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시35:15-20]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

열려라 에바다 2022. 8. 28. 20:41

35편 15절-20절: 오직 내가 환난을 당하매 저희가 기뻐하여 서로 모임이여 비류가 나의 알지 못하는 중에 모여 나를 치며 찢기를 마지아니하도다 저희는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같이 나를 향하여 그 이를 갈도다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리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무리하게 나의 원수 된 자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대저 저희는 화평을 말하지 아니하고 평안히 땅에 거하는 자를 거짓말로 모해하며.

 

15절: ‘오직 내가 환난을 당하매 저희가 기뻐하여 서로 모임이여, 비류가 나의 알지 못하는 중에 모여 나를 치며 찢기를 마지아니하도다.’ ‘비류’가 무엇인가 하니 인간이면서 도덕성이 인간답지 않고 사람들에게 해를 많이 끼치는 아주 저질적인 폭도를 말한다.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도덕성이 인간답지 않은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 일반 불신세상은 구태여 말할 게 없다. 이런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이 어지럽다. 사람들이 고통을 당한다. 그런데 이 말씀은 교회에 주시는 말씀인고로 우리는 기독교 종교계 안에서의 폭도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기독교 종교계 안을 보면 일반적으로 인간답지 않은 폭도가 많은데, 목사님들 중에 이런 자들이 많이 있으니까 일반성도들은 말할 필요가 없는 거다. 교회 안을 보면 성격이 모가 나고 성질이 고약한 사람이 그 성질을 그대로 가지고 목회를 하는 목사가 있다. 평소 때는 이걸 전혀 모르지만 그 교회의 교인이 그 목사의 마음에 안 들기 시작하고 자기로부터 도망을 가려고 하는 게 엿보이면 일반사람들도 가질 수 없는 추악한 도덕적인 면이 막 튀어나온다.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본질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세상적이며 마귀적인 교회가 허다한데, 이런 교회들이 정통적인 기독교 제도로, 성경으로, 목사라는 간판으로 포장이 되어있다. 이게 다 기독교 종교계 안의 악한 비류들이다.

 

교회 안의 이 비류들은 진리가 환난을 당하고 진리의 성도가 괴롭힘을 당하고 환난을 당하는 것을 대단히 기뻐하고, 자기들끼리 모이면 진리신앙의 성도를 물고 찢는다. 사망노선으로 가는 자는 생명노선으로 가는 자를 싫어한다. 악인들은 의인을 싫어한다. 비진리 길을 가는 자는 진리 길로 가는 자를 싫어한다. 세상은 이런 곳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이런 모욕을 당했듯이 우리에게도 그런 것이니 주의를 해야 한다.

 

일반적인 사고방식, 그런 성격 그런 성질을 그대로 교회에 가지고 들어와서 성경으로 포장이 되어있고, 직분으로 포장이 되어있고, 기독교 제도로 포장이 되어있는 일이 많은데, 내가 목사님들을 가르치다 보면 그런 걸 보고 깜짝 깜짝 놀란다. 자기가 진리의 자리에 모인다면 ‘정말 내가 진리를 붙잡고 진리로 살고 싶다’ 이런 신앙이 필요한데, 이런 사람이 필요하고, 이런 목회자가 필요한 건데 ‘내가 진리의 사람으로 살아야 되겠다’ 하는 사람이 많지를 않다. 이건 없고 여기서 같이 배운 사람들끼리 그룹을 만들려고 하는 것을 여실히 본다. 그러니 ‘여기서 배웠지만 나중에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나와서 내가 열심히 가르쳐 놓고도 욕을 먹게 생겼구나’ 이런 느낌이 든다.

 

분리를 해 보면 먼저 존재적으로 유형교회에 들어온 사람과, 안 들어온 사람이 분리가 된다. 그 다음에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을 보면 정신 사상적인 면에서 분리가 된다. 주님의 정신 사상이 들어간 사람과, 교회에 다닌 지 수 년 수십 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세상화로 되어있는 사람으로 분리가 된다. 특별히 목사가 이런 상태의 사람이 많으니 교회 밖의 사람들이 이걸 보고 ‘예수 믿는 게 저러냐? 저것도 목사냐? 목사가 저 정도라면 나도 목사 할 수 있겠다’ 하고서 세상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떼거지로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의 제도를 거쳐서 목사가 된 사람이 많다. 이것이 비류들이고, 악한 자들이고, 폭도들이다.

 

예수님 밑에 가룟유다가 있었듯이 이런 자들이 결코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오늘날 마귀의 역사가 이런 자들을 붙잡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장난을 하는 것을 영의 눈을 가지고 보는 자들은 본 절의 다윗과 같은 기도가 나갈 수밖에 없는 거다. 유형교회는 환경적으로 물질이라고 하는 세상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 교회 안에 들어온 것인지, 아니면 교회가 세상 밖으로 나간 것인지 잘 분별하고 구별해야 한다. 신앙정신 사상으로 관찰을 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신앙의 성격과 성질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는 게 중요하이다. 바로 세우다 보면 눈에 보이는 일이 잘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거다. 자기를 바로 세우다 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경 속에서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될 수 있는 거다. 예수 믿으면 다 잘 된다? 아니다. 이건 거짓말이다. 하나님께서 아시고 적절하게 신경을 써 주시는 거다. 세상에는 거짓말을 일삼는 악한 비류들이 많다.

 

16절: ‘저희는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같이 나를 향하여 그 이를 갈도다.’ ‘연회’란 잔치를 연 것인데, 잔치도 여러 종류다. 먹는 잔치, 말의 잔치, 웅변이나 강연을 하는 말의 잔치, 그리고 교회는 사경회, 즉 천국잔치가 있다. ‘잔치’라고 하는 말은 기쁨의 뜻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잔치’라고 할 때는 기쁨의 장소, 기쁨의 장면을 의미한다.

 

무슨 잔치이던 잔치를 할 때는 서로가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모이고 앉더라. 사람들이 잔치자리에 모이면 처음에는 서로가 모른다. 그러나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 잔치에 참석해서 기쁨을 나누려고 모인 것이기 때문에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이 같이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하다보면 서로가 알아지고 다 같이 기쁨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같은 잔치자리에 참석을 했다고 할지라도 같은 마음으로 그 잔치에 참여하지 않게 되면 서로가 이런 말 저런 말이 많이 나오게 되는데, 이 때 남을 칭찬하는 말이라면 좋겠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더라. 남을 조롱하는 말, 의인을 조롱하는 말, 남을 내려치는 말, 깎아내리는 말을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본 절에서 ‘저희는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같이 나를 향하여 그 이를 갈도다’ 라고 하는 것은 악인들이 성도들에게 눈에 보이게 충돌과 마찰과 대립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미워하는 바리새파 지도자들의 주장성이 예수님의 진리의 가르침에 훼방을 하고 반대적인 입장을 취했듯이, 교훈적인 면에서 진리의 성도들에게 그런 짓을 하는 자를 말하는 거다.

 

교회 안에도 교훈적인 측면에서 악한 자들이 있는데, 이 악한 자들은 언제든지 진리운동을, 진리본질을 물고 씹고 훼방하고 대적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리는 하나밖에 없고, 옳은 교훈은 하나밖에 없다. 그런데 세상은 비진리이기 때문에 세속화된 신앙자들은 반드시 진리의 교훈에 충돌 마찰 대립을 일으키는데, 꼭 눈에 보이게 충돌 마찰 대립을 일으키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주장성이 의사적으로 주님과 팽팽하게 대립적으로 나오게 되니, 우리는 이 장면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의사 단일성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건데 교회의 메시지 자체가 하나님과 의사 단일성이 아닌 세상성으로 되어있다면 이것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집단이 되는 거고, 무리가 되는 거다. 이것은 신앙 사상적 교훈적인 측면에서 하나님과 대립이다. 주님이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린다고 말을 하니까 베드로가 이 말을 듣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라고 했는데, 베드로가 인간적인 생각으로 이렇게 말을 한 것이니 이것은 하나님의 인간구원을 위한 일에 크게 대립이 되는 말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은 거다.

 

그러면 진리신앙으로 나가는 사람은 인간적인 사랑은 아주 없는 거냐? 아니다. 그렇게 보지 말아라. 그렇게 되면 사람이 외식자가 돼버린다. 예수 믿는 사람의 일반적인 선행이나 사랑은 진리가 기준이 되어있는 상태에서, 진리지식 안에서 일반과로서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거다. 우리교인들이 일반적인 선행을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좋은 거다. 그런데 문제는 뭐가 나쁘냐 하면 자기가 하는 그 일반적인 선행들을 하나님 앞에 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잘못된 거다. 기준이 틀렸다 그 말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선은 자타의 구원이 들어있어야 하는 건데 일반적인 선행을 하는 사람이 자기처럼 (구원이 없는)일반적인 선행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너는 왜 나처럼 안 하느냐?’ 라고 하는 게 문제다.

 

진리를 깨닫고 진리 안에서 일반적인 선행을 하는 것과, 안 믿는 사람이 일반적인 선행을 하는 것은 눈으로 보이는 면으로는 똑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 행동을 하는 중심사상은 진리 안에서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온 자타의 구원을 위한 선한 행동이라서 이 선한 행동은 하나님 앞에 다 영생적이고 생명적이 되는 거다. 그러나 일반사람이 하는 일반적인 선행은 구원이 없는 선한 행동이다. 그래서 진리 안에서 하는 선행과, 일반인들이 하는 일반적인 선행은 질적인 면에서 완전히 다른 거다. 행동 활동 면에서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근원이 다른 거다.

 

내가 평소에 늘 말하는 것은 근원적인 것을 가지고 성질 성분 성격적으로 말을 하는 거다. 이런 나의 말을 자칫 잘못 이해하게 되면 극기주의가 돼버리고 사람이 못써져 버린다. 성경을 성질 성분 성격적으로 보지 않고 가견적이고 표면적으로만 보게 되면 영적인 면을 어떻게 표현해 낼 거냐? 이렇게 되면 자칫 잘못하면 악령이 좋아하는 대로 나가게 된다.

 

예를 들면 말씀을 가지고 사람 속의 정신 사상을 보고 고치려고 하지는 않고 하나님을 연구하겠다고 하면서 굴속에서 기도만 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밥도 안 먹고 기도를 하다가 공중에서 뭐가 보이고, 귀에 무슨 소리가 들리고, 꿈에 뭐가 보이고 하면 육신을 가진 자기가 그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 낼 거냐? 기독교 신앙은 이런 게 아니다. 부지런히 말씀을 깨닫고 부지런히 써먹어라. 깨닫는 족족 써먹어라. 써먹으라고 하는 것을 종교적인 어떤 사역을 하라는 것으로 듣지 말고 깨달은 말씀대로 자기의 정신 사상을 만들어라 그 말이다.

 

사람은 다 성격이 차이가 있는데, 자기의 성격이 어떤지를 말씀에 의해 깨달아야 한다. 내가 많이 겪어봤지만 성질이 급하고 오만한 사람은 기분이 좋을 때는 굉장히 살살거린다. 간이라도 다 빼줄 듯이 살살 거린다. 그러다가 뭔가가 틀어지면 활짝 핀 나팔꽃이 아침 해가 뜨자마자 수그러지듯이 푹 수그러진다. 이 사람의 성격을 아는 사람은 이 사람과 가까이 지내지를 않는다. 그러면 자기 혼자 살 수밖에 없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는 표명도 말로써 ‘안 받겠다. 싫다’ 이렇게 표명을 하는 자가 있고, 그 다음에 행동으로 의사표명을 하는 자도 있다. 말도 않고 가버린다면 이건 안 받겠다는 의사표명이다. 그 다음에 의사표명을 할 자리에 아예 안 나오는 의사표명도 있다. 그리고 어떤 일을 돕는 면에 있어서 돕는 것도 여러 가지다. 특히 진리신앙으로 가는 자를 도울 때 말로써 돕는 게 있고, 행동으로 보조를 같이 해서 돕는 게 있고, 그 다음에 물질로 돕는 자도 있고, 또 하나는 그냥 앉아만 줘도 돕는 게 있다.

 

같이 한다거나 반대한다거나 할 때 그 태도가 여러 가지로 있을 수 있는데, 이 때 믿는 우리는 자기의 태도의 표명이 분명해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진리지식의 깨달음이 분명해야 하는데, 깨달음이 분명할수록 자기를 빨리 살필 수 있고, 자기를 빨리 살피게 되면 자기를 빨리 고칠 수 있다. 이런 사람이 매력이 있는 거고 사람이 시원시원한 거다. 우리 기독자들은 자기의 행동표명이 시원시원한 게 참 좋다. 어쨌든 말씀에서 자기가 빨리 빨리 고치지 못하면 자기는 그만큼 다른 사람과도 멀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못 받는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을 통해서 오기도 하는 거니까.

 

17절: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리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 ‘관망’이란 그대로 보고 있는 것을 말한다.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영혼을 멸망시키는 자들’이란 첫째는 선악과를 따먹은 자들이고, 두 번째는 성경을 가지고 비진리를, 세상을 가르치는 자들이고, 세 번째는 예수 믿으면서 이룰구원을 이루지 않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에게서 다윗의 영혼을 구원해 달라는 거다.

 

이런 자들에게서 영혼이 구원되려면, 먼저 진리이치의 말씀을 바로 받을 것, 두 번째는 말씀의 정신 사상을 가질 것. 이것이 아니면 그런 자들로부터 영혼구원이 안 된다. 탈출을 못한다. 정신 사상이 그들과 같다면 어떻게 그들로부터 탈출이 되겠느냐? 안 된다. 자기의 영혼구원은 종교적인 이력이나 업적을 자랑하는 곳에서는 되어지지를 않는다. 다시 말하면 종교적인 업적을 이루라고 하고, 그런 것을 자랑하는 곳에서는 자기의 영혼이 성장이 안 되고 죽는 거다. 구원이 이뤄지지 않는다 그 말이다.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 사자는 사람의 영혼을 죽이려드는 악한 자들을 말하는데, 진리성도에게 있어서 유일한 것이 뭐냐? 우리교인들은 자기의 유일한 게 뭐냐? 하나도 없는 거냐? 육신적으로 보면 생명, 목숨이다. 목숨이 있어야 미래가 있는 거지 목숨이 없으면 무슨 미래가 있겠느냐? 일반적으로 보면 그런 건데, 여기에서는 자연생명이라기보다 영혼에 관한 기능과 지능 면에서의 영적 성장, 다시 말하면 이룰구원을 말한다. 예수 믿는 자기에게 있어서 유일한 것은 이룰구원이다. 이 구원을 이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룰구원이 되는 거냐? 말씀을 붙잡고 말씀과 같은 신앙사상을 가지고 나가면 구원이 이뤄지게 되어있다. 이게 아닌 성경을 가지고 세상적 육적으로 가르치게 되면 영혼이 멸망이 되는 거다. 이룰구원이 안 된다 그 말이다. 영혼이 구원되는 것은 진리생명의 말씀이다. 아주 절대적이다. 그래서 목사님들의 세계에서 교인들을 이룰구원으로 올라가게 하려면 진리생명의 말씀, 신적인 도덕이치, 하나님의 지혜지식성, 생명이치 이런 것을 주어야 한다. 이게 아니면 수 년 수십 년을 교회에 다녀도 아무 쓸모가 없다

 

18절: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대회’란 성도들의 모임을 말한다. 성도들의 모임에서 주께 감사한다고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다윗이 주께서 자기의 영혼을 구해주신 것을 확실히 체험을 했고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성령님의 인도로 세상 육적 비진리의 가르침과 거짓된 교훈에서 탈출을 하고 하나님의 본질인 진리를 깨달아서 생명 길과 좁은 길과 천국신앙의 사상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알고, 또한 사망 길, 넓은 길, 세상 길의 신앙사상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알아서 사망 길에서 탈출을 해서 생명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체험을 하고서 자기의 영혼이 구원되었다고 증거를 하겠다는 거다. 이게 증거다.

 

이 증거를 하려면 하나님의 본질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증거가 되는 거다. 무슨 이상한 체험 이런 게 아니라 자기가 진리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기 전에는 저질적인 상태에서 악한 폭도들로부터 고통과 고난을 받았었는데 이제 진리를 붙잡으니, 하나님을 붙잡으니, 말씀을 붙잡으니 정신 사상이 악한 것들로부터 탈출이 되었기에 이걸 증거를 하겠다는 거다. 이 증거는 그 때 당시 다윗이 체험을 한 것인데, 다윗에게 이 증거가 됐다는 것은 모든 성도들도 이와 같은 이치로 구원이 되고 탈출이 된다는 걸 말해주는 거다.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은 성령에 감동된 신앙양심에서 기쁨의 찬송이 나오게 되는 거다. 이 기쁨은 돈을 많이 벌어서 나오는 감사 찬송과는 다르다. 그러면 주를 찬송한다는 게 뭐냐? 어떻게 찬송이 나가는 거냐? 찬송하기 위한 찬송이냐, 아니면 ‘내 목소리 좋지?’ 하며 찬송을 부르는 거냐? 왜 찬송이 나오는 거냐? 마음 속에서 즐겁고 기쁘기 때문에 찬송이 나오는 거다. 그러면 왜 기쁘고 즐거운 거냐? 구원을 얻었기에 즐겁고 기쁘다. 이룰구원이 체험이 됐다 그 말이다.

 

우리 개인적으로도 이 이룰구원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자기의 신앙사상이 이치적으로 바로 되어서 그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으로 많이 닮아졌다면 체험이 된 거다. 구원이 된 거다. 이 사람은 신앙 사상적인 면에서 벌써 질적으로 구원을 얻은 거다. 말하자면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갔다 그 말이다.

 

19절: ‘무리하게 나의 원수 된 자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다윗의 이 기도를 보면 참 이기적인 기도 같다. 하나님께서 늘 자기 편만 돼달라고 하고, 남을 깎아내리고, 욕을 하고, 뭉개고, 저주하는 것으로 들린다. 그러나 이걸 영적 차원에서 신앙 사상적으로 보면 그 사상이 굉장히 도가 높은 거다.

 

‘무리하게 나의 원수 된 자로.’ 자기들 스스로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있으면서도 그것도 모른 채 거짓된 것을 서로 모의하여 그것을 합법화 시켜서 그것을 근거로 해서 다윗을 원수 삼고 다윗을 박해를 한다. 이 사상이 다윗의 원수다. 다윗을 원수로 삼고 다윗을 박해하는 사람 속에 들어있는 그 사상이 다윗의 원수다.

 

일반적으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냐? 사람 속에 들어있는 죄만 끄집어내서 죽이고 그 죄를 지은 사람은 그냥 놔두라는 말이냐? 사형을 당하는 사람은 죄로 인해서 죄 때문에 사형을 당하는 거냐, 재판장이 그 사람이 미워서 사형을 내린 거냐? 죄 때문이다. 그렇다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죄만 죽이면 되지 왜 사람을 죽이는 거냐?

 

진리입장에서는 죄를 어떻게 처리하는지가 분명하다. 사람에게 진리말씀을 주는 것은 죄를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의 양심을 때리는 거다. 그래서 듣는 사람의 양심이 진리말씀으로 고쳐지면 이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육신을 고치는 게 아닌 그 사람 속에 죄 된 양심을 고쳐주면 그 사람을 살리게 되는 거다.

 

일반적으로 미운 짓을 하는 아이가 있고, 사랑받을 짓을 하는 아이가 있는데, 아이가 겉으로는 아무리 귀엽게 보여도 미운 짓을 하면 밉게 보인다. 왜 그런 거냐? 그 아이의 얼굴 자체가 미운 거냐, 그 아이 속에 들어있는 그게 미운 거냐? 아이 속에 든 게 미운 거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악한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행동 이전에 그의 속 중심이 하나님 앞에 바로 되지 않는 그 면을 염두에 두고 기도를 해야 한다. 다윗의 신앙사상은 자타를 늘 하나님의 본질에 맞추는 거다.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원수가 다윗으로 인해 기뻐한다면 이것은 원수가 승리한 거냐, 진 거냐? 승리한 거다. 그러면 원수로 다윗으로 인해 기뻐하지 못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것은 원수에게 달린 게 아니라 성도 자기 할 탓에 있는 거다. 말하자면 자기가 원수보다 실력을 키우거나 원수에게 책잡힐 일을 하면 안 되는 거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원수에게 책잡히지 않겠느냐? 첫째는 물질 이해타산이나 자기의 체면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두 번째는 자기가 죽을까봐 진리정신 사상을 굽히지 말아야 한다. 자기의 육신이 죽을까봐 신앙정조를 팔게 되면 반드시 책잡히게 된다. 한 번 책잡혀서 거기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면 더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기를 자기 합리화 시킨다면 신앙회복을 못한다. 그런 상태로 계속 자기 변명만 한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누적이 되다가 결국은 망하게 된다.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원수가 어떤 때 기뻐하느냐? 진리성도가 진리운동을 안 하면 원수가 기뻐하고, 진리운동을 하면 미워하고 훼방을 한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하겠느냐? 그 다음에 성도가 마음이 좁고 옹졸하면 원수가 기뻐한다. 또한 성도가 진리지식이 충만치 못하면 원수가 기뻐한다. 반면에 성도가 진리지식이 충만하고 성령에 붙잡혀 있으면 두려워한다.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눈짓을 하는 것은 서로만 아는 암호다. 그리고 서로 통해보자는 신호다. 그러면 원수들이 왜 눈짓을 하느냐? 여기서의 눈짓은 승리감에 도취된 자들 간의 신호다. 그러니까 원수들로 눈짓하게 못하게 해 달라는 것은 원수들 간에 의사불통이 되게 해 달라는 거다. 서로 의사가 안 통하면 일을 추진하지 못할 것이고, 일을 추진하지 못하면 싸울 수도 없는 것이고, 이러면 승리도 없는 거다.

 

20절: ‘대저 저희는 화평을 말하지 아니하고 평안히 땅에 거하는 자를 거짓말로 모해하며.’ ‘화평’이란 첫째는 내가 하나님의 의사 단일성으로 맞춰야 나와 하나님이 화평이 된다. 우리 기독자는 이게 먼저 되어야 한다. 우리 기독자가 다른 사람과 화평을 하려면 어떤 활동이나 행동 이전에 먼저 의사적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단일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화평을 가지고, 이 사랑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관계성을 가질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나님과 화평이 되는 거다.

 

세상이 왜 화평이 안 되는 거냐? 성경이 말하는 화평의 원리가 아닌 다 내 쪽으로 화평을 하자고 하니까 화평이 안 되는 거다. 각자가 자기 속에 뭔가가 들어있는 채로 서로 양보해서 화평을 이루려고 하니 결국은 어느 한 쪽이 손해가 나면 이 화평은 깨지고 다툼이 되는 거다.

 

진정한 화평이란 그 원리가 나도 그렇고 저 사람도 그렇고 각자가 하나님과 화평 된 그 화평으로 서로가 화평하는 거다. 이게 진짜 화평이다. 하나님과의 의사 단일성이 없는 화평은 얼마 가지 못해서 무너져 버린다. 이런 화평은 여호와 하나님과 화평도 아니고 무너질 화평이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과도 원수가 돼버린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과의 의사 단일성의 화평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떤 화평을 말하느냐? 늘 세상과 화평하는 것만 부르짖는다. 인간들끼리 서로 화평을 하려고 하는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걸 자꾸 쪼개버린다고 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을 자꾸 갈라놓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인간들의 화평이 어떤 화평인지를 알 수 있는 거다. 따라서 목사님들의 가르침도 성도들이 인간끼리의 화평이 아닌 하나님과의 화평이 되는 교훈을 줘야 한다.

 

모든 성도 각자가 먼저 하나님과 의사 단일성이 되면 성도들끼리 인격적으로 화평이 되는 거다. 이게 아닌 화평은 결국은 인간들끼리 만이 아니라 하나님과도 원수가 되는 거다. 하나님과는 원수가 되고 인간들끼리 화평을 하는 것은 곧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