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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타난 남․여의 문제

열려라 에바다 2020. 12. 26. 11:28

 성경에 나타난 남․여의 문제

 

신약성경 전체에서 남녀의 차별을 주장한 사상은 없습니다.  그 기능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위치와 사역에 대하여는 오랫동안 신학자들과 성도들 중에서 의견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몇 가지 전제를 제시하고 성경적 문화적 이해를 해보려고 합니다.

 

I. 전제(Presuppositions)

 

1)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표준입니다.  성경의 핵심인 십자가 복음은 우리 신앙의 의미이며 모든 교리와 윤리의 가늠 대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빛속에서 남녀의 문제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남녀의 문제는 신론(고전 11:3)과 교회론(엡5:23)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론과 구원론을 통해 문제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우리는 문화의 영향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언어를 현대인들이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난해한 일입니다.  문화적 차이로 인해 잘못 이해된 성경의 언어를 바로 찾는 것이 문제를 풀어 가는데 또한 도움을 줄 것입니다.

 

 

II.  성경역사에 나타난 남녀의 이해

 

1) 창조 

 

창1:26과 5:26에 의하면 남녀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것이라 합니다.  아담으로부터 하와가 나온 것이지만 여전히 그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피조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남녀는 다양성과 일치성을 갖고 세상에서 살게 됩니다.  인간은 영성을 가진 영적인 존재로 지식과 느낌과 의지를 가진 인격 인으로 그리고 자유와 책임을 갖는 도덕적 존재인 점에서 남녀는 같습니다.  그런고로 남녀의 차별은 처음부터 성경에서는 고려된 바 없었습니다.

 

창1:28의 문화명령도 하나님께서 남녀 모두에게 주신 것이지 그 어느 한 편에만 주신 것도 아닙니다.  남녀의 역할 분담이나 구별은 찾아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2:24에서 남녀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인간타락 이전의 세대에 살고 있었다면 이런 의미에서 남녀의 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타락 이전의 상태는 남녀간의 기회균등 또는 평등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둘이 하나가 되어 서로 공유하고 나누고 피조물을 다스리는데 협력관계에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여자 없는 남자가 고독해 보였다면 그것은 여자 없이 남자만으로는 미완성품이라는 뜻입니다.  창2:18의 돕는 배필은 종속된 인격을 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돕는 자 (ezer)라는 이 단어는 성경에서 가끔 하나님 자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는 자시라는 것은 인간에게 그가 종속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시33:20).

 

2) 인간타락

 

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고 타락했습니다.  타락은 파괴와 분열을 초래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파괴되고 하나님과 분리되게 했습니다.  동시에 남녀 관계를 파괴시켰고 이간시켰습니다.  창3:16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는 자로서 그 관계가 파괴됩니다.  남자가 여자를 다스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완성시키는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된 원인은 죄요, 그 죄는 인간타락이 가져온 것입니다.

 

3)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 죄와 사망권세를 물리쳤습니다.  율법으로 더 이상 저주아래 있지 않고 우리는 믿음을 통한 은혜로 의롭다 인정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파괴된 관계가 다시 회복의 단계에 들어가게 되었고 인간간의 깨어진 관계도 새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새 관계가 인간관계도 새롭게 한 것입니다.  바울은 갈3:28에서 남자와 여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새로운 관계가 정립된 것입니다.  타락이후 남녀사이에 쌓였던 방해물이 제거된 것입니다.  타락 이후 지배하려던 것이 이제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남녀의 관계를 타락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시작하신 일이 이제 완성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남녀간의 새로운 관계는 완전한 인격체로서의 만남을 갖게 합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에게 가르치신 바처럼 부활 후에는 결혼도 없다고 하셨습니다(막12:25).  그 때는 완전히 다른 질서 속에서 살게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피조물은 아직도 고대하는 바가 있습니다(롬8:19).  ‘아직도‘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말합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뜻에서 우리는 영을 갖고 있음이 밝혀집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이나 하나님과의 교제는 아직 완전치 못합니다.  순식간에(홀연히) 완전한 것으로 변화될 것입니다(고후3:18).  남녀의 관계도 아직은 완전회복이 된 것이 아닙니다.  관계는 십자가로 인해 변한 것이 사실이나 아직 완전치는 못합니다. 

 

 

III. 교회와 여자

 

복음 안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여자가 아직도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남녀에 대한 관계가 남아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교회에서의 여자의 위치를 주제로 특별히 다루고 있습니다.  복음의 빛에 비추어 볼 때 여성은 남성과 다름없이 교회 안에서 모든 권위와 위치를 확보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 문제를 매우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자는 남성만이 아니고 여성도 있었습니다(행2:18).  그날 이후 여성도 남성과 같이 받은 성령으로 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예언하는 자(행21:9), 안수 받은 집사(롬16:1, 딤전3:11에서 여자들도 단정하고 참소치 말고 절제하며 충성하라는 것은 여집사를 두고 한 말씀) 또는 사도의 조수(빌4;3)로서 여성 가운데 초대교회를 섬긴 이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를 얻은 여성들의 활동 상을 볼 수 있습니다.  여성 안수 문제가 아직도 문제가 되고 있는 우리 교회의 상황은 성경적으로 여성이 안수 받을 수 없는 열등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이 시대가 '아직은'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상황에 있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고전11:3-16에서 사도는 교회 안에서 여성의 봉사 역할을 상론하고 있습니다.  여성도 교회 안에서 기도와 예언은 회중가운데서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v. 5)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한 것은 여성의 머리 스타일이 아닙니다.  교회의 권위라는 차원에서 남녀가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경과 권위의 싸인으로 머리에 베일을 쓰도록 한 것은 당시 사회의 풍습을 들어 말한 것이지 베일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존경과 권위의 중요성을 가르친 것입니다.  교회 봉사의 영역에서 여성의 위치가 있음을 바울은 여기서 강조한 것입니다.

 

고전14:34-35은 여성의 교회에서의 역할을 부정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 하라 저희의 말함을 허락함이 없나니“한 것은 11장의 말씀과 상반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성경을 항상 전체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고전14:33절의 연속으로 34절을 읽게되면 당시 교회 안의 대부분의 문제들이 여자들의 말로 인해 생겨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게 됩니다.  따라서 바울은 다른 교회에서도 그러했던 것처럼 고린도 교회에서도 여자들이 좀 조용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주석 가들은 34절과 35절은 바울의 기록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면서 33절에서 36절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주장과 몇 개의 사본제시도 하고 있으나 이같은 설은 교회에서 받아지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여자로 하여금 질서를 따라 정당한 발언을 하는 것을 금한 것이 아니고 불필요한 재잘거림을 금한 것이라 하나 이같은 이론도 받을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고전 11장의 기도나 예언은 개인적인 것이므로 교회 안에서 공적인 것을 금한 것(14장)과는 충돌이 없다는 해석도 있지만 지나치게 합리적인 아전 인수격 해석으로 근거 없는 이론이라 하겠습니다.  바울은 고전14:34-35에서 여성이 교회에서 사역할 수 없다고 가르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잠잠 하라‘(σιΥάτω)는 말은 고전 14장에서 3차례 나타납니다.  그중 두 번은 남자에게, 한번은 여자에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차례 모두 절대명령이 아닌 조건적임을 유의해야 합니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28절)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 지니라“(30절).  그리고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 하라(34절) 했습니다.  이것도 조건명령입니다.  교회에서 자주 말로 혼란을 일으키는 여인들에게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하고 교회에서는 잠잠하라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고전14:34-35은 특별한 시대에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던 교회에 주신 경계의 말씀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딤전2:8-14은 교회 여성의 역할을 위축시키는 또 다른 성경구절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해석만이 그같은 편견을 몰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8절에서 “남자들이 각처에서 분노와 다툼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사도가 바란 것처럼 “이와 같이“ 여자들도 기도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각처에서‘란 공적 장소를 말합니다.  남자들이 한 것처럼 여자들도 공적 장소에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여성도 (예의를 갖춘 옷을 입고) 기도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본문은 교회 내에서 여성의 사역을 부인한다는 해석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구절입니다.  오히려 여성의 사역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면 11절에서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종용히(침묵으로) 배우라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우선 여자들(Υυναικας, 9절)에서 여자 (Υυνή, 11절)로 바뀐 것은 일반적으로 여성이 기도할 수 있음을 가르치고 난후 (9절) 11절에서는 남편과의 관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결혼한 아내는 공중 앞에서 자신에게 남의 시선을 집중케 하기 보다 오히려 조용해야 하며 가르치기 보다 배워야하며 권위를 갖고 주장하기 보다 복종하는 것이 가정의 평화를 위해 좋은 자세임을 말한 것입니다.  고로 바울은 교회에서 여성이 공적 기도를 할 수 없다는 교훈을 한 것이 아닙니다.  

 

3:11과 5:13 그리고 이 서신의 전체적 분위기로 보아 (고린도교회 처럼) 교회 내에서 여자들의 말로 인해 발상된 문제가 너무 많았다는 것도 쉽게 추리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11절의 ‘종용하라‘는 말은 집회시 말하는 것을 금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시 문화적 상황에 나타난 일반적인 생활태도를 보여준 말입니다.  즉 사도는 딤전2:2에서 보여준 말씀처럼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교회가 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특히 12절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는 것은 남자의 권위가 여자의 것보다는 높다거나 크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한 ‘주관하는‘권위는 절대권위를 의미하는 것이고 절대적 힘을 갖고 다스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12절은 여성들이 자신을 절대 권위를 가진 자처럼 말도 행동도 해서는 안될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절대권위는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절대권위를 갖고 남자를 가르치려는 여성을 허락지 않았다고 사도는 말씀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성이 남성과 같이 교회 내에서 섬기위한 적절하고 필요한 권위를 갖고 이를 통해 주님을 섬기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입니다.

 

 

IV. 종속주의

 

사도 바울은 남녀의 관계를 삼위일체 교리에 직접 연결을 시켜 가르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이라면 남녀관계가 종속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쉽게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고전 11장)  “여자의 머리는 남자“(v3)라고 했을 때 바울은 무엇을 의미한 것일까요?  우리가 성경적 용어를 현대인의 말로 직접 바꿀 때 생기는 어려움을 종종 경험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머리‘라는 히브리적 또는 헬라적 의미를 먼저 찾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머리‘라면 몸의 상체부분 또는 명령할 수 있는 위치를 연상합니다.  그래서 우두머리란 항상 통치자, 대표자 또는 무슨 장(長)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에게는 머리(두뇌) 개념이 없습니다.  사실 그런 단어조차 없습니다.  그들에겐 인격의 중심부는 머리(두뇌)가 아니고 가슴(또는 배)입니다.  우리의 지력은 두뇌에 있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만일 여자의 우두머리(통치자)가 남자임을 말하려 했다면 ‘가슴‘ 또는 주라는 말을 오히려 섰어야 합니다.  그런고로 여기서 ‘머리‘란 다스리는 자(boss)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로쉬(rōsh 히) 또는 케프할레(kephalē 헬)는 복잡한 배경을 가진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머리(head)란 시작 또는 기원(archē) 이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전 11장 8절에서 바울은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고 합니다.  이때 이 기원의 의미가 분명해 집니다.  창2:10에서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라고 번역된 것은 강의 머리(rōsh)로 표현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는 여자의 시작이 남자로 부터였음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면 ‘여자가 남자의 영광‘(v7)이라 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영광의 개념을 머리와 연결을 시키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머리는 축복의 장소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빌 때 머리 위에 임할 것을 기원했습니다(시 23:5).  이처럼 육신적 머리는 축복과 영광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고전 11:3 (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머리요

              ( 그리스도는 남자의 머리요

              ( 남자는 여자의 머리다.

 

고전 11: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요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

 

바울은 7절에서 여자가 “남자의 형상“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있음을 유의해 봅시다.  여자도 남자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직접 따라 피조된 존재입니다.  여기서 왜 여인들로 하여금 예배시 머리에 베일을 쓰라고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고전11:6).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반영하므로 예배시 이를 가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남자의 영광을 예배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시 머리를 가리게 했습니다.  근본적인 것은 머리카락이나 모자로 가리라는 것이 아니고 예배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지만 그렇다고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차등 신이 될 수 없듯이 여기서 남자가 여자의 머리가 되고, 여자가 남자의 영광이 된다는 것은 종속주의가 아닌 남녀사이의 신비로운 연합과 조화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머리' 개념은 교회론과 창조론 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창조의 머리라는 뜻은 그가 창조의 기원(archē)이라는 것이며 또한 창조의 목적(엡1:10)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심은 천상의 지도자나 관리자라는 의미가 아니고 (물론 그리스도는 교회의 지도자이시지만) 이 교리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그가 죽으심으로 교회의 기원이 되셨고 그가 승천하심으로 교회의 영광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영광을 지상 교회는 나타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엡4:15에서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영광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고전 11:11의 말씀을 통해 남녀 관계는 상호 의존관계에 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두 성이 서로 독립되어 있지 않고 또 자매관계에 있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남녀의 결혼관계를 설명하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엡5:21f, 벧전2:13ff) ‘순종‘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엡6:1 hupakouō) 하는 것과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엡5:22 hupotassō) 하는 것은 구분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복종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순종은 상대편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 없이 다른 이의 의지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가 12살 때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눅2:51)한 것은 예수가 그들보다 낮은 위상에 있음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남자에게 여자가 순종하라는 것은 남성 우월감의 근거로 잘못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여성의 재산권, 고용권, 등의 권리를 포기케 하는 방편으로 성경이 오용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도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hupotassō(순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서로 실천되어야 할 덕목입니다.  더 강한 신자는 덜 강한 신자를 비난하거나 멸시치 말고 남편과 아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순종을 하라는 것입니다.

 

엡5:22, 24에서 바울은 아내가 남편에게 해야할 도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자기 남편을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여기에는 hupotassō가 없습니다).  여기서 가르친 것은 여자가 남자를 주로 모시라는 것이 아니고 6:7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께 대하듯“ 단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결혼을 통해 남편을 주로 섬겨 그를 기쁘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섬기고 기쁘시게 하는 가정을 이루기 위해 남편에게 주님 대하듯 자원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여자도 남자처럼 오직 한 분의 주만 섬깁니다.  따라서 같은 주를 섬기는 백성으로 피차 사랑의 복종을 해야 합니다(엡5:21).  

 

사도는 엡5:28-33에서 타락 이전의 남녀 관계에로 돌아가라는 말씀으로 가정생활의 규범을 가르칩니다.  자기를 복종시키고, 지기를 비워야 연합을 이루게 됨으로 서로 사랑하면 복종케 됩니다.  고로 순종은 일방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아내를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이므로 귀히 여기라고 합니다(벧전3:7).  생명의 은혜가 남성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으로부터 함께 은혜를 받게 될 것이므로 피차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V. 양성의 연합 

      

고전7:1-7에서 바울은 남편이 아내에게 명령할 권한이 없고 아내는 성적 차별로 남편의 지배하에 있어서도 안됨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서로 자기 몸을 주장하지 말라고 합니다.  남녀간의 관계는 이처럼 평등의 관계(Equality)에서 설명되지만 그렇다고 남녀가 같은 것은 아닙니다(not same).

 

남녀는 하나님의 동일한 피조물로서 서로 연합하고 의존적이어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케 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성 사이에는 누가 누구를 다스리느냐는 긴장 관계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므로 오히려 자기를 버리는 순종이 피차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남자와 여자는 함께 일해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 공예배시 여성이 기도하는 것과 말씀 증거 하는 것을 금지한 성경적 근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여성을 사도들의 말씀으로 단장하고(딤전2:9), 예언을 하기도 했습니다(행2:17).  그리고 아볼로를 청하여 사적으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행 18:26).  공적으로 가르치고 치리 하는 것은 남여를 불문하고 목사와 장로 그리고 교사에게 주신 사역이지(엡4:1) 어떤 특정한 성(性)에게만 주신 것은 아닙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롬16:1), 여기에서 가리킨 διάκονος 는 바울과 아볼로에게 적용시킨 “사역자“와 같은 말씀입니다.(고전 3:5).  그리고  διάκονος는 교회의 남자 직분 자들에게 붙여진 집사라는 뜻입니다(딤전 3:10, 12, 13).  뵈뵈가 교회 직분을 바로 수행한 자라면 뵈뵈집사라고 용감하게 읽어야할 것입니다.  여자집사(deaconess)라고 부득이 해야 된다면 우리는 교사도 여교사(teacherness 또는 doctress)라고 불리운 성경구절도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뵈뵈를 사도 바울은 자기 동역자(보호자)라고 불렀습니다.

 

사도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자기 동역자라고 했습니다(롬16:3).  중요한 것은 여자의 이름이 남자보다 앞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행18:18, 딤후4:19).  당시 유명한 설교자 아볼로에게 신학적 오류를 지적해 주고 성령을 가르친 자가 브리스길라 곧 여성이었으며 그 가르침을 주도적으로 행한 이가 아굴라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여성이 잠잠해야 하는 것이 주님의 ‘절대 명령이라면 브리스길라는 이같은 사역을 해서는 안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의 이름이 먼저 나왔다는 것은 큰 실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브리스길라를 선생들의 선생으로 만드시고 그 직분을 감당케 하셨습니다.

 

로마서 16장에는 뵈뵈와 브리스길라 이외에 또 다른 여성 지도자가 있습니다.  “주안에서 수고한 드루베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v12).  그리고 사도는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도우라“(빌4:3)고 권면합니다.  “복음에 수고했다“는 말속에는 설교한다는 말은 예외라고 해석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주안에서 수고한“이라는 말에는 공적으로 전도하고 기도하는 일은 배제되었다고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고로 여자는 조용히 (ήσυχία) 배우라는 말은 여성의 교회에서의 사역을 제한시키거나 남자와 차별을 하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사도는 남자에게도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살후 3:12)고 했습니다.  그것은 일할 때와 먹을 때 입을 다물거나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는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도 문안하며 그들은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갇혔던 자라고 합니다(롬16:7).  유니아는 여성입니다.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았던 자입니다.  초대교회 처럼 지금도 수많은 여인들이 소식을 전할 수 있음을 배워야 합니다(시68:11).

 

성령은 말씀과 교회 안에서 역사 하십니다.  중생한 성도와 희생하는 신자를 통해 나타나십니다.  따라서 말씀을 떠나 교회의 명령만 듣는 것은 때로는 안전하지 못할 경우가 있습니다.  반면에 성경말씀의 의미를 바로 체현하는 교회의 깊은 영적 삶이 무시되어서도 안됩니다.  교회에서 여성의 기도와 말씀봉사가 더 이상 감춰지거나 무력화되어서는 안됩니다.  21세기를 향한 선교여성의 힘이 교회 안에서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전근대적인 성차별로 성령을 소멸치 말고 말씀을 전하는 일을 멸시치 말아야 합니다(살전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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