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주일설교.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요 12장 20-28절)

열려라 에바다 2022. 8. 30. 09:37

주일설교.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요 12장 20-28절) 김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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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여러 가지로 독특한 특징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말씀’으로 표현 하는 것이 대표적인 특징이고,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본체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원자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드러내 보입니다. 영적인 내용들이 많이 나오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긴밀한 교통을 이루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상대적으로 기적 사건은 7가지만 나옵니다. 기적이나, 이적에 초점이 맞추지 않고, 그 기적에 담긴 예수님의 신적인 권능을 이야기 합니다. 또한 “안다, 알고 있다” 라는 말씀들이 많이 나오면서, 아버지의 뜻을 아들만이 알수 있다는 전개로 나갑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이다(에고 에이미 –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양의 문, 선한 목자, 부활이요 생명, 길이요 진리요 생명, 참 포도나무)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이 곧 구원자라는 사실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십니다.


이렇듯 요한 복음은 영적이면서 예수님의 실체에 대해서 매우 선명한 복음서입니다. 마지막으로 특징을 하나 더 추가하자면,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씀이 요한복음에서만 나옵니다.


“진실로” 라는 말씀이, 마태복음 34번, 마가복음 14번, 누가복음 7번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진실로 진실로”라고 두 번 연속되는 말씀이 25번이나 나오면서, “진실로”라고 한번만 사용한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이러한 특징들을 이해하시고 읽으시면 보다 더 접근하기 쉬우실 겁니다.


오늘 말씀이 있게 된 시점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보면, 베다니에 살고 있는 마리아가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는 사건이 있었고, 유대인들이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까지 죽이려는 시도를 한다는 이야기와,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성전에 입성하신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성전에 들어온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겠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찾아온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20~23절 까지를 읽어 드립니다.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아멘.


예수님이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날은 일요일 이었습니다. 여기서 명절은 유월절이고,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뵙고자 찾아와서 면담 요청을 합니다. 예루살렘 성에는 유대인들만 들어 갈 수 있는 안뜰이 있었고, 이방인들은 이방인의 뜰이라는 곳에 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면담 요청을 한 이 헬라인들은 아마도 유대교로 개종하여 유대인들과 함께 예배하는 것이 허용된 개종자 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쨌든 이들은 유월절 명절에 참여하려는 열심을 낼 정도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깊은 사람들 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헬라인들이 빌립과 안드레를 통하여 면담 요청을 한 이유는, 빌립과 안드레가 헬라식 이름이기 때문에 친근감이 느껴졌고 헬라어로 원활한 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들이 면담 요청을 했지만, 면담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추가 기록이 없습니다. 사실 면담의 성사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시는 이 중요한 시점에 왜 갑자기 헬라인들이 찾아왔다는 이야기가 나왔을까요? 헬라인들이 찾아온 상황 그 자체가 중요 합니다. 복음에는 영혼을 이끄는 능력이 생명력이 있습니다. 헬라인들은 인간의 이성, 철학, 쾌락, 다신적 종교관을 지닌 자유분방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인본주의적인 사고 방식에 푹 젖어 있었던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찾아온 것은 복음의 능력이 그들(이방인들)로부터 시작될 때가 이르렀다는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요한 복음은 이렇게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그 사건 보다는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에 집중하는 책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라고 말하면서 복음의 뿌리가 유대인 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뿌리에서 났으니(족보상)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고도 거부했고(넘어졌고) 이로 인해 복음이 이방인에게 이르렀는데, 이것은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이른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시기와 질투가 나게 만들어서 그들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돌아오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롬 11:11).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바로 이러한 복음의 역동적인 상황이 이르렀다는 것을 암시하는 상황 묘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구원에서 배제 되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은 돌 감람나무(스스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였지만, 참 감람나무인 유대교의 뿌리에 접 붙임(유대교에서 난 복음)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먼저 구원 받았다고 해서 자랑하지 말고 겸손하라고 충고 합니다(롬 11:17,18).


그리고 이방인의 수가 충만하기 까지 유대인들을 우둔하게(복음을 거부하게) 하시겠지만, 그렇게 하심으로 최종적으로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롬 11:26) 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는 로마서 11장에 나옵니다. 우리가 오후 예배에 로마서 함께 나누고 전체 정리도 했기 때문에, 이런 말씀들이 낮설지 않고 고개가 끄덕여 지실 겁니다.


헬라인들은 그리스 사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 사람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말한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는 말씀이 이방인들에게서부터 곧바로 실행이 될 것처럼 분위기가 고조 되는 장면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면, 복음에는 영혼을 이끄는 힘과 생명역이 있습니다. 끌림을 받는 영혼들의 출신과 성분과 배움과 각자의 모양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끌려 나아오는 자들에게, 복음을 듣고자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누구라도 구원의 능력을 베푸시는 복음의 은혜가 역사하게 됩니다.


자신들만이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이라고 자랑하고, 자신들에게만 지혜(말씀, 율법)가 있다고 자랑했던 유대인들이 먼저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불결하고 음란하며 제 멋대로 살아간다고 여겼던 이방인들에게 먼저 구원의 은혜가 임하였니다. 찾고자 하는 자에게, 얻고자 하는 자에게, 엎드려 간구하는 자에게, 겸손한 자에게, 약하닥호 인정하는 자에게, 복음은 역사 합니다. 헬라인들처럼 예수님에게로 나아가려는 시도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움직이면 예수님의 마음과 은혜도 함께 움직이게 되어 잇습니다. 그 만큼 우리 주님은 가까이 나아오는 자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고 사랑과 자비로 맞이하여 주시는 참으로 좋으신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일평생 복음의 능력에 이끌림 받는 거룩하고 순결한 영혼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님 앞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나아나서 단 한 말씀 이라도 듣고자 하는 간절한 사모함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의 마음에 복음의 능력이 충만하게 임하셔서, 날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생명력이 넘치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면담 요청을 들은 예수님의 반응이 나옵니다. 23~26절을 읽어 드립니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아멘


24절은 이 달의 암송 말씀입니다. 잘 외우시고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제가 다닌 신학교의 교훈 말씀 이었습니다. 많이 외우기도 하고 다짐도 하면서, “부름 받아 나선 이몸” 찬양도 함께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그 초심의 열정, 뜨거웠던 처음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할텐데, 왜 자꾸 작아지는지 점점 부끄럽기만 합니다.


예수님의 이 반응은 면담을 해 줄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앞서 설명 드린 것과 같이, 이 상황 자체에 대한 반응입니다. 때가 이르렀다, 십자가에서 죽음의 시간이 왔다. 내가 죽더라도 끝까지 내가 한 말을 믿고 나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늘의 아버지가 기억하시고 존귀하게 여길 것이다 라는 말씀들을 보면, 예수님은 오직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시는 일에 최고로 집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무엇보다도 가슴떨리도록 심장을 울리는 말씀이 24절 말씀입니다. 우리 다같이 함께 큰소리로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아멘.


“진실로 진실로” 라는 말씀의 원어(헬라어-그리스어)는 “아멘 아멘”입니다. 진실로 그렇게 될 것을 믿습니다 라는 말을 붙여서 죽으셔야 함을 최고로 강조하셨습니다. 비장하기도 하고 참담하기도 하고 숙연하기도 하고, 말씀 하시는 예수님이나, 읽고 있는 우리나 복잡한 심경이 주체가 되지 않습니다. 비통한 말씀인 동시에 결단을 다지는 결의에 찬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말이 필요 없는 구국의 영웅입니다. 5년 동안의 임진왜란 기간에 한산대첩을 비롯해 수많는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기나긴 전쟁을 끝내려고 명나라와 일본이 강화조약을 맺으려 하지만 실패하고, 일본은 다시 조선을 침공하여 2년간의 정유재란이 일어납니다. 이 때 이순신 장군은 모함을 받아 관직에서 쫓겨나고, 원균이 이끄는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 합니다. 칠천량 해전에서 수군 2만명이 전사하였고, 160척의 배 중 12척만 남았습니다.


다시 복직한 이순신은 수군을 정비하여 전쟁을 준비하지만, 남은 12척으로 수백척의 일본 수군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이 때 승리한 전쟁이 명량대첩입니다. 영화배우 최민식씨가 주연한 영화에서 보면, 이순신 장군은 고문을 당한 후유증에 시달렸고, 그나마 남아있던 거북선은 불타버렸고, 군사들의 사기는 엉망이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독버섯처럼 퍼지고 있는 두려움 이었습니다.


영화 중 이순신 장군과 아들 이회의 대화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아버님 이 두려움을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두려움을 이용해야 하겠지”, “두려움을 이용하다니요?, 극한의 두려움을 어찌 극복 한단 말입니까?”, “두려움은 필시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고 나타날 수가 있다, 만약 극한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러면 어찌 하시렵니까?”. “죽어야 겠지....내가....”


저는 24절의 말씀 속에서 “죽어야 겠지, 내가”라는 영화 대사가 너무나 잘 맞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시지 않고서는, 구원의 때가 시작되는 역사를 결코 이룰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죄의 굴레를 벗겨내고, 죽음의 두려움을 평안으로 바꾸어 주고, 세상에 미련 두지 아니하고 천국 소망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생명길을 열기 위해서는 죽음의 희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기꺼이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되겠다는 엄중한 선포를 내리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빌립과 안드레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햇을 겁니다. 이어지는 25절 말씀은, 공교롭게도 같은 25절인 마태복음 16장 25절 말씀과 비슷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아멘.


기독교를 역설의 종교라고 합니다. 낮추면 높아지고, 가난하면 부유해 지고, 무명한 자로 살면 유명한 자가 되고, 작은 자로 있으면 큰 자가 된다는 식입니다. 그 중에 가장 역설은 죽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부활 영광을 얻으신 것 같이, 위리 육체(정욕)도 십자가에 완전히 못 박혀 죽어야만 성결의 영으로 이끌림 받게 됩니다.


기독교인들 끼리는 “건강하게 사십시오, 평안 하세요” 라는 말이 인사 말이 제일 듣기 좋고 축복을 전하는 인사말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곧이 곧대로 따르자면, “잘 죽으십시오, 계속 죽으십시오, 철저히 죽으십시오” 라는 말을 인사말로 전해도 전혀 문제가 없는 은혜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No Cross, No crown, No Pain, NO gain, 죽지 않으면 부활도, 영생도 없다”는 기독교의 역설이자 진리가 25절 말씀에 진하게 녹아 있습니다.


26절 첫 부분은 우리 모두가 죽음의 길이라도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는데, 원문을 직역하면, “언제든지 아무라도 계속 해서 나를 섬기려면(주인으로 인정하고 함께 하려면), 그 사람은 나를 계속해서 따를 지니라” 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베풀고, 병자를 고치고,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곳에서 함께 하였전 제자들 이라면, 예수님이 물에 빠지고, 불 속으로 들어가고, 죽음에 이르는 길로 들어섰다고 하더라도 변함 없이 옆에서 함께 하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물어보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모두에게 주저 없이 “네, 제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주저 없이 대답하시는 믿음과 은혜가 부어지기를 축복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지신 예수님의 고귀한 희생 덕분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내가 숨 쉬며 살아가는 일초 일초가 다 은혜입니다.
한 시라도 아 사실을 잊지 아니하고, 감사와, 영광 돌리며 사는 것이 “나를 따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 뒤로 숨고, 빠졌다가 평안할 때 나타나서 온갖 변명을 하는 것은 진짜 바리새인들 같은 위선적인 신앙입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내게 맞겨진 자리에서 묵묵히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 나도 이 시대의 한 알의 밀알이 된다는 각오와 신념으로, 믿음의 길을 담대히 걸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렇게 면담 요청에 대한 반응을 하신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인 27~29절을 읽어 드립니다.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아멘.


이 기도문은 내용은 다르지만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시기 전에 하신 기도문과 맥락이 비슷합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기도에 앞선 예수님의 심정이 얼마나 인간적입니까? 죽음 앞에서는 아무도 태연 할 수 없습니다. 괴롭다는 말씀에서, 육체를 입으신 인간으로서 가장 절망적인 죽음이라는 상황을 앞두고 아무도 지지해주고 따라주는 사람이 없이 외롭고도 처절한 길을 가야하는 절박한 심정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이런 구절을 읽으실 때 예수님의 심정으로 들어가 보셔서 감정을 이입시켜 보십시오. 혼자서 묵상하시다 보면, 눈물이 흐르고 통곡하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게 되실 겁니다. 예수님의 괴로움이 내 괴로움으로 전이 된다면, 성령이 주시는 특별한 위로의 은혜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성경 보시면서 많이 우세요. 성경보고 울보가 되시면 시원해지고, 기도가 잘 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 첫 마디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괴로워 하는 심정 그대로 탄식을 쏟아 내셨습니다. 겟세마네 기도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하신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기도는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라고 하셨습니다. 이 또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하신 겟세마네 기도와 맥락이 같습니다. 인간적으로는 탄식의 기도이지만, 영적으로는 절대 순종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저는 이 기도 문중에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라는 문장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한마디 말씀은 24절의 말씀에 대해서 확실하게, 지체 없이 실행에 옮기겠다는 굳은 결의를 나타내시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목숨이 드려짐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는 실행력이 참으로 예수님 답습니다.


저는 연약한 인간이기에 죽음조차 내어 드릴 용기가 내게 있을지 정말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다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한 입 가지고 두말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아멘, 아멘”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24절과 같은 아름다운 말씀을 입 밖으로 내어 놓았다면, 그 고귀한 말씀을 뒤집고 번복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제 스스로에게 다짐을 시켜 보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언제나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셨습니다. 한 입가지고 두말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실망시키신 적이 단 한번도 없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 시대의 제자라면 단 한번 만이라도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 일을 위하여 여기에 있으니, 지금 이 때에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단 한 번 만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를 드려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여러 가지 일 들 중에서, 많은 말들을 쏟아 낸 것들을 모조리 다 기억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많은 말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천으로 옮긴 것들을 기억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행된 결과들에 대해 심판날에 물어 보실 겁니다. 말만하고 사라진 것들은 하나도 기억하시지 않으십니다. 왜요? 말로 했을 때는 하나님이 기대를 하시지만, 행동으로 옮겼을 때에는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하시자 곧바로 하나님 아버지가 반응 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아멘. 예수님도 이 말씀을 들으시고는 울컥하시지 않았을까요? 너무나 감격적인 하늘의 음성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이 천둥 소리인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 자리를 격동시킬 만큼, 사람들의 마음이 요동칠 만큼 하나님이 큰 영광을 받으셨고, 아들 또한 그만큼 영광스럽게 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100% 순종하고 나아가면,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십니다. 계속 영광 중에 머물게 하여 주십니다. 이보다 더 큰 복과 은혜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영광안에 있기 위하여 죽기 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내 모습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순종하고, 더 기도하고 더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괴로울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셔서 탄식하며 쏟아 놓으십시오. 그리고 포기 하고 싶은 낙심과 절망의 마음을 이겨 내시고, 복음의 능력으로, 말씀의 능력으로 다시 실어 서십시오. 그리고 일평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우리 주님의 손을 꼭 잡으시고, 주님이 가셨던 그 영광의 길을 따라서 영원한 나라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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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기도 하시고, 썩어지는 한 알의 밀이 되기를 주저 하지 않으셨던 우리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도 죽기까지 순종하여 영광에 이를 수 있는 담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날마다 영광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