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사랑의 실천자 되라 (눅 10:30-37)

열려라 에바다 2022. 8. 31. 10:28
 
 

사랑의 실천자 되라 (눅 10:30-37)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 시간에 “사랑의 실천자 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세상은 한 마디로 치열한 전쟁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존경쟁 자연도태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것들은 생물학 용어인데 다 아시듯 생존경쟁(生存競爭)이란 생물이 한정된 자원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는 다툼을 가리킵니다. 자연도태(自然淘汰)나 적자생존(適者生存)은 그 결과로 강한 것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사라져 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이 현상은 우리 인간사회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국제 간에는 드러내놓고 힘이 약하면 침략하여 죽이고 빼앗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여기에는 오직 힘의 논리만 작용하지 윤리나 도덕이나 양심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국제정치는 이렇게 냉혹합니다. 강력한 힘만이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억제력이 됩니다. 장차 인류가 멸망한다면 100이면 100 반드시 이 때문에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살고 모두가 살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오늘 본문에 그 말씀이 나타납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제사장도 레위인도 못 본체 지나가지만 한 사마리아인은 그를 도와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예수님의 말씀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실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왜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야 할까요?

1. 하나님의 너무나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일4:10-11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을 때는 모르지만 알았다면 보답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최소한의 양심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도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그랬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면 예수님께서 주기도를 가르치신 후에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이 말씀만 따로 강조하셨습니다.

그것이 양심입니다. 그것이 사람입니다. 그것도 없으면 사람도 아닙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noblésse oblíge)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란 고귀한 지위에 있는 인사들이 상응하는 사회적 도덕적 책무를 진다는 뜻입니다. 높은 사람, 성공한 사람, 가진 사람, 은혜를 받은 사람, 그 무엇을 가졌다면 그것을 통해 사회에 자신의 의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들보다 훨씬 더 큰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억만 죄악에서 용서하시고 구원하셨고 하나님의 자녀요 일군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그리스도의 신부요, 천국의 영생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예수님과 같은 영광의 형체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5:44-45)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으로 생각하면 사마리아인이 그를 사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강도 만난 자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간 것을 보면 유대인이 확실한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천대했습니다. 그럼에도 사마리아인은 그를 사랑했습니다.

남극에 사는 황제펭귄은 암컷이 알을 낳으면 수컷이 알을 넘겨받아 부화를 시작합니다. 수컷은 알이 얼음위에서 얼을까봐 자기의 발위로 받아서 배 가죽으로 덮어 2달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새끼를 부화시킵니다. 영하 40도의 혹독한 추위에도 알을 부화하기 위하여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수컷이 그렇게 하는 동안 암컷은 먼 바다로 나가 먹이를 찾아 배에 담고 새끼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엄마펭귄이 먹이를 준비하다가 바다표범에게 물려 찢겨도 펭귄은 절뚝거리면서도 계속하여 걷고 걷습니다. 나중에는 걷지도 못하여 배를 깔고 기어서 가는데 그 이유가 새끼 때문입니다. 자신의 뱃속에 있는 먹이를 주기 위하여 그렇게 걷고 또 걷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그와 같습니다. 요일3:1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사랑하며 사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2.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교리적으로만 보면 상당히 난해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지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생(구원)은 어떤 행위를 통해 얻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은혜(선물)로 얻는다는 것이 영원불변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엡2:8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영생의 질문에 왜 사랑하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만 그 구원과 영생의 풍성함은 서로 사랑함으로서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믿음과 사랑 두 가지입니다. 요일3:23에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라” 사랑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지만 그 생명 안에서 풍성하게 자라게 해줍니다.

요일3:14에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했고, 엡4:15에도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하였습니다. 요14:21에도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셨습니다.

사랑하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많습니다. 사랑하다 영적 체험을 크게 한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하나님을 체험하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행복하고 싶습니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할 때 내가 삽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더욱 풍성해집니다.

잠11:24-25에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했습니다. 잠19:17에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했고, 잠28:27에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니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하셨고, 바울도 고후9:8에서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실천이 중요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문인, 마크 트웨인에게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나는 성경을 다 알지 못해서 야단입니다." 그러자 때 트웨인은 "나는 내가 아는 것도 실천하지를 못해서 야단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지식도 좋지만 한 가지라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인도에 간 한 젊은 선교사가 마하트마 간디에게 "내가 어떻게 하면 인도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물었습니다. 그 때 간디는 "Be like Jesus!(예수님과 같이 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가 1952년 노벨상을 탄 이유도 그분이 예수님을 본받아 모든 안락을 뿌리치고 아프리카 대륙으로 가 병원을 설립하고 거기에서 고통 당하는 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선진국 일부 나라에 제노비스법이 있습니다. 제노비스법은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조할 수 있음에도 외면할 경우 제 3자일지라도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일명 선한 사마리아인법입니다. 1964년 3월 13일 뉴욕의 어느 밤거리에서 28살의 키티 제노비스라는 여성이 괴한의 칼에 찔려 살려달라는 비명에 많은 무려 38명의 동네 주민이 깨어나 보지만 누구 하나 신고하거나 돕지 않아 범인은 다시 돌아와 제노비스를 칼로 찌르고 강간까지 합니다. 결국 그녀는 과다출혈로 사망하였고 범인은 범행을 저지르고 유유히 도망쳤습니다.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고 모두가 경악한 나머지 법으로 제정되었습니다.

세계 도처에는 우리의 무관심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혹은 지옥으로 떨어져 가고 있습니까? 그 실상이라도 알고 기도라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25:45-46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사탄에게 강도 만나 멸망해가는 우리 인생에게 찾아오셔서 자기 몸을 버려 구원하신 진정한 사마리아인이십니다. 우리 행복을 위해서라도 예수님을 본받으십시다. “가서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신 말씀은 우리가 바로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을 본받아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나도 살고 너도 살고 모두가 사는 가장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