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바벨론 멸망의 역사

열려라 에바다 2022. 9. 5. 12:00

벨사살과 바벨론 멸망의 마지막 밤

고대의 대제국 바벨론의 마지막 밤은, 정확히 기원전 539년 10월 13일 밤이었다. 즉, 고대 역사에 의하면, 당시 바빌론은 신흥 대제국인 페르샤[성경의 바사]의 국부 고레스(Cyrus)의 연합군에 의하여 연전연패하여, 전선에 나갔던 부왕 나보니더스는, 10월 10일 보르시파 성으로 퇴각하였으며, 섭정왕 벨사살은 바벨론 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바빌론의 마지막 밤의 역사 기록인 다니엘서 5장은, 벨사살을 마지막 왕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일반 고대 역사의 기록에는, 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을 나보니더스(Nabonidus)로 기록돼 있다. 성경을 불신하는 비평가들은, 이 사실을 들어 성경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증거로 내세웠다

그러나 1924년 시드니 스미스(Sidney Smith)가 대영제국 박물관에 수집돼 있던 "나보니더스에 관한 이야기"(Verse Account of Nabonidus)가 됨으써,결정적인 단서가 잡혔다.

본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그는 한 진영(陳營)을, 그의 맏아들의 책임 아래 두었다. 그는 군대를 그와 함께 보냈다. 그는 그와 협정 맺고 그에게 왕권(Kingship)을 위탁했다. 자신이 머나먼 여행으로 떠나 있는 동안 . . . 아무루(Amurru)에 있는 데마(Tema)로 그의 얼굴을 향했다. 옛적에 가 보지 않았던 길, 먼 여행 길을 그는 떠났다. 그들은 검으로 테마 왕을 죽였다. . 그는 그 도시를 단장했고, 그는 그 도시를 만들었다. 그들은 그 도시를 바빌론 궁궐처럼 만들었다."


발견된 당대 여러 문서들을 종합해 보면, 벨사살은 부왕인 나보니더스 3년에 이미 왕권을 위임받았으며, 바빌론성 군대의 통수권을 받았다.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나보니더스가 북부 아라비아의 테마(Tema)를 정복하기 위해 출정하던 때였다. 나보니더스는 테마를 정복한 후 이를 재건하여 그의 거주지로 삼아 약 10년 간이나 틈틈이 거기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바빌론의 모든 공식적인 국무(國務)는 벨사살에 의해 수행되었다.

함락 당시의 바빌론 왕
바빌론성 멸망의 마지막 밤은, 페르샤이 연합군이 바벨론 성을 포위한 가운데, 성안에서 베풀어진 술잔치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시작되었다.

이날 밤, 바빌론성에는 벨사살왕이 그 귀인 일천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다니엘5:1). 그때에 벨사살의 부왕 나보니더스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바빌론 본성(本城)에는 벨사살 밖에 없었는가?

보다 구체적인 기사가 발견된 "나보니더스의 연대기" (The Nabonidus Chronicle)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제 7년에 왕은 테마에 (머물렀다.) 황태자와 그의 대신 (大臣)들, 그리고 그의 군대는 아카드(Akkad)에 (있었다). . . .제 9년 왕 나보니더스는 테마에(머물렀다). 황태자와 그의 대신들, 군대는 아카드에 (있었다). 니산월(Nisan)에 왕은 바빌론에 오지 않았다. 나부(Nabu)신은 바빌론에 오지 않았다. 벨(Bel)신은 에사길라(Esagila·신전)에서 나오지 않았다. 신년 축제는 생략되었다. ……제 10년왕은 테마에 (머물렀다)."

나보니더스는 기원전 556년부터 539년까지 17년간 왕위에 있었고, 그의 아들 벨사살은 부왕의 재위 3년 째부터 섭정왕(攝政王)으로 부임한 것으로 생각하면, 기원전 553년부터 539년까지 14년간 재위한 셈이다. 나보니더스의 연대기에 의하면, 이 기간 중 나보니더스는 그의 재위 7년 (549 BC), 9년(547 BC), 10년(546 BC), 그리고 11년(545 BC)에는 테마에 있었고, 바빌론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연대기에 의하면, 나보니더스는 그의 재위 17년인 기원전 539년 바빌론에 돌아와 있었다. 그런데 흥미 있는 사실은, 고레스의 군대가 바벨론을 함락시키기 몇 주일 전인 티스리월(Tishri·10월)에, 바빌론에서 빠져나왔음이 나보니더스의 연대기에 적혀 있다.
그러므로 바빌론이 함락되던 당시, 성내에는 다니엘서 5장의 기록처럼 벨사살 왕만 있었고 그만 살해를 당한 것이다(5:30).
한편 나보니더스는 어떻게 되었는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가 인용한 바빌로니아의 역사가 베로수스(Berosus)의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나보니더스가 그의 재위 17년에 이르렀을 때, 고레스(키루스)가 대군을 이 끌고 페르시아에서 나왔다. 그는 이미 아시아 전역을 정복하고 나서 바빌로니아를 향해 급히 쳐들어왔다.

나보니더스는 그가(고레스) 자기를 공격해 오고 있음을 알고서,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그와 마주쳐, 그와 더불어 전쟁을 벌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의 군대 중 소수만을 데리고 보르시파(Borsippa) 성 안으로 들어가, 성문을 닫아버렸다. 이에 고레스는 바빌론을 점령했고, 그 성의 외각 성벽들을 헐어버려야 한다고 명령하였다. 왜냐하면 그 성은 그에게 매우 두통거림임이 입증되었으며, 그것을 취하기 위해 상당한 댓가를 치뤄야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고레스)는 나보니더스를 포위하기 위해, 보르시파로 진격했다. 그러나 나보니더스는 포위에 버티지 않고, 자기 스스로 그(고레스)에게 투항했다. 그는 처음에 고레스에 의해 친절하게 취급되다가, 그가 거하여 살 장소로 카르마니아(Carmania)를 받고 바빌로니아를 떠나갔다."


갈대아 왕 벨사살의 최후

여러 날 난공불락의 요새인 바벨론 성을 헛되이 포위하고 있던 메대와 페르샤의 연합군은 묘안을 얻었다. 바벨론 성이 유프라테스 강 위에 건설되었음을 기억하고, 상류의 물을 분지(盆地)로 돌려 강물의 수위(水位)를 낮추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특공대들은 통로가 된 강바닥을 통해 바벨론 성안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했으며, 술에 취해 있던 바벨론의 수비대를 제치고 술잔치 자리까지 돌진하여, 방금 다니엘의 선고를 듣고 사색(死色)이 되어 떨고 있는 왕을 살해함으로써 바벨론의 종말을 가져왔다. 기원전 539년 10월 13일 밤에 일어난 일이었으며, 느부갓네 살이 꾸었던 황금 꿈이 70년도 못 되어 흉몽으로 끝난 밤이기도 했다.



느브갓네살에서 벨사살까지의 왕위 계승

느브갓네살은 43년 간 다스린 뒤, 기원전 562년 10월 초에 죽었다.
그의 무능하고 악한 아들 아멜 마르둑 (성경의 에월므로닥)이, 재위 2년 만에 모반자들에 의해 살해당하였다(렘 52:31-34, 왕하 25:27-30).
느브갓네살의 사위 가운데 하나로 반역을 주도한 네르갈샤르우스가, 4년간 다스렸다(렘 39:3, 13)
다음에는 그의 아들 라바쉬 마르둑이 즉위했으나, 2개월 만에 느브갓네살의 다른 사위인 나보니더스를 지지하는 모반자들에 의해 살해당하였다(556 BC).
어머니를 통하여 느브갓네살의 의붓 아들이 되기도 하고, 부인을 통하여 그의 사위가 되기도 하는 나보니더스는, 정치나 군사 문제보다는 종교와 고고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문약(文弱)한 군주였다(총론 III. 나. 나보니더스 참조).

나보니더스는 신병(身病)등 이런 저런 이유로 바빌론성을 떠나 있으면서, 정치문제를 등한하여 바빌론의 지배계급에게 소외당하고 있었다. 특히 신전들에 막대한 수익(收益)을 올리게 해주는 신년 축제의식을 여러번 생략함으로써, 제사장 계급들과 반목이 심했다. 더우기 바빌론의 주신인 마르둑보다, 자기와 자기 어머니가 이전에 섬기던 하란의 월신(月神)인 신(Sin)을 높임으로써 더욱 그랬다.
나보니더스는 기원전 553년 동부 팔레스틴 정복에 나선 동안, 와병(臥病)하여 병 회복을 위해 레바논으로 가서 요양하였다. 이 때 맏아들 벨사살이 섭정(攝政)하기 시작하여, 다음해인 552년부터는 부와인 나보니더스의 이름으로 다스렸다.
병에서 회복된 후, 나보니더스는 서북 아라비아 정복에 나서 오아시스인 테마(Tema)를 빼앗고, 기원전 545년까지 때때로 거기 머물러 살았다. 수도 바빌론성에는 아들 벨사살이 왕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바빌론에 마지막 밤이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배경
나보니더스 통치 초기에 동방에서 새로운 별이 나타나고 있었는데, 그는 메대의 봉신왕(封臣王)인 안산(Anshan·페르샤)왕 고레스였다. 그는 마침내 기원전 553년 종주국 (宗主國)인 메대를 반역하고, 550년에는 수도 엑바타나(Ecbatana)를 점령했다.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된 나보니더스는, 고레스를 대항하기 위해 이집트와 사데(Sardis)의 리디아(Lydia)와 연맹을 맺고 대항했다.
그러나 기원전 547년 고레스에 의해 사데에서 크뢰수스(Croesus)가 패하자, 바빌로니아는 직접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기원전 539년, 충분한 전쟁 준비를 끝낸 고레스는, 바빌론 영토로 진격하여 바빌론의 풍요한 동부 방어성인 구티움(Gutium)을 쉽사리 점령했다. 이에 놀란 나보니더스는, 바벨론의 여러 신들의 힘을 빌어 자신을 지키고, 고레스가 들어와서 이러한 신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도록, 침략이 예상되는 성들로부터 그 성의 신들의 조상(彫像)들을, 539년 봄과 여름에 걸쳐 모두 바빌론 본성으로 모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처사는 신을 도적질해 가는 것으로 여겨져, 성들의 지방민들과 지방 제사장들을 분노하게 했으며, 마르독 신만을 최고의 신으로 받들던 바빌론성의 제사장들을 시기나게 했다.
이에 벨사살은 고레스가 티그리스 강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티그리스 강변의 요충인 오피스(Opis)에 군대를 이끌고 나갔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오피스를 점령한 페르샤 군사는, 아무 저항 없이 539년 10월 11일 유프라테스 강변의 요충 도시 시파르(Sippar)에 진입했다.
이에 위급해진 나보니더스는 그 전 날인 10월 10일 남쪽으로 도망쳐, 보르시파(Borsippa)성에 들어가 성문을 닫았으며, 벨사살은 시파르에서 남쪽으로 35마일 아래쪽인, 바빌론 본성으로 들어가 방어에 임했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 벨사살은 그 견고한 네 겹의 성벽과, 위기에는 주변의 지방들을 물로 잠기게 하여 침입자들이 성에 이르지 조차 못하도록 설계된 운하망으로 보호된 난공불락의 바빌론성을 철석 같이 믿고, 오히려 자만심에 넘쳐 있었다.

희랍의 역사가 헤로도터스와 크세노폰의 기록
"바빌론 사람들은 그들의 성벽들 밖에 진을 치고서 그(고레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도시로부터 멀지 않은 장소에서 한 바탕의 싸움이 벌어졌으나, 바빌론 사람들은 페르샤 왕에게 패하여 자기들의 방어시설을 철수시켰다. 그들은 바빌론 성안에 들어 박혀서, 그의 포위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는 그들이 고레스가 한 나라씩 한 나라씩 정복해 오는 것을 보았을 때, 그가 그 정복을 결코 멈추지 않고, 마침내는 자신들의 차례가 오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이 공격에 대비한 준비로 여러 해를 위한 양식을 저장해 놓았던 것이다."

"성벽들 안에 들어 앉은 그들은 이 봉쇄를 비웃었는데, 이는 그들이 약 20년 동안의 필수품들을 스스로 갖추어 놓았기 때문이다. . . .고레스는 바빌론 성안에서 어떤 축제가 벌어지고 있어, 온 바빌론 사람들이 밤새껏 마시고 흥청거린다는 사실을 들었다."


"오래지 아니하여 불운이 닥쳐왔다. 바빌론은 메대와 페르샤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메대 사람 다리오의 조카인 고레스에 의하여 포위를 당하였다. 그러나 그 견고한 성벽들과 구리문들을 가진 난공불락(難功不落)인 것처럼 보이는 성채 안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의해 보호되고 넉넉하게 식량을 비축해 둔 주색에 빠진 군주는, 안전하게 느끼고 환락과 주연으로 시간을 보냈다."

공포를 달래는 잔치
이 위태로운 순간에, 왜 이렇게 엄청난 술 잔치가 베풀어졌을까? 주연이 베풀어진 때는 539년 10월 13일 밤이 되는데, 이는 유프라테스 강변의 요새인 시파르(Sippar)가 함락된 10월 11일 다음 날인 것으로, 벨사살의 부왕 나보니더스는 전투에서 패하여, 바벨론 남쪽에 있는 보르시파(Borsippa)에 피신하고 있는 터였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부왕 나보니더스는 나라와 자신과 아들을 위해 앞서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패하여 보르시파 성에 갇힌 채 불안에 떨고 있을 때, 파렴치하고 몰지각한 아들은 평안하고 안전한 바빌론 성안에 들어앉아, 술과 여자로 뒤범벅이된 술잔치를 벌이다니!
왜 이러한 잔치를, 이런 때에 베풀었을까? 아마도 긴박한 상황 때문에 점증하고 있는 불안과 공포를 진정시키고, 연전연패(連戰連敗)로 인하여 떨어질대로 떨어진 사기(士氣)를 진작(振作)시키기 위한 것임에 틀림 없다. 무엇보다도 제사장들을 비롯한 지도 계급이, 이미 이전부터 나보니더스-벨사살 체제에 대해 가져온 노골적인 불만과 불평을 달래야 했을 것이었다.
본성 바빌론을 버려두고, 외유(外遊) 만을 즐기며, 그토록 중요한 바빌론의 신년 축제도 걸르기가 일쑤고, 주신인 마르둑을 경시하는 듯한 나보니더스의 태도는 특히 그랬다. 겨우 페르샤의 공격이 있기 직전에 돌아와 ,제대로 싸움도 못하고 도망친 부왕과, 바벨론이 적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기까지, 변변한 대책을 강구하지 못한 벨사살에 대하여, 백성과 지도 계급, 특히 제사장들이 가진 불신감은 대단하였음에 틀림없다.

이리하여 지도자들의 환심을 사서 불신감을 해소하고, 불평과 불만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술과 여자와 우상숭배 의식까지 곁들인 환락의 잔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메대와 페르샤의 대군에 의해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되어, 불안하고 동요하는 백성들에게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듯, 태연하게 잔치를 함으로써, 그들에게 안도감을 주려는 제스쳐일 수도 있다. 고조되는 불안을 잊고 진정시키기 위해, 여럿이 한 대 어울려 술을 마셔야 할 필요가 절실해진 사람이 바로 벨사살이었다.
고대의 대제국들이 큰 잔치를 벌이는 것은 상례였다. 고대 희랍의 역사가 테시아스(Ctesias)의 기록에 의하면, 페르샤의 왕은 매일 15,000명을 그의 식탁에서 먹였고, 알렉산더 대왕의 국제적인 결혼 축하연에는 10,000의 하객(賀客)이 참석했다는 것이다.

한 때 앗시리아의 수도였던 님루드(Nimrud)의 고대 궁전 폐허에서 발굴된 비명에 의하면, 아슈르나시르팔 2세(Ashurnasirpal II)가 궁전 낙성식을 할 때, 열흘 간 69,574명을 먹이고 수용했다는 것이다. 성경에도 페르샤왕 아하수에로가 180일 동안 엄청난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사가 있다(더1:3-9).
벨사살의 잔치에 초청된 사람들은 귀인 일 천명이었다. 이곳의 귀인(貴人)은 "라브르반"(rabreban)으로, 어떤 직책보다는 그들이 하고 있는 중요한 역할 때문에 분류되는 지도급의 중요 인물(V.I.P.)인 것이다.

당대의 습관대로 먼저 식사가 끝나고, 술이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특히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5:2) 라고 강조한 것은, 고대 동방의 궁중잔치 관습에 따라 왕이 일반과 분리된 테이블에 앉아서 여러 사람이 보는 가운데 마시도록 되어 있었음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이교 국가라해도, 여자들이 이런 공공연한 궁중잔치에 참석하는 것은 격식(格式)이 아니었다. 게다가 왕의 부인으로 분류되는 후궁(後宮)들 외에도, 처첩(妻妾)들까지 불러들인 것은 예외적인 처사였기 때문에, 그들의 참석이 거듭거듭 지적되고 있다(5:3, 23).

과거의 모든 나라와 사회와 개인의 불행과 종말을 가져 온 징후(徵候)인 술과 여자가 예외 없이 바벨론의 마지막 밤을 노크한 것이다. 이미 동방을 거침없이 제패한 페르샤의 고레스도 속수무책이었던 난공불락의 바벨론 성이, 바야흐로 술에 의하여 함락되고 있었다. 벨사살은 그 저녁에 마신 술에서 깨어나기 전, 그의 나라와 함께 자신의 최후를 맞은 것이다.
꼭 같은 일이 216년 뒤에 같은 장소, 거의 같은 시간에 일어났다. 30세가 되기 전에 근동의 세계를 제패한 승승장구의 정복 왕 알렉산더가, 그의 생애의 절정에 바로 이 바벨론 성에서 자신의 무패(無敗)의 전적(戰績)을 찬양(讚揚)하며 승리를 만끽하면서 마구 마시며 흥청거리더니, 주연(酒宴)의 날들 후에 습지열(濕地熱)에 걸려 쓰러지고 만 것이다. 난공불락의 인간 알렉산더도, 술에 의하여 정복되고 말았다.


헤로도터스(Herodotus)의 기록

"(포위한 채) 시간은 경과되고, 그 성(바벨론)에 대한 진격을 시도할 수 없게 되자, 고레스는 커다란 당혹 가운데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번민 중에 있을 때, 다른 사람이 그에게 제안했는지, 아니면 스스로 궁리한 것인지 모르는 한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는 강(유프라테스)이 성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점에 그의 군대를 배치시켰고, 강이 성 저편으로 흘러 나가는 지점에도 군대를 배치하여 놓고, 물이 건너기에 족할 만큼 얕아지자마자, 강바닥(河床)을 통해 진군해 들어가라고 명령을 해 놓았다. 그런 다음에 그 자신은 그의 군대 중에 비전투 인원들을 데리고 철수하여, 전에 니토크리스(Nitocris)가 이 강을 위해 파 놓은 분지(盆地)를 향해 진군했는데, 거기서 그는 니토크리스가 한 것과 똑 같이, 수로(水路)를 통해 당시 늪지였던 그 파 놓은 분지로 강물이 흘러 들어가도록 유프라테스를 돌려놓아서, 본래의 강바닥으로 걸어 갈 수 있을 정도로 강물을 낮아지게 했다.
이쯤 되자, 이 목적을 위해 바벨론의 강가에 머물러 있었던 페르샤 군사들은, 강물이 사람의 넓적다리 중간 쯤에 이를 만큼 잦아지자 강물로 들어섰으며, 그리하여 성 안으로 들어갔다.

만약 바벨론 사람들이 고레스가 하려고 한 일을 알았거나, 그들의 위험을 알아차리기만 했어도, 그들은 페르샤 군사들이 성안으로 들어와서 그들을 완전히 파멸시키는 것을 용납치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강 쪽으로 나 있는 가두(街頭) 성문들을 모두 굳게 잠갔을 것이며, 강 양쪽을 따라 있는 성벽들에 올라가 함정에 빠진 것처럼 된 적들을 사로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페르샤 군사들이 졸지에 덮쳐서 그 도성을 점령하고 말았다. 성의 규모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바벨론 성안에 있는 거주자들이 말한대로), 그 성의 중앙부에 살던 사람들은 그 성의 외각 부분이 함락되고 난지 오랜 후에도,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모르고서 그들이 사로잡히게 되었음을 너무나 분명하게 알게 되기까지, 춤추고 흥청거리는 일을 계속하면서 잔치에 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벨론이 처음으로 함락 당한 때의 상황이다."


크세노폰(Xenophon)

바벨론 사람들이 축제를 열어, 온 밤을 마시며 흥청거린다는 사실을 고레스가 알고나서,
"이 때를 기해 날이 어두워지자, 그(고레스)는 상당수의 사람들을 그와 함께 데리고 가서, 강과 연결된 도랑들을 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밤 동안 이 도랑들로 물이 빠져나가게 되자, 그 성을 통과해 흐르던 강으로 지나갈 수 있게 되었다.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의 얼마는 습격해 들어가 죽였으며, 얼마는 도망치고, 얼마는 소란을 피웠다. 고브리아스(Gobryas)와 함께 있던 사람들도, 마치 자신들도 흥청거리는 사람들처럼, 그들과 합세하여 이 소란에 가담했다. 그러면서 할 수 있는 대로 가장 빠른 길로 전진하여 궁전을 에워쌌다.
군대 조직을 따라, 가다타스(Gadatas)와 고브리아스(Gobryas)를 따르던 군사들은, 궁전의 문들이 닫혀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자 수비병들 맞은 편에 배치되었던 군사들이, 수비병들을 덮쳤다. 그들은 술을 마셨고, 주변에는 대단히 환한 불빛이 두르고 있었으므로, 이들이 즉각적으로 반대되는 수법으로 사용된 것이다. 시끄러운 소리와 소란이 시작되자마자, 궁전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 혼란을 알아차렸으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조사하라는 왕의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달려 나와 문들을 열어 제쳤다.
이에 가다타스(Gadatas)와 함께 있던 병사들은 문들이 열리는 것을 보자마자, 제치고 뛰어 들어가 밀어 닥쳤으며, 그들 가운데서 타격을 가하며, 왕에게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칼을 빼 들고 서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왕을 발견했다. 수적으로 우세한 가다타스와 고브리아스와 함께 있던 병사들은 왕을 제압했으며,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죽였다.
날이 밝자 성채(城砦)들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도성이 함락되고, 왕이 죽었음을 알게 되자, 그들도 성채들을 포기하고 말았다."

고레스의 원통 기념비(일부)


"나는 고레스, 세상의 왕, 위대한 왕, 권능의 왕, 바벨론의 왕이다. . . .내가 바벨론에 개선 입성했을 때, 기쁨과 즐거움으로, 나는 나의 당당한 거처를 왕궁으로 잡았다. 위대한 주, 마르둑(Marduk)은 내가 그를 경배하는 일에 매일 관심을 기울이는 동안, 바벨론 거민들의 고상한 마음을 내게로 움직이게 하였다. 나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군사들은 바벨론으로 펑화롭게 행진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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