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시34:9-11]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열려라 에바다 2022. 6. 28. 08:13

34편 9절-11절: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찌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9절: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면 영원히 손해가 없고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것은 만족이라 그 말이다. 부족성을 생각해 보면, 첫 번째는 하나님을 모르는 면에서 부족성이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면에서 부족성. 우리 모두 하나님을 너무나 모르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깨달음에 너무나도 모르고 있다. 이 면에 대한 부족성을 느껴봤느냐? 두 번째는 물질 소유적인 면에서 부족성이 있다. ‘나는 너무 가난하구나. 우리 집에는 아무 것도 없구나’ 하는 물질 면의 부족성.

 

우리 인간들은 무엇이든지 부족하면 그것을 메우고자 하는 욕구성이 있다. 그런데 아무리 힘쓰고 애쓰고 공을 들여도 그 부족함이 메워지지 않는 게 있고, 노력하고 힘을 쓸수록 메워지는 게 있다. 물질은 가졌다고 해도 날아가고, 죽을 때는 결국은 다 내버리고 간다. 물질 소유성은 만족이 없다. 사람의 참 만족은 정신면에서 되는 거다. 인간이 지어지기를 이렇게 지어졌다. 하나님을 만날수록, 하나님의 것을 많이 가질수록 자기 속에는 기쁨이 자꾸 솟아난다. 만족하다 그 말이다.

 

인간의 참 만족은 정신면에서 되는 거다. 이 정신면의 만족은 하나님의 것으로 메워지는 거다. 세상 것은 ‘이면의 부족성을 메우니 이면이 부족하구나’ 하게 된다. 세상부자가 그 많은 돈을 가지고도 왜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는 거냐? 만족이 없다는 증거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허전해진다. 그러니 우리는 헛 고생을 하면 안 된다. 헛 살면 안 된다. 헛 믿으면 안 된다. 헛 알면 안 된다. 세상에는 진짜 똑똑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헛 똑똑한 사람도 있다. 곡식도 알곡이 있는가 하면 쭉정이도 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 앞에 헛 똑똑이인가, 참 똑똑이인가?

 

영적인 면에서의 부족성과 육적인 면에서의 부족성이 있는데, 자기는 어느 면의 부족성을 자기의 참 부족성으로 여기느냐? 본문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것을 보니 이 부족성을 채우면 만족하게 받을 수 있고, 가질 수 있고, 빼앗기지 않는다는 거다.

 

주님을 알수록 무거워진다고 했느냐, 가벼워진다고 했느냐? 가벼워진다. 가볍다는 게 무슨 말이냐? 알수록 그만큼 기쁘다 그 말이다. 무거워지면 신경질이 나고 머리가 아프다. 명확하게 알수록 가벼워진다. 알수록 기뻐진다. 세상 사람들도 알수록 기뻐진다. 모르면 엄청나게 힘이 드는 거고 스트레스가 되는 거다.

 

빼앗기고 불타고 없어지는 것은 만족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은 고민거리요 근심 걱정거리다. 불타지고 날아갈 것은 붙잡으려다 못 붙잡고, 붙잡았다고 해도 빼앗기고, 가졌다 해도 죽을 때 다 버리고 간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너희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라고 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구해서 얻게 되면 만족하게 되고 기뻐지는 거다.

 

세상 사람들이 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데 다 부자가 되더냐? 간혹 부자가 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가난하더라. 또 부자라고 해도 그것을 평생 가지고 있더냐? 그렇지도 않더라. 훔쳐가기도 하고 뺏어가기도 한다. 그래서 세상물질은 가지면 가질수록 골치가 아픈 거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것, 하늘나라의 신령한 것, 영에 속한 것, 영원한 것,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을 구해야 한다.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라’는 말이다. ‘의’란 ‘옳음’이라는 뜻인데,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서 옳은 게 뭐냐? ‘옳다. 그르다’ 할 때 지식 면에서도 ‘옳다. 그르다’, 지혜 면에서도 ‘옳다. 그르다’, 선 면에서도 ‘옳다. 그르다’, 사랑 면에서도 ‘옳다. 그르다’, 거룩 면에서도 ‘옳다. 그르다’, 진실 면에서도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이 있으니, 이런 하나님의 옳은 것을 모두 가져라 그 말이다. 하나님의 것으로 다 가져라 그 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를 가지라고 하는 거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를 찾아야지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세상의 의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찾는 거지 이방의 의를 찾는 게 아니다. 세상 인간의 의를 찾을 것 같으면 ‘이게 옳은 것 같다’ 할 때 민주주의 식으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어서 많은 사람이 택하는 것을 따르면 된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적인 것을 말한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니다’ 라고 해도 하나님이 ‘맞다’ 하면 하나님의 것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세상적으로 믿는 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을 취하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것을 구하라. 영에 속한 신령한 것을 구하라. 네 인격의 주격적인 것을 구하라. 그러면 채워주겠다 그 말이다. 깨달음으로 채워주겠고, 옳은 것으로 채워주겠고, 선한 것으로 채워주겠고, 사랑으로 채워주겠다. 이렇게 되면 예수 믿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지는 거다. 이게 하늘나라의 의다. 하나님의 옳은 것으로 채워놓으니 그 사람 안에 누가 왕이 돼 있는 거냐? 진리가 왕이고, 하나님이 왕이고, 주님이 왕이고, 성령님께서 왕이다.

 

자기가 인격적으로 주님과 결합이 되어있으면 ‘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이 상태가 된다. 이렇게 되면 내가 움직이는 것이 주님이 움직이는 거고, 주님이 움직이는 것이 내가 움직이는 거다. 내가 주님의 말씀화 인격화로 됐기 때문에 주님과 같이 움직이는 거다. 이것이 신학교에서 말하는 ‘성령님과 유기적 결합적 운동’이다. 이게 성령의 사람이다. 말씀으로 인격화 된 것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주님의 영을 가진 사람이고 성령의 사람이다. 성령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가치판단 평가가 명확한 거지 펄펄 뛰고 야단법석을 하는 게 아니다. 기독교는 그런 게 아니다.

 

세상 우주만물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이룰구원을 위해서 만들었다. 쉽게 말하면 세상이라고 하는 에덴동산을 만들어서 누구에게 주었느냐? ‘네가 다스려 봐라’ 하고 아담 하와에게 주었다. 사람에게 줬다. 아담과 하와가 이 명령을 따라 말씀을 붙잡고 다스려 나가면 여기에는 지혜가 나오고 이치가 나와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바로 될 텐데 그러지를 못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렸다. 말씀에 순종하지를 않고 불순종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이렇게 되면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의 인격이 이뤄지지를 않는다. 이러면 이해타산 평가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 하나님과는 이질적으로 가지게 된다.

 

시편에 보면 수고를 하는데도 넘어진다. 엎드러져 버린다고 했다. 왜 그럴까? 수고를 많이 할수록 알아주고 칭찬이 들어가는 법인데 수고를 열심히 하는데도 사람이 넘어진다고 하니 왜 그런 걸까? 넘어질 수밖에 없는 곳에서 수고를 하고, 채워지지 않는 곳에서 수고를 하고,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이 닮아지지 않는 곳에서 수고를 하고 있으니 사람이 인격 면에서 넘어지는 거다. 사람이 미련퉁이가 되는 거다. 학생이 학교에서 장난만 치고 선생님의 말씀을 안 들으면 미련퉁이가 되는 거다. 이치는 빤한 거다.

 

우리들에게 귀는 왜 주었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준 거다. 지혜로운 말씀, 이치적인 말씀을 들으라고 준 거다. 쓸데없는 소리를 들으면 들은 그것이 그 사람의 인격이 되어서 더러운 것이 나오게 된다. 귀가 더러워진다. 말세의 교인들은 귀가 간지러워서 귀신의 말을 듣는다고 했다.

 

성경에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라고 했는데, 없는 건 뭐고 있는 건 뭐냐? 뭐가 없으면 자기에게 있다고 하는 그 무엇까지 빼앗기게 되는 거냐? 이룰구원이 없이, 성장되는 것이 없이 세상 것에 욕심을 부리게 되면 이 사람은 결국은 있는 것마저도 빼앗기게 된다. 사람이 이렇게 산다면 세상에 살다 가는 가치가 어디 있느냐?

 

자기 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의 사상으로 깨닫는 말씀이 없으면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된다. 자기의 삶 전부가 사망으로 흘러가게 된다. 생명적으로 살아나는 게 없다. 안 믿는 사람들이야 하나님을 모르니까 이걸 몰라도 되겠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성경을 가지고 있고,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때문에 옳은 진리이치, 생명이치, 신적 도덕이치를 바로 듣고 영적인 면에 성장성을 가져야 한다. 깨닫는 게 있어야 한다. 수 년 수십 년을 교회에 다니면서 이게 없다면 너는 헛 똑똑이다. 너는 헛 집사다. 너는 헛 장로다. 너는 잘못 믿었다. 너는 다시 믿어야 되겠다. 사람이 바로 되어야 하겠다.

 

자기에게 있어서 세상은 한 번밖에 없다. 한 번밖에 없는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원없이 한없이 이뤄가야 한다. 사람에게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 시대적인 심판, 사상적인 심판이 있다. 이 심판의 바람이 불 때 안 날아가도록 하라. 심판의 바람이 불면 날아가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자기가 어떤 면에 대한 부족성을 염두에 두고 채워달라고 하느냐?

 

예수님을 믿는 사람치고 기도를 안 하는 사람이 있겠느냐? 그런데 무슨 기도를 하느냐? 세상살이에 부족함이 없이 다 채워달라는 기도를 했느냐? 그러면 그런 기도를 해서 얼마나 채워졌느냐? 그런 기도를 할 바에야 폭넓게 세계적으로 제일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하라. 그러면 그런 기도를 한다고 해서 다 부자로 사는 거냐? 그러니 그 믿음이 얼마나 저질이냐?

 

무엇을 염두에 두고 어떤 면에 부족성을 채워달라고 기도를 했느냐? 그리고 구한 그것이 영원히 만족하도록 채워졌느냐, 아니면 아직도 그것 때문에 계속 고민을 하고 있느냐, 아니면 메워지지 못할 것에 힘쓰고 애쓰며 헛 시간 낭비를 하고 있지는 않느냐? 목적적으로 그렇다 그 말이다. 오늘날 자기의 현재의 신앙상태가 어떤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부족함이 없다고 했는데 왜 이리 부족한가? 무엇이 잘못됐는가? 어떤 면이 잘못됐는가? 영적 이스라엘인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인 자기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못 알고 있으면 받을 것도 못 받고 빼빼 말라서 하나님의 것이 없는 가난뱅이로 세상을 살다 가게 된다.

 

10절: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찌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자는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다. 얼마나 좋은 말씀인지? 과연 성경말씀대로 자기가 좀 얻고 가야 할 것이 아니냐?

 

젊은 사자는 힘이 있고 용감하고 날 세서 푸른 초원의 모든 짐승들이 다 자기 밥인데 왜 궁핍하고 주릴까? 사자가 병이 들어서 그런가? 아무리 젊고 힘이 강한 사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으로 사는 존재밖에 안 된다. 그러면 일반 자연은총을 사자만 받느냐? 세상의 모든 짐승들도 다 일반은총을 받고 산다. 나무도 일반은총을 받고 살고, 우리 인간들도 일반은총을 받고 산다.

 

우로지택의 덕으로 곡식이 잘 되어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은 일반은총이다. 특수가 아닌 일반은총이다. 예수 믿는 우리도 이 일반은총을 받고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일반은총을 받고 있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이 일반은총을 받으며 살 수 있는 것은 이 땅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사람의 이룰구원을 위해서 일반은총을 내려주고 있는 것인데 안 믿는 사람들도 같은 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들도 일반은총을 같이 받게 되는 거다. 그러니 예수 믿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잘못 살면 어찌 되겠느냐?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하고 고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반 자연은총을 거둬버리면 산천초목의 생물들이 고통을 겪고 죽게 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바로 못 살면 바로 못 믿는 사람들로 인해서 만물이 고통을 겪거나 죽게 된다.

 

젊은 사자가 아무리 힘이 있고 용맹해도 하나님의 일반 자연은총으로 사는 존재밖에 안 된다. 이것마저 없으면 죽는 거다. 비가 안 오면 땅이 갈라지면서 사자들이 물을 못 먹으니까 굶어 죽게 되고, 이러면 독수리들이 날아와서 뜯어먹는다. 아무리 젊고 힘이 센 사자라도 하나님께서 일반은총을 줘야 사는 거다.

 

일반 자연은총은 하나님의 특수은총을 받는 사람을 위해서 주시는 건데, 이로 인해 안 믿는 사람들과 만물이 혜택을 보는 거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이 주님으로 통해서 하나님의 것을 받는 특수은총이 있는데, 말씀이 깨달아져서 자기 속이 하나님의 생각과 똑같이 되어 들어가는 것이 특수은총을 받은 사람이다. 성령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위해서 일반은총도 주신다. 마지막 날에 특수은총을 받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변화 부활시켜서 하늘나라로 데리고 올라가면 이 세상은 일반 자연은총도 멈춰진다. 그러면 죽는 것밖에 없는 거다.

 

오늘날 세상 식으로 믿는 속화된 기독교인이나,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안 믿는 사람들과 같은 소원 목적을 가지고 사는 자유주의 신앙자들이 특수은총은 받지 못한 채 일반 자연은총에 속한 면을 가지고 젊은 사자처럼 얼마나 기세등등하게 날뛰고 있느냐? 교인들을 세상적으로 가르치며 돈 많고 물질이 풍부한 교회들이 얼마나 기세가 등등하냐? 얼마나 날뛰느냐? 특수은총은 받지 못하고 일반은총만으로 사는 안 믿는 자들이 얼마나 기세가 등등하냐? 이런 건 다 특수한 은총을 받는 자들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 존재케 하는 거다.

 

성경에 보니까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고 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고 했다. 쉽게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특수은총을 받는 거다. 예수님으로 통해서 특수은총을 받는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것을 받는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도덕성을 가지고,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옳은 진리이치를 가지고 깨닫는 것을 받는다. 이렇게 받아지는 자에게는 모든 자연은총이 주어진다. 그러니 문제는 뭐냐? 여호와 하나님을 찾되 바로 찾아야 한다. 돌려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잘못 찾으면 신앙사기 다 당하는 거다.

 

우리는 교훈의 이치를 가지고 자기 교회 목사를 알아야 한다. 세상에 속한 목사는 어디에 속한 말을 하느냐? 세상에 속한 말을 한다. 하늘에 속한 목사는 하늘의 이치를 말한다. 이치는 빤한 거다.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교훈을 받고 잘못 믿으면 열심히 충성봉사를 하고도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는 못 깨닫고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 놓여진다. 충성봉사를 하고도 ‘난 너를 모르겠다’ 하는 취급을 받게 된다.

 

이런 게 성경에 구구절절이 다 있는데도 갈수록 거짓된 교회와 인도자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서 보면 교인들이 성경을 안 읽는다고 보는 거다. 읽는데? 읽는다면 읽고 나서 성경을 어느 쪽으로 풀이를 하는 거냐? 세상 쪽으로 풀이를 한다. 그러니까 성경을 보고 하나님의 뜻은 말을 안 하고 세상만 자꾸 말하는 거다. 성경을 깨닫고 하나님을 만났다면 하늘의 소리가 나오는 것인데 왜 땅의 소리가 나오느냐 그 말이다.

 

산에서 비를 만나서 이 비를 피하려고 들어간 동굴이 호랑이 굴일 수도 있는 거다. 호랑이 굴로 들어가면 어떻게 되느냐? 자기는 비를 피하려고 들어갔지만 호랑이 밥이 되는 거다. 그런 것처럼 자기는 주님을 믿으려고 교회로 갔는데 잘못된 교회로 들어가게 되면 신앙사기 다 당하고, 살림 다 빼앗기고, 몸도 빼앗기에 된다. 그러면 이런 교회에는 십자가가 안 달려 있느냐? 교회간판이 안 달려 있느냐? 겉으로는 정통교회와 다른 게 전혀 없다. 오늘날 이런 교회가 얼마나 많으냐? 그러니 헛 똑똑이가 되지 말라는 거다.

 

말씀의 이치를 깨달으면 사람의 속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 사람의 정신을 보게 된다. 이 눈을 가지고 볼 때 교회에서 하는 말의 목적이 세상으로 되어있으면 그런 소리는 들을 필요도 없고, 그런 교회는 갈 필요가 없다. 네가 죽는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자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어느 교회가 진짜 교회인지 모르겠으면 먼저 성경을 읽어봐라. 그리고 ‘내가 말씀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 앞에 바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고 싶습니다. 나를 바른 교회로 인도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한 후에 여러 교회를 다녀봐라. 그러면 별로 안 속는다.

 

교인들과 대화를 해 보면 수 년 수십 년을 믿었는데도 ‘어떻게 믿었구나’ 하는 게 드러난다. 성경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모른다면 멍청이다. 헛 봉사를 했구나. 헛 똑똑이구나. 이런 사람일수록 ‘내가 교회에서 집사를, 장로를 몇 해나 했는데’ 하며 교회에서 세월을 많이 보낸 것을 내세운다. 성경이 깨달아진 것은 없고, 사람이 깨닫지를 못하면 이렇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이치를 깨달아야 하고, 자기의 뜻을 이뤄달라고 하지 말고 늘 하나님의 뜻을 찾아라.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찾았으면 그것을 자기 뜻으로 만들어라. 그래야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는 거지 새벽기도니 철야기도를 하면서 늘 자기 뜻을 이뤄달라고 하고, ‘자식이 어떻고, 살림이 가난하고, 집도 사야겠고’ 하는 이건 잘못된 거다. 잘못 깨달았고 잘못 알고 있구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것을 다른 각도를 말하면 믿는 실력, 신앙실력이 앞선 자는 정복이 들어간다는 거다. 정복자에게는 모든 것이 들어있다. 예를 들어서 전쟁에서 이기면 탈취물 안에는 무기도 들어있고, 옷도 들어있고, 구두도 들어있고, 군량미도 들어있다. 모든 것이 다 있다. 그것만 들어 있느냐? 정복한 자에게는 상이 주어지고, 휴가도 주어지고, 계급도 특진이 되고, 영광이 올라간다. 정복자에게는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영능의 실력자에게는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11절: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소자’란 제자들을 부르는 애칭이다. 제자 된 자들은 겸손해야 한다. 겸손치 않으면 제자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모르면 제자가 되어야 할 것이고, 선생보다 더 많이 안다면 배울 필요가 없는 거다.

 

겸손한 자는 자기 타락적 주관성이 없다. 자기 고집, 자기 주관이 없다. 겸손자는 순종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타락적인 자기의 주관성이 강하기 때문에 못 배운다. 자기 마음 속에서 걸리는 게 많아서 못 배운다.

 

화요일 날 평택에서 공부(주-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및 신학생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를 하는데, 계속 참석하는 목사님이 서울에서 다른 몇 사람을 전도를 해서 데리고 왔는데 그 중에 한 목사님이 강의 중에 밖으로 자꾸 나갔다. 앉을 때도 자기보다 덩치가 큰 사람 뒤에 앉아서 자기 얼굴을 숨기고 있었다. 쉴 때는 밖으로 나가 있다가 공부가 시작이 됐는데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이게 뭐냐 하면 자기 주관성이 있어서 옳은 소리에 속이 막 받치는 거다.

 

네가 목사냐? 배우는 태도가 틀려먹었다. 어디서 그런 버릇을 배워왔느냐? 일반보다도 못하다. 일단 왔으면 다 들어보고 ‘아이고, 내가 들을 말이 아니로구나. 이건 세상 말이로구나. 하나님 말씀이 아니로구나’ 하면 다음에 안 나오면 되는 거지 그런 태도를 보이면 안 되는 거다. 겸손한 자는 타락적 자기 주관성이 없지만 교만한 자는 타락적 자기 주관성이 있기 때문에 자기 성질에 못 배운다.

 

가르치는 인도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가르쳐야지 성경을 가지고 세상을 섬기는 수단 방법을 가르치면 이는 거짓된 인도자요 거짓된 복음이다. 이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더라. 천국말씀을 전하더라.’ 성경에 있지 않느냐?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원 목적을 가질 수 있다. 하늘나라의 뜻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당시의 율법학자들, 서기관들은 성경을 학적으로만 고집을 했지 그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뜻은 발견하지 못했다. 성경을 학문적으로만 가르치게 되면 사람의 속마음과 정신은 안 고쳐지고 고집스런 인간성만 자꾸 커진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 인격을 기울여서 4천 년간을 준비해서 우리들에게 주신 것이니 교회의 인도자들은 몸과 마음과 힘과 목숨과 뜻을 다해서, 전 인격을 기울여서 성경을 바로 깨닫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성경을 배웠느냐? 성경구절을 외우려고 하지 말고 성경구절 속의 이치를 잘 깨달아야 할 것이고, 그 다음에 내 자신 속에 죽일 것을 먼저 죽이고, 그러면서 내 자신 속에서 실릴 것을 살려야 한다. 이래야 자기가 예수님의 인격으로 만들어지는 거다.

 

자기 속에 거듭나지 못한 옛사람의 부패성적인 생각과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자기의 주격이 되면 처음엔 사람이 술을 먹지만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먹어버리듯이 자기가 자기를 잡아먹는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진리이치의 말씀으로 무장을 해야 한다.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을 전도를 해서 가르쳐서 자기 사람으로 만들지 말고 예수님께 밀착을 시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인도자도 그렇고, 배우는 사람도 그렇고 자기 사람으로 만들면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 밀착을 시켜야 한다. 배우는 족족, 깨닫는 족족 그 성도가 자꾸 예수님과 친해지도록, 마음과 마음이 결합이 되도록,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이 결합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경외하는 거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진다. 기도하면서 하늘을 쳐다보고, 십자가를 쳐다보는 게 경외가 아니다.

 

잠:에 ‘하나님을 구하라. 진리를 구하라. 지혜를 구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를 말하는 거다. 이게 성경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온 성경의 정신이 이런 건데도 불구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 거짓된 목사가 세상 것을 달라고 하고, 벌벌 떠는 것을 가르치고, 뒹구는 것을 가르치고, 굴러 굴러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으니, 생각을 해 봐라. 뭐가 깨달아지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