박문을 썼다. 첫 줄에 회개하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돈 주고 면벌부를 사는 행위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회개라고 하였다. 이것이 정말로 교회당 문에 붙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었는지 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던졌던 메시지가 온 유럽의 양심을 깨우고, 흔들었다는 사실이다.
교회당 내부에는 루터의 무덤과 그의 조력자 멜랑히톤의 묘가 나란히 있다. 칼빈이라면 어땠을까. 칼빈은 물론, 후대의 종교개혁자들은 대부분 예배당 안에 묻히는 것을 거절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은 루터파 교회당답게 조각상과 그림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초기 종교개혁의 한계를 보여주는 느낌이 든다. 다만 이들은 로마 가톨릭의 성상이나 성화와는 개념상 차이가 있다. 그림은 신화나 미신을 제거하고, 성경 속 이야기를 풀어냈다. 설교단을 중심으로 교회당 양옆 기둥에 세워진 조각상과 동상은 로마 가톨릭처럼 천사나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당시 유명한 종교개혁자들의 모습이다. 이 교회당를 꾸미는 데에도 루터의 친구 ‘루카스 크라나흐’가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이처럼 비텐베르크는 처음부터 끝까지 루터의 도시였다. 루터는 직장과 교회에 가까운 곳에 살면서 엄청난 업무를 감당했던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런 루터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들’도 있었다. 다음 글에서 우리는 루터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바로 그 두려운 순간으로 들어가보려 한다.
황희상 (‘특강 종교개혁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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