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요11;17-20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라

열려라 에바다 2022. 11. 21. 19:18

요11;17-20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라20221106


요11;17-20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18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0221106도곡교회 김백수목사 .................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요11;17-20말씀으로[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라]이러한 제목으로 하나님말씀을 선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가족 여러분!
지난 한 주간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뉴스에는 온통 이태원 압사 사건(20221030)으로, 그리고 북한의 로케트 발사와 밤새 그들이 1박2일간(11월2~3일) 쏜 무기를 값으로 환산하며 1000억이나 공중에 날려 버렸습니다.그 돈은 북한 주민의 1년 먹을 양식 값이라 합니다. 북한주민은 굶주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 독재자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힘을 과시하고 있는 어리석은 지도자를 우리들은 보고 있습니다.


헛된 전쟁놀이를 하는 북한의 지도자들이나 마귀의 장난 놀이란 것을 알고 그곳 이태원을 찾았다면 정신 줄 놓은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 찬 곳입니다. 살기 위하여 생활하고자 하는 자는 죽은 자도 살려 주시는 예수님은 찾는 자가 진정한 이 세상에 생명의 빛을 밝히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죄악의 밤으로 죽음이 가득 찬 세상에 예수님 빛으로 생활하는 우리들이 되어지길 소망하며 소원합니다.


오늘 성경본문 말씀을 듣기 전에 성령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본문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그 현장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말씀하십니다.
나사로는 무슨 병이 걸려 죽었는지 모릅니다. 그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입니다. 이 말은 그는 확실히 죽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그의 몸은 부패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땅위에 태어난 사람은 죽음을 피하여 도망갈 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언젠가는 산 사람은 죽게 됩니다. 다만 그 죽음의 마지막이 언제 일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날마다 주님을 의지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죽음을 잘 준비하는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도 죽게 됩니다.
인간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이치입니다.
히9:27말씀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죽게 됩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죽음이 세상에 왔습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말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 죄 때문에 죽음 속에 찾아 오셔서 살리려 죄 용서 하여 주시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는 자 영생을 주시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의 현장에 오신 주님은 우리들이 힘들고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언제나 찾아 오셔서 우리들 손을 붙잡아 일으켜 주십니다. 죽음 가운데 생활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삶이 있는,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인생 생활이 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두 가지로 생명의 양식을 주십니다.
*첫째로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라17-18
*둘째로 유대인들이 위문하러 왔더라.19-20


사랑하는 성도 가족 여러분!
나사로는 확실하게 죽은 것을 본문은 예수님 혼자가 아니라 많은 유대인이 함께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위문하러 온 사실에서 보게 됩니다.
우리들은 주변 사람이 죽으며 위문하고 위로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세상을 떠난 생명을 도로 무덤으로 돌아와 일어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들도 앞서거니 뒤따라가는 죽음의 종착점에 동참할 뿐입니다.
사람은 위로로 끝납니다. 주님은 생명을 살려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 안에서 죽으며 예수 안에서 영원한 생명 영생이 있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들은 믿으면 죽어도 사는 부활, 저 하늘나라를 위하여 살아가는 우리들 남은 생애 믿음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은혜에 의지하여 생활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본론
성경본문 말씀에 이끌려 따라가면 성령님 감동으로 하나님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라17-18


본문성경 요11;17-18말씀에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11;1-16말씀에서 살펴본 대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틀이나 베레아 지방에서 더 지체하던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은 지 4일 후에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본문은 그 동안 예수님의 도착을 기다리다가 나사로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본문성경 요11;17말씀에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사로가 4일째 나흘이면 유대인들에게는 다시 살아난다는 것 소망이 사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은 지 3일 동안만 영혼이 그 육신 곁에 떠돈다고 믿었습니다.
호6:2말씀에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음을 이길 수 없는 것은 영원한 삶을 함께 하기 위해 하나님은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 죽을 수 있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마저 먹음으로 이 땅위에 죄의 결과로 죽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의 후손된 우리들은 그 죄의 결과로 죄를 가지고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은 죽음과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언제 이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죄 용서 받고 생활하는 구원 받은 하나님자녀는 죽어도 사는 축복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 때문에 십자가상에서 대신 자신의 생명을 죄의 값을 갚아 주심으로 그 피로 우리들을 구원받았습니다.
구원 받은 우리들은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예수님은혜로 사는 생활 입니다. 그러니 예수 몰라 생활하며 죽음을 두려워하고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생활하는 불쌍한 자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생각할 것은 나흘4일이 지나다는 것은 나사로의 죽음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며 생명이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4는 환난과 절망을 의미합니다.
1)노아 홍수의 40일
창7:17말씀에 홍수가 땅에 사십일을 있었는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2)이스라엘 백성의 400년의 노예 생활(출12:40)
출12:40말씀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 삼십년이라
3)모세의 미디안의 40년 망명 생활(출3:1-12)
4)이스라엘 백성의40년 광야생활(민14:33)
민14:33말씀에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5)엘리야의 광야 40일의 생활(왕상19:8)
왕상19:8말씀에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6)예수님의 광야 40일간의 금식기도와 시험(마4:1-10)
7)교회사의 신구약 중간사 400년의 암흑시대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과 함께 교제하며 기도하며 예수님의 일을 성령충만 함으로 감당해야 세상을 기쁨으로 생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에서 아내 얻기 위해 7년을 수고할 때 라헬과 연애함으로 수일처럼 지난 것을 생각합니다.
(창29;20)
우리들과 주님과 깊은 교제로 세상의 힘든 일들을 잊어 나가는 생활을 힘을 다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소원합니다.
본문성경 요11;18말씀에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한5리, 약3킬로미터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 말은 예루살렘과 가까운 거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이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 둔 것은 거리가 가까워 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온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가까이 있어도 마음이 떠나면 천리 길이요. 멀리 있어도 마음에 그 사람이 있다면 가까이 생활하는 자가 됩니다.
우리 하나님자녀는 교회와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늘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들이 깊은 교제를 나누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자녀와 부모님과 관계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시73;28말씀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 하리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12제자들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가룟 유다는 손을 가까이 하여 떡을 함께 집어 먹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예수님께 떠나니 예수님을 은30냥에 팔아먹는 잘못을 범하는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우리들 마음은 늘 주님과 함께 하는 복된 생활을 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가족 여러분!
세상은 나흘 된 나사로의 무덤 같은 세상입니다. 죽음이 있습니다. 고통이 있습니다.
방황하는 인생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예수님 복음의 능력만이 가능한 것을 여러분은 믿고 있는지요?
예수 안에서는 죽어도 사는 역사가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내 주변부터 복음을 전하는 생활로 변화시키는 생활을 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유대인들이 위문하러 왔더라.19-20


본문성경 요11;19-20말씀에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의 많은 유대인들이 마르다와마리아에게 위문하러왔다는 말씀을 보아 그들의 슬픔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는 슬픔이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그 죽은 사람이 사랑하는 가족이거나 아주 절친한 사이라면 그 슬픔과 아픔은 말할 수 없습니다.
전7:2과 전12:5말씀에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전12:5에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 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족 잃은 슬픔 속에 있는 자들은 만날 수 없고 그리움만 가슴에 가득안고 살아간다고 생각할 때 슬픔일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으로 인하여 그 슬픔을 이기고 믿음으로 살아 먼저 간 가족을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을 저 하늘나라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에서 위로 받으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믿는 자의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성경 요11;19말씀에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위문 온 사실을 말합니다.
여기 위문이란 원어는 <파라뮈데오마이>은 격려하다. 위로하다 달래다. 즐거운 말을 하다. 는 의미입니다.
신약성경에 4번 나옵니다. 요한복음2번 살전에 2번 나옵니다.(살전2;11과5;14)
본문과 요11:31말씀에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슬퍼하는 자들이 있는 곳에는 위로 자들이 마땅히 있어야 합니다. 우리말에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슬픔은 당한 곳에 갈 수만 있으며 가서 위로해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슬픔 속에 있는 사람의 슬픔을 같이하여 주고 그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당연히 살아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당연한 남은 사람의 의무입니다. 우리의 애도는 그들에게 얼마의 위안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본문에 보면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무능한 자들인 것을 알려 줍니다.
조문객들은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며 말로 그 가족들을 위로해 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나사로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은 없는 자들입니다.
아무리 애타게 같이 슬퍼해 주고 위로해 줘도 죽은 자를 살려 내지 못하는 무능한 자들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자신들도 곧 죽음의 자리에 점점 다가가고 있는 모습을 깨달은 자들은 복 있는 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조문객들에게 식사로 둥근 빵과 계란과 그리고 둥근 ‘렌즈 콩’을 준다고 합니다.
이는 조문객들도 죽음으로 굴러가는 처지임을 깨닫게 하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신 이 세계는 이처럼 죽음의 세계입니다. 주님은 이 죽음의 세계에 생명을 주시고자 오신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아니하였으며 우리들은 사단의 죽음 권세의 종이 되어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명의 주인인 예수님은 우리들을 살리기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아들을 죽이신 하나님 사랑 받은 우리들 이전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심으로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여 십자가상에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우리들 이제는 주님을 더욱 사랑하며 주님처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충성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이 사랑을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성경 요11;20말씀에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 보면 언니 마르다가 보이는 책임감, 혹은 활동적인 성격으로 마르다는 예수님 오심을 듣고서 집을 나서 동네 밖에까지 마중을 나갔습니다.
예수님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나간 것은 주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마르다는 좀더 비밀리에 주님을 만나 뵙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원수로 여기는 자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 갈릴리를 떠날 때 조금은 잠잠해졌지만, 아직도 살기등등해 있으므로 그들이 예수님 도착함을 들으면 광분하여 다시 소동을 일으킬 것 같아 조용히 먼저 만나고자 한 신앙 깊은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성경 요11;20말씀에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앉아서 예수님이 오실 것을 고대하고,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고, 사모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지금 이 어려움을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 가정에 어떤 기적을 행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묵상하고 있는 모습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 하면 얼마 전에 오빠와 함께 말씀을 들은 그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언니 마리아는 음식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예수님말씀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예수님말씀을 귀담아 들은 그 생각에 잠겨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이 복 있는 것이라 들려 주셨습니다.
눅10:41-42말씀에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은 무슨 행동을 해도 예수님과 더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신령한 은혜를 더 많이 받을 수 있기를 사모하며 생활하는 모습이 될 때 우리들은 복 있는 자가 됩니다.
주 안에서 볼 때 마르다의 행동도, 마리아의 행동도, 다 복 있는 행동이며 표현입니다.
우리들 삶이 주님께 인정받고 사랑받는 생활이 될 수 있기를 예
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가족 여러분!
우리들은 슬퍼하는 곳에 함께 슬퍼하며 기뻐하는 곳에 함께 기쁨을 나누면 복음을 전하는 생활을 힘을 다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요?
주님은 슬픈 고통 가운데 있는 베다니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찾아 갔습니다. 우리들도 복음을 전하는 자로 슬픔이 있는 곳에, 아픔이 있는 가정을, 먼저 찾아 위로의 복음, 은혜의 복음을, 기도하며 전하여 그들의 상처를 치료 하는 전도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오늘 본문을 통하여 두 가지 생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라17-18
*둘째로 유대인들이 위문하러 왔더라.19-20


사랑하는 성도 가족 여러분!
살아있는 우리들 언제가 누군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후 000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네요. 할 가족과 성도들이 있을 것을 생각하면 저 하늘나라 위하여 믿음 생활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사로가 죽어도 그곳에 오시니 죽음이 달아나고 사는 역사가 생기게 됩니다. 이 세상은 죽음으로 기득 차 있습니다. 주님 모시고 주님과 함께 생활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사로는 유대인들에게 신임을 잃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위문하려 그의 집을 찾은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주변 사람들에게 더욱 예수 믿는 자로 신임을 받고 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생활로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최고의 위로는 예수 복음 깨달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만난 예수님 전하여 그들을 영생의 길로 인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말씀 하십니다.
요6;44말씀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주님말씀을 듣는 일은 살려는 몸부림입니다. 주님말씀이 우리들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서 믿음은 우리들을 살리는 일입니다. 예수 밖에 불신은 우리들을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예수 안에서 아멘 예로만 생활하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1106도곡교회 김백수 목사
요11;17-20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라2022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