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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는데… 설악산 만추 트레킹

열려라 에바다 2011. 11. 1. 20:58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는데… 설악산 만추 트레킹

설악산을 둘러본 고려의 문신 안축은 ‘금강산은 수려하나 웅장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웅장하나 수려하지 못하지만 설악산은 수려하고 웅장하다(金剛秀而不雄 智異雄而不秀 雪嶽秀而雄)’는 시 한 수를 남겼다고 한다.

수려하고 웅장한 설악산을 종주하는 코스는 여러 개가 있다. 그중 한계령에서 서북능선을 타고 대청봉을 거쳐 천불동계곡으로 하산하는 20㎞ 코스는 내설악과 외설악의 자태를 한눈에 굽어보는 것은 물론 능선에서 내려다보는 계곡의 수려함과 계곡에서 올려다보는 능선의 웅장함이 어우러져 선경을 연출한다.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한계령은 양희은의 노래 ‘한계령’으로 인해 더욱 친숙하게 느껴지는 백두대간 고개다.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과 양양군 서면을 잇는 해발 1004m의 한계령은 설악산국립공원을 관통하는 고갯길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강원도의 이름난 여섯 고개 중 한계령을 으뜸으로 꼽았다. 남설악의 중심지로 고개가 높은 만큼 계곡도 깊고 산세가 수려하기 때문이다.

한계령휴게소 뒤편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 설악루에 오르자 화려했던 가을의 기억을 간직한 단풍잎들이 산행로에 쌓여 융단처럼 폭신폭신하다. 발끝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 밝는 소리와 함께 오르막과 내리막을 몇 차례 반복하자 서북능선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깎아지른 듯 급경사의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서북능선은 초가을에 만추의 풍경을 담은 걸개그림을 연상하게 한다.

한계령에서 서북릉삼거리를 거쳐 끝청과 대청봉에 이르는 코스는 백두대간 능선으로 8.6㎞. 서쪽의 귀때기청봉과 동쪽의 대청봉을 잇는 능선 안쪽으로 용아장성의 뾰족뾰족한 바위봉우리들이 저마다 웅장한 모습을 자랑한다. 주목나무 고사목들이 이국적인 풍경을 그리고 천길만길 낭떠러지 아래로는 오색물감을 풀어놓은 듯 아직 떨어지지 않은 단풍잎이 드문드문 보인다.

“하늘과 땅 사이를 채운 것이 모두 산이다. 고니가 나는 듯하고 칼이 서 있는 듯하고 연꽃이 핀 듯한 것은 모두가 봉우리요, 오지그릇 같고 동이나 항아리 같은 것은 모두가 골짜기이다. 산은 모두 바위이고 흙이 없으며, 짙푸른 색은 마치 쇠를 쌓아놓은 듯한 빛깔이다.”

정약용의 친척으로 조선 후기에 양양부사를 지낸 정범조(1723∼1801)가 쓴 ‘설악산 유람기’만큼 설악산을 잘 묘사한 글도 드물다. 산야인(山野人)으로 불렸던 그는 57세 되던 1779년 봄에 신흥사를 거쳐 설악산에 올랐다. 그리고 소나무와 주목으로 이루어진 수해(樹海)를 뚫고 섬처럼 불쑥불쑥 솟은 기이한 봉우리가 마치 눈처럼 맑고 밝다고 기록했다.

대청봉(1708m)과 중청봉(1676m) 사이에 위치한 중청대피소에서 맞는 설악산의 밤은 벌써 초겨울이다. 살을 에는 듯한 거센 바람이 구름을 걷어내자 속초를 비롯한 도시의 불빛들이 검의 바다의 어화와 검은 하늘의 별빛처럼 아련하다. 하늘과 능선의 경계선마저 모호한 설악산에 달빛만이 괴괴할 뿐 들려오는 것은 바람 소리 뿐이다.



가는 가을이 서러워 밤새 울부짖던 대청봉이 지쳐 잠이 들 무렵 멀리 동해바다에서는 단풍잎보다 붉은 여명의 띠가 드리워진다. 이른 새벽 오색에서 출발한 산행객들의 헤드랜턴이 반딧불처럼 가느다란 빛을 밝힌 채 줄지어 대청봉을 오르고, 어둠 속에 침잠했던 설악산 능선들은 옅은 산안개 속에서 한 폭의 수묵담채화를 그린다.

백두대간 능선은 중청봉의 허리를 에둘러 소청봉(1550m)에서 희운각대피소까지 줄곧 가파른 내리막길을 걷는다. 여인의 피부처럼 하얀 자작나무는 나신이 부끄러운 듯 마지막 잎새로 몸을 가리고,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산다는 주목나무 고사목은 화석처럼 굳어 설화를 꽃피울 날을 기다린다.

희운각대피소에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온다. 히말라야 원정을 앞둔 1969년 2월 인근 ‘죽음의 계곡’에서 등반훈련을 하던 산악인 10명이 눈사태로 전원 사망하는 비운을 맞는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희운 최태묵 선생이 사재를 털어 ‘죽음의 계곡’ 입구에 대피소를 만들었다.

대피소 아래의 무너미고개는 공룡능선과 천불동계곡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공룡능선은 외설악과 내설악을 남북으로 가르는 설악산의 대표적 능선으로 공룡이 뛰어오르는 것처럼 힘차고 장쾌하게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무색할 정도로 암벽미가 뛰어난데다 공룡능선에서 굽어보는 내설악과 외설악의 사계절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무너미고개에서 설악동 소공원까지 이어지는 천불동계곡은 계곡 양쪽의 기암절벽이 천개의 불상이 늘어서 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웅장한 기암절벽과 톱날 같은 침봉들 사이로 깊게 패인 협곡 사이로 크고 작은 폭포와 에메랄드빛 소(沼)가 연이어진다. 산행로도 미끌미끌한 돌계단에서 평탄하고 아늑한 숲길로 바뀌어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천불동계곡의 최상류 폭포는 천당폭포. 협곡을 흐르던 벽계수가 흰 무지개로 변해 형형색색의 단풍잎이 떠있는 푸른 소로 쏟아져 내린다. 공룡능선과 화채능선의 골짜기로부터 흘러내린 벽계수는 점점 수량을 더해 양폭포, 음폭포, 오련폭포로 이어지고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전해옴직한 이호담과 문수담 등 푸른 소는 단풍나무와 어우러져 천상의 풍경을 그린다.

설악산은 비 내린 후 산안개가 피어오를 때 가장 신비롭다. 죽순처럼 솟아오른 기암봉우리를 감싸 안은 산안개가 혹은 좌에서 우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모습은 선인들이 화폭에 담았던 바로 그 풍경이다.

천불동계곡 아래까지 하산한 오색단풍 위로 우뚝 솟은 귀면암과 비선대를 배경으로 천변만화하는 산안개의 조화에 설악산의 만추가 열두 폭 병풍으로 거듭난다.

속초=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