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주일설교.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 4장 1-11절)

열려라 에바다 2022. 9. 8. 11:03

주일설교.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 4장 1-11절) 김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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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는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선지자로, 열왕기하 14장 25절을 보면,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라는 말씀 나옵니다. 가드헤벨은 지명 이름으로 스불론 지파에 속해 있었으며, 나사렛에서 동북 쪽으로 5Km 떨어진 곳입니다. 요나가 활동 하던 시대의 왕 이름은 여로보암 2세였고, 이때는 영토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북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번영을 누리던 시기였습니다.

 

요나는 총 4장의 짧은 책입니다. 어느날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당시 북 이스라엘과 맛서고 있었던 앗수르라는 나라의 수도인 니느웨(북동쪽) 성으로 가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러서, 가라고 하는 반대편인 욥바라는 항구(남서쪽)로 가서, 거기서 다시스(스페인 남부의 타르테서스 항구로 추정)로 가는 배를 탑니다. 왜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까요?

 

앗수르는 매 번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약탈을 일삼던 포악한 민족이었기에 그들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이 컸습니다. 그런 나쁜 나라의 수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회개하라는 선포를 하라는 명령은 도저히 따르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니느웨에서 멀리로 도망치려 했던 것입니다.

 

불순종한 요나는 다시로 향하여 나아가다가 배가 깨질 것 같은 폭풍을 만나고, 승선한 인원들이 제비를 뽑아서 요나는 바다에 던져 집니다. 물고기 뱃 속에서 3일 동안 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육지로 나와서, 두 번째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니느웨로 갑니다. 여기까지는 대부분 알고 계시는 내용이실 겁니다.

 

니느웨에 도착해 보니 3일 동안이나 돌아다녀야 할 만큼 큰 성이었는데, 요나는 하룻 동안만 다닙니다. 요나는 아직도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려는 마음이 서지를 안했습니다. 그래서 하룻 동안만, “회개 하십시오, 회개하지 않으면 40일 후에 이 성이 멸망할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회개 합니다. 왕은 왕의 옷을 벗고 상복을 입고 재 위에 앉아 회개 했습니다. 높으나 낮으나 상관 없이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왕이 조서를 내려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고, 먹지도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고 했습니다.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나쁜(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폭력(강포)을 그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모습을 보시고 그들에게 내리려고 했던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이 되어가는 것에 대해서 극도로 화가 났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목숨이 살아났다는 사실도 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머리끝까지 분노한요나와, 이를 상대하시는 요나의 결말 부분의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결론이 날지 아주 흥미 진진합니다.

 

1, 2절을 읽어 드립니다.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아멘.

 

니느웨에 재앙을 내리지 않는 것을 본 요나의 감정이 폭발했습니다. 두 가지의 감정이 나옵니다. ‘싫어하다’(히-와이예라으)는 단어는 본래 ‘악하다, 악한 행동’을 뜻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있는 롯의 집에 천사 두명이 찾아 왓을 때, 사람들이 몰려와서 롯에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내라, 우리가 상관(동성행위)해야겠다고 말하자, 롯이 말하기를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표준새번역, 사정하였다. 여보시오, 제발 이런 못된 짓은 하지들 마시오)고 했습니다. 이 때 악을 행한다는 표현이 바로 요나에게 나타난 싫어하다는 감정입니다.

 

요나의 또 하나의 감정은 ‘성냈다’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표면이 점점 뜨겁게 되면서 격노하여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른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자기가 드린 제물을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자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다”(창 4:5)고 했는데, 여기서 몹시 분하였다는 표현이 바로 요나가 느꼈던 성냈다는 감정입니다.

 

요나의 두 가지 감정을 하나로 묶어 보면, 몹시 불쾌함을 숨길 수가 없었고, 점점 분노가 치밀어 올라 온 몸이 뜨거워져서 감정이 깨트려지고 산산 조각이 났다는 뜻입니다. 싫어하다와 성내다 앞에 매우(히-게돌라, 영-exceedingly) 라는 형용사가 붙어서 극한의 불쾌감, 극한의 분노를 가졌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는 걷잡을 수 없는 뒤틀린 감정으로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 힘들정도로 마음이 완전히 깨져버렸습니다.

 

요나가 이렇게 까지 분노한 이유는 요나 자신이 철저한 국수주의자 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우월의식이 그의 정신과 마음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나라, 모든 왕, 모든 인류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쓰신 선지자였지만, 유대인으로서 그의 사고는 편협함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2절에서 요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왜 자신이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했었는지를 호소 합니다. 요나가,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라고 말한 것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여 드리는 것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신 것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2절을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어로 바꿔서 말해 보면, “내가 이럴줄 알았어요, 내가 이럴줄 알고 고국(이스라엘)에서 다시스로 도망갔다고 말했잖아요. 하나님은 어쩌자고 그렇게 물렁 물렁 하게 나쁜 사람들을 다 봐 주시닙까? 도대체 이게 뭡니까? 좋게만 대해 주셔서는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른다구요. 싸울 땐 싸우시고, 따질 땐 따지시고, 혼낼 땐 확실하게 해놔야 하나님 무서운 줄 안다니까요.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내가 속에 열불이 나요, 속이 터져요 속이, 어휴 성질나~~~”

 

요나의 이러한 감정이 우리에게는 없을까요? 있습니다.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주 말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 말들이, 하나님은 왜 나쁜 사람들을 보고만 계시는 것일까? 하나님은 왜 악을 행하는 자들이 더 잘 먹고 잘 살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일까? 나를 못살게하고 거짓을 행하는 저 사람들을 왜 징계 하시지 않는 것일까? 나는 할만큼 했다고 생각하는데 내 모양과 처지는 맨날 이 모양 이꼴인가?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에 대한 이런 불편한 감정과 원망들이 수도 없이 일어 납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은혜와, 자비와,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오래 참으심이 요나 자신과 이스라엘 나라와 민족에 대해서만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받고 있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지만,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을 향하여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요나는 선지자였지만 하나님의 철천지 원수같은 사람과 악한 자들에게는 자비고 용서고 다 필요 없고 무조건 징계와 심판만 내려져야 한다는 매우 발못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마찬 가지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욕심이 가득합니다. 도무지 만족함이 없습니다. 주신 것은 생각하지 않고 없는 것, 부족한 것, 남이 더 가진 것을 생각합니다. 남보다 내가 덜 가졌다고 생각하면서 자존감을 잃어버립니다. 남보다 조금 더 가졌다고 생각하면 거만해지고 상대방을 낫게 봅니다.

 

나보다 잘난 것이 하나도 없고 못된 짓만 골라서 하는 사람이 돈도 많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보면 짜증 나고 화가 폭발합니다. 요나처럼 자기 자신에게 적용된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남을 자꾸 의식하고 비교하게 되면 우리는 거짓과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됩니다.

 

은혜라는 찬양 가사에, “내가 누려 왔고, 지나왔고, 걸어 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 였소”라는 도입부가 있고, 그래서 “모든 것이 은혜 였소” 라는 후렴구가 있습니다. 정말 이 가사처럼 모든 것이 당연하지 않은 은혜라고 생각 한다면, 나와 남을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현재의 나는, 남들 보다 앞서서 은혜와 자비와 오래 참으심의 적용 대상이었고,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마셔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사람 때문에, 돈 때문에, 건강 때문에, 문제 때문에, 자녀 때문 매우 싫어하고 성내는 태도를 보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러실 때가 있으시다면 요나를 생각하시면서, 이미 나에게 적용되고 확정된 은혜를 먼저 생각하고 감사 하십시오. 그러면 죄 때문에, 열매 없음 때문에, 불순종 때문에, 위선과 가식 때문에, 게으름과 의지박약함 때문에 매우 싫어하고 성내는 마음으로 바뀌어서 범사에 순종함과 기도함으로 인도해 주실 겁니다.

 

나에게 적용되고 확정된 은혜만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로 살아간다면, 더 이상 자존감 떨어지지도 않고, 자랑하거나 비난하는 일도 사라질 겁니다. 은혜가 은혜되게 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성장과정입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은혜와 자비와 오래 참으심의 대상이 곤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아니하고, 감사의 입술로, 기쁨의 마음으로, 열심의 행동으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시는 믿음의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어지는 3, 4절을 읽어 드립니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3절은 요나의 마지막 기도 내용입니다. “니느웨에 재앙을 내리시지 않을 거면 차라리 절 죽여 주십시오. 죽는 것이 낫겟습니다” 이 기도가 어린 아이처럼 떼를 쓰는 것 같은 어리광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을 넘은 행동으로 보였습니다. 4절에 하나님이 즉각 응답 하십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가 목숨 까지 걸고 탄원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은 결코 용납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싫어하고 성내는 마음을 일거에 잠재우는 위엄서린 말씀으로 제압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의 말과 행동이 부당한 것만을 지적 하셧을 뿐, 그를 징계 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요나에게 자비롭고 노하시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으로 함께하여 주시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이 가득한 니느웨의 수 십만 명도 회개 시키시기도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선지자 한 사람도 회개 하게 하십니다. 모두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과 사랑의 법칙을 적용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흐트러진 마음을 깨우치시기 위해 하나의 방법을 동원하셨습니다.

 

5~7절을 읽어 드립니다.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아멘.

 

요나는 초막을 짓고 니느웨 성읍을 바라 보고 있었습니다. 왜 이러고 있었을까요? 요나는 이럴 거면 자신을 죽여 달라고 목숨 걸고 기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니느웨를 반드시 심판 하실 것으로 굳게 믿었습니다. 요나의 마음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각은 요나와 전혀 다르셨습니다. 서서히 요나를 다루어 가십니다. 요나가 있는 초막에 박넝쿨이 있게 하셔서 뜨거운 햇빛을 막아주셨고, 요나는 이에 크게 기뻐합니다. 하나님을 상대로 싫어하고 성내는 자신에게 이처럼 변함없이 긍휼과 자비의 손길이 미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마음을 돌이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햇빛이 가려진 것만을 기뻐할 뿐 여전히 마음은 요지 부동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박넝쿨을 니느웨 백성들에게도 주셨다면, 요나는 다시 싫어하고 더 불같이 성을 내면서 하나님께 대놓고 따졌을 겁니다. 낮의 강한 햇빛을 가려주었던 박넝쿨이 이튿날 새벽에 벌레에 갉아 먹혀서 입이 다 사라졌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이 일하시는 과정이었습니다.

 

8, 9절을 읽어 드립니다.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아멘.

 

다시 낮이 되었는데 박넝쿨 잎사귀가 없으니 뜨거운 햇빛 때문에 기력을 잃고 탈진한 요나는, “차라리 절 죽이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네가 박넝쿨 잎이 사라졌다고 화내는 것이 옳으냐”고 하셨고, 요나는 “옳다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표준새번역)라고 대답합니다. 요나는 비뚤어지고 배배꼬인 마음을 도무지 풀 생각이 없었습니다.

 

박넝쿨 이야기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얼마나 세심한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박넝쿨과 애벌레 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그리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인도하심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요나처럼 화부터 내고, 차라리 죽으면 좋겠다고 거침 없이 말하면서 소중한 생명을 함부로 말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합니다.

 

박넝쿨을 예비하신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직접 밝혀 주십니다. 10,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아멘.

 

이 두 구절을 풀어서 설명드려 봅니다.

요나야 잘 듣거라, 그냥 생겨난 것 같고 하룻 밤 만에 있다가 사라진 박넝쿨 하나를 두고도 너는 화를 내면서 금방 죽겠다느니, 차라리 죽여 달라느니 함부로 말하면서, 니느웨 성 안에 있는 12만명과 가축들은 일거에 다 죽이라는 말이냐,

너 요나는 그래도 나를 알고 있고 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 보았겠지만, 저 니느웨 사람들은 나를 알지도 못할 뿐더러 내 은혜를 받아 보기는커녕,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도 많이 있다,

내가 너 한 사람 에게만 은혜를 베풀고, 저 많은 무리들을 다 죽이는 것이 정녕옳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박넝쿨을 거두어 간 것처럼 너에게 준 은혜도 전부 회수해 가는 것이 맞다는 말이냐, 이래도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대답해 보거라 요나야~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여기까지 말씀 하시고 요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열린 결말로 그냥 남겨 두었습니다. 요나는 당연히 회개 했을 것이고, 하나님이 계속 사용하시는 선지자의 삶을 살았을 거라고 추측을 해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선지자도 이렇게나 큰 약점이 있습니다.

 

요나 이야기는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깨닫게 하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가 은혜를 은혜로 여기며 감사하면서 살아가되, 그 은혜가 더욱 은혜가 되도록 나와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흘려 보내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요나가 싫어하고 화내는 모습에서 보듯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집과 불순종이 쌓이면, 은혜의 통로는 막혀 버립니다. 내가 축복의 통로가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는데 오히려 불통의 장벽으로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내게 적용된 은혜, 자비, 오래 참으심을 먼저 생각 하십시오. 그러면 내가 받은 은혜를 이웃에게 흘려 보내야 겟구나라는 마음의 감동이 자동적으로 넘치실 겁니다.

 

저는 요나서를 읽을 때마다 하나님의 동행하심은 영원 하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요나를 부르시고 사용하실 때 당연히 동행 하셨던 하나님은, 요나가 말씀에 불순종하고 도망 칠 때에도, 물고기 뱃 속에서 죽게 되었을 때도, 니느웨에서 제대로 말씀 전하지 않았을 때도, 하나님을 향해 불쾌해 하고 성을 낼 때도,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며 죽여 달라고 생때를 쓸 때도, 박넝쿨의 교훈을 보고, 듣고도 뜻을 굽히지 않을 때도 여전히 하나님은 요나와 함께 하시고, 기도를 들어 주시고, 그를 훈계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변함 없이 긍휼히 여겨 주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 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뜻대로 안 되면 화부터 냅니다. 당장 자신의 요구들이 받아 들여지지 않거나,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거나, 차별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표정이 일그러지고 험한 말부터 튀어 나옵니다. 우리가 만약 그런 삶을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요나에게 하셨듯이 우리의 마음과 양심에 대고,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라고 혼을 내 주실 겁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라는 말씀은 우리 마음의 나쁜 장벽들을 무너 트리고, 축복의 통로로 시원하게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의 시작입니다.

 

잠언 15장 1절에,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걸핏 하면 나오는 분노, 포악함, 빈정 거림, 악한 말들을 잠재우는 비결은,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이 말씀으로 우리의 입술과 마음에 착, 착 붙이는 겁니다. 그리고 즉시 무릎 꿇고 회개함으로 매우 싫어하고 성(화)을 내는 것에서 돌이키시고, 매우 기뻐하고 복음만을 전하는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셔야 합니다.

 

00교회 성도는, 순간 순간 화가 올라오고 짜증이 날 때 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떠 올리시면서, 항상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항상 이웃에게 복음 전하는 사명 감당하며, 항상 교회를 위해 헌신 하는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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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항상 저희들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려 주셔서 말씀 하신대로 순종하며 모든 이웃에게 은혜와 사랑을 흘려 보내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을 바로 잡아 주시며, 선하고 복된 길로 인도하여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