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상 에세이] 보름스 : “내가 여기 섰나이다!”
어쩌자고 종교개혁지 탐방 (12)
앞의 글에서 설명했듯이, 독일 여행 동선을 짤 때는 동에서 서로, 혹은 서에서 동으로 가는 것이 합리적이다. 즉, 베를린에서 가까운 비텐베르크에서 출발해서 바르트부르크를 거쳐 보름스로 가거나, 거꾸로 프랑스나 스위스 쪽에서 가까운 보름스에서 출발해서 비텐베르크 쪽으로 이동하는 동선이 되겠다. 다만 이 연재 글은 편의상 루터의 생애를 따라 시간순으로 쓰고 있다.
보름스
보름스는 Worms라고 표기한다. 영어 단어로 Worms는 ‘벌레’라는 뜻이니, 도시 이름으로는 꽤 재미있는(?) 셈이다. 대도시 프랑크푸르트에서 가깝지만, 인구 8만이 조금 넘는 작고 조용한 도시다. 이곳은 95개 논제로 개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루터가 카를 5세에게 불려가 목숨을 걸고 자신의 신앙을 굽히지 않았던 역사의 현장이다. 당시엔 위풍당당한 주요 행정 도시였지만, 지금은 조용한 소도시 마을 일뿐이다. 보름스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시내 중심부 광장에 있는 루터의 종교개혁 기념 동상을 찾아가자.
루터 광장의 기념비는 그 기단까지 하면 꽤 규모가 크다. 루터 한 사람의 동상이 서있는 것이 아니라, 꽤 여러 종교개혁자들의 동상이 함께 모여있는 형태이다. (당연하게도) 가운데 우뚝 선 루터의 동상을 중심으로, 여러 개혁자들의 동상과 명패, 그리고 부조화가 있다. 종교개혁 당시 신교를 지지했던 도시와 주의 이름, 루터를 조력했던 영주와 동료들, 중요한 사건(전투/회의) 등을 오밀조밀하게 배치해 두었다. 특히 네 귀퉁이에 초기 종교개혁자 네 명의 동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영국의 성경 번역자 요하네스 위클리프와 화형 당한 체코의 요하네스 후스, 그리고 사보나롤라, 페트뤼스 발데스가 그 인물들이다.
종교개혁 과정을 기록하기 위해 후대 사람들이 만든 이 기념비는 그 자체로 훌륭한 교육교재가 된다. 유럽이 무언가를 기념하는 방식은 참 교육적이다. 동상이든 상징물이든 그것 하나만 공부해도 전체를 어느 정도 꿸 수 있도록 해준다. 연역과 귀납의 조화로움이랄까.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의 박물관, 기념관의 수준은 많이 아쉽다. 언젠가는 유럽에서 경험한 수준의 정보 체계를 갖춘 박물관이나 기념관이 한국에도 만들어지기를 꿈꾼다.
이 기념비에 표현된 모든 종교개혁자를 다 알 필요는 없겠지만, 앞의 글에서 소개했던 요하네스 후스, 위클리프, 멜랑히톤 같은 분들의 이름 정도는 확인하고, 구별해서 기념사진도 찍어보자.
이어서 루터가 종교재판을 받았던 자리로 이동하자. 가까운 곳에 있으니 걸어갈 수 있다. 아래 제시한 지도를 참고하자. 각각의 장소는 천천히 걸어도 5분 정도면 이동할 수 있다.
비텐베르크에서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했던 루터는 그 후 어떻게 지냈을까? 루터는 놀고 있지 않았다. 95개조 반박문은 좀 더 정확히는 “95줄로 요약한 논제”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부터 이 주제에 대해 토론해보자!라는 일종의 제안서와 같은 것이다. 이제 루터는 더욱 분명한 입장의 교회개혁과 관련된 글을 잇달아 발표한다. 그의 주장에 동조하고 그의 용기에 감동한 사람들이 루터의 편에 속속 서기 시작했다. 교황청은 결국 루터를 파문하고 루터의 책을 불태웠으며, 루터는 루터대로 교황의 파문교서를 불태웠다.
이제 루터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그야말로 인생 꼬였다. 모두가 루터는 이제 죽은 목숨이라고 말했다. 그때 그 시절, 교황청과 직접 대립한 시골 교수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예상되는 수순이었다. 결국 제국의 황제가 루터를 호출한다. 바로 이곳 보름스 의회로 말이다.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
황제는 신변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루터의 친구들은 다들 루터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또다시 기적이 일어난다. 루터가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 보름스까지 가는 동안, 수많은 지지자들이 그에게 격려를 보냈고, 도착지 보름스에는 2천 명이나 되는 환영 인파가 모여 있었다. 용기를 얻은 루터는 그 두려웠던 보름스 의회에서 자신의 주장을 끝내 지킬 수 있다.
“저는 성경에 굴복하며, 제 양심은 말씀 안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그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양심에 반하는 행동은 안전하지도 건전하지도 않기 때문에, 저도 어쩔 수 없다. 제가 여기 서 있나이다.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아멘! (루터의 최종 변론, 마지막 부분)”
이 이야기는 워낙 유명해서 대부분 상식으로 알고 있을 것이니 여기서 자세히 적지는 않겠다.
보름스 의회가 열렸던 건물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현장은 보름스의 관광 사업(?)에 의해 보존되었고, 사유지에 속한 땅이지만 평일 낮에는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루터가 회의장에서 고백했던 '내가 여기 섰나이다'라는 명언이 적혔다는 표지판이 바닥에 두드러지게 위치해 있었다. 안내 표지판에는 ‘여기 황제와 제국 앞에 서다’ 정도로 해석될 문구가 적혀있다. 제국의 황제 앞에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밝혔던 루터의 흔적이다.
인터넷에서 최근에 찍힌 이곳 사진을 검색해보니, 저 바닥에 루터의 신발을 청동으로 만들어서 설치해 둔 것이 보인다. 수백 년 된 유물처럼 생겼지만, 필자가 갔던 2017년 3월까지만 해도 없던 것이다. 보름스 시의 관광지 정비 작업이, 귀엽다.
다시 앞의 지도를 참고해서 근처의 다음 지점으로 이동하자. 이곳은 평범해 보이는 작은 교회당인데, 루터가 보름스 회의장에서 고초를 겪는 동안, 루터의 지지자들이 모여서 루터를 살려달라고 기도한 곳이라는 이야기가 담긴 장소이다. 서슬 퍼렇던 그 시절에, 회의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직선거리로 300미터 정도)에 위치한 것을 보니 이 사람들도 상당히 담대한 마음으로 모였던 모양이다. (주의: 필자의 능력이 딸려서 고증이 정확한지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수백수천의 지지자들이 며칠씩 계속되었던 보름스 회의 기간 동안 루터를 위해 모여서 기도했다는 이야기는 정설이고, 근처의 교회당에 모였을 것이라는 추론은 충분히 합당하다.)
2017년에 한국 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서 관련 행사를 하느라 아주 바빴다. 필자도 종교개혁사 책을 하나 쓴 죄(?)로 여기저기 강사로 불려 다니며 정신이 없었다. 1주일에 2~3번씩 전국을 다녔으니 오죽 바빴을까. 그리고 2018년이 되자, 그 난리 났던 분위기는 안개처럼 싹 사라져버렸다. 필자도 깊은 허탈감 속에서 한참 괴로웠다. 그 수많은 행사로 한국 교회가 좀 나아졌을까? 하라는 종교개혁은 안 하고 종교개혁 기념행사만 한 셈이다.
지금은 또다시 한 해가 더 지나 2019년이 되었다. 루터의 시절에는 어떠했을까. 95개조 반박문을 붙이고 2년 뒤에 루터는, 그리고 루터의 글을 읽었던 신자들은 무엇을 했을까. 루터는 부지런히 책을 썼고, 신자들은 부지런히 그 책을 읽고 주위에 전파했다. 거대한 제국과 황제와 귀족들과 로마 교황청이 떨었을 정도로 말이다. 지금 한국 교회는 종교개혁을 기념‘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다. 진정 개혁할 것이 무엇인지 겸허히 바라보고 실제로 하나씩 개혁하는 절차를 밟아야 할 때이다. 우리가 숨을 쉬고 살면서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자동적으로 종교개혁의 후손이 되는 게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우리 몫의 개혁은 오롯이 우리 앞에 남아있고, 그것은 - 다른 누가 아닌 - 바로 나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
황희상 (“특강 종교개혁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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