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시37:31-37]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찌어다.

열려라 에바다 2022. 11. 21. 19:23

37편 31절-37절: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여호와는 저를 그 손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재판 때에도 정죄치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나 사람이 지날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찌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31절: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누구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있다? 의인.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다 의인이냐, 죄인이냐? 의인이다. 의인이라야 그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있는 거다.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실족’이란 넘어지는 거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다. 그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33년 동안을 사시면서 이런 일 저런 일, 누굴 만나고 생활하는 그 모든 삶의 걸음걸이에 있어서 실족이 없었다. 흠과 티가 없다는 것은 실족이 없다는 거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법대로 절대 완전적으로 걸어가신 거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법에 절대 정확한 거다. 절대 완전한 거다. 그런데 우리는 실수가 많다.


하나님의 말씀의 법이 자기 인격화 되고, 자기 성품화 되고,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를 깨닫고 사는 사람은 그 된 것만큼 실수가 없다. 이 사람의 삶의 걸음걸이는 자기의 마음이, 정신이 지혜지식의 가치판단 평가성에서 만들어진 것만큼 정확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 정확하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깨달은 것만큼, 그것이 자기 인격화된 것만큼 자기 삶의 평가성에 있어서 정확하다. 이건 하나님 앞에 정확한 거다. 그래서 이 사람이 자기가 만들어진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법에 대면 맞다. 틀림이 없다. 비록 완전은 아니지만 부분적인 면에서 틀림이 없다. 틀림이 없다는 것은 정확도가 진리에 맞다는 것이니 이 사람은 성격 성질에 있어서 기준이 되는 거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예수님으로 맞춘 것만큼 절대 정확한 기준에 맞춘 것이고, 또한 다른 사람이 예수님으로 맞춰졌다면 이것도 절대 정확한 거다.


그런데 자기 기준과, 다른 사람의 기준의 질이 똑같이 예수님에게 맞췄다고 해도 성격은 각각 다를 수 있다. 예를 들면 믿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 한 사람은 이렇게 나가고, 다른 한 사람은 저렇게 나가기 때문에 성격이 다른 것 같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똑같은 거다. 그래서 각자 자기가 하나님의 법대로 걸어간 것만큼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빗나간 것도 아니고, 이탈된 것도 아니고, 사망으로 흘러간 것도 없는 것이니 죄가 없는 거고, 전부는 영생에 속하는 거고, 구원에 속하는 거다.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는 것이니 이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 걸음걸이는 실족해서 넘어지는 것이 없다. 힘이 있다 그 말이다.


예수를 수 년 수십 년을 믿었는데도 왜 넘어지는 거냐? 진리사상에서 왜 넘어지는 거냐? 넘어지는 것만큼 뒤떨어진 거고, 힘이 없는 거고, 약한 거고, 병적인 거다. 넘어질 수밖에 없는 그 정신을 계속 가지고 산다면 이 사람은 계속 넘어지는 거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라고 했으니 넘어지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야 한다.


자기가 아무리 바로 믿으려고 해도 자기에게 하나님의 본질이 없으면 진리에서 이탈이 된 건지 이탈이 안 된 건지, 넘어진 건지 서 있는 건지를 모르게 되고, 이런 신앙을 가지게 되면 무조건 충성봉사면 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고, 이런 신앙의 질은 우리교회에서는 신앙 믿음으로 알아주지를 않는다. 왜 그러냐? 첫째는 깨달은 게 있어야지. 두 번째는 사람이 만들어진 게 있어야지. 그러니 안 믿는 사람과 같은 정신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제 마음대로 하려고 하고, 목사님을 잡고 싸우려고 하고. 이게 되겠느냐? 이런 성질 성격을 가지고 어디를 간들 누가 반겨주겠느냐? 어느 교회에 간들 반겨주겠느냐?


일반적으로 사람이라면 배우고 깨닫고 속에서 여물어지는 게 있어야지. 나이 들수록 아는 게 많아야지.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어갈수록 배우고 깨닫고 만들어지는 것이 자꾸 많아야 하겠는데 이건 없이 맨날 충성봉사만 하라고 하면 뭐가 되겠느냐? 사람도 안 되고, 집안 꼴도 안 되고, 자녀교육도 안 된다.


에덴동산이 얼마나 살기가 좋은 곳이냐? 손만 대면 생명과 따먹고, 일반과도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는 곳인데 뭐하려고 선악과를 쳐다보고 따먹어서 푹 떨어져 버렸느냐? 이게 타락이다. 사람이 못 깨닫고 저질이 되면 아무리 좋은 것을 줘도 자꾸 빼앗기는 거다. 이 원리를 알아야 한다. 누구에게 빼앗기느냐? 나보나 영리하고 똑똑한 사람이 다 채 가 버린다. 사람이 미련하면 똑똑한 사람이 그를 실컷 이용해먹고 내버리지 않더냐? 이런 게 세상이다. 잘못된 교회도 마찬가지다. 이런 교회에 들어가면 실컷 이용해먹고, 헌금 많이 내면 붕붕 띄워주다가 나라경제가 안 좋아서 현금을 많이 못 내면 믿음 없다고 하고. 이런 교회가 없는 것 같으냐?


우리는 예수 믿는 정신이 살아있어야 한다. 아무리 가난하고 남 보기에 무식하게 보일지라도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어야 한다. 자기의 심비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만이 자기가 살면서 죄악에 넘어지거나 돈바람에 불려서 넘어지지 않는다. 사람의 정신이 살았다 그 말이다. 이게 의인이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의인이라.


술 먹은 사람이 무릎이 까이고 얼굴이 까이고 하면 보기 좋으냐? 예수님을 믿는다면 진리 길을 가라. 생명 길을 가라. 네 마음대로 가지 말아라. 말씀대로 가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바로 세우고, 튼튼하게 만들고, 힘 있게 만들고, 존귀 영광자로 만들어 주시려는 것인데 그럼에도 예수를 믿으면서 제 마음대로 간다면 이건 넘어진 거다. 이러면 그 머리 쓰는 것이 낮아져 버린다. 질이 낮아져 버린다. 본능화 돼버린다. 짐승처럼 자꾸 내려가 버린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만 내버려 두시겠느냐? 그런데 화인 맞은 사람은 부끄러움이 없어진다.


32절-33절: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여호와는 저를 그 손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재판 때에도 정죄치 아니하시리로다.’ 우리가 예수님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 아신다. 선악과 따먹은 자들의 정신과 소원과 목적을 훤히 알고 계신다. 이런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죽인 자는 아무도 없다. 못 죽인다. 몸은 물질이기 때문에 죽일 수 있어도 예수님의 마음을 죽인 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 앞에 의인은 그 마음이 악인에 의해서 정복이 되지를 않는다. 왜 그런가 하니 의인은 악인의 마음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훤히 안다 그 말이다. 그러나 악인에게 마음에 상처가 날 수는 있다. 예수 믿는 자기는 누구의 말에 마음에 상처를 받은 일이 있느냐? 몸을 두들겨 패서 상처를 낸 것은 아닌데 말에 의해서 자기의 마음이 상처를 받은 일이 있느냐? 또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낸 일은 없느냐? 우리는 눈에 보이는 면에 상처를 내는 것도 안 되지만 말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내면 안 된다. 악한 말은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만 옳은 진리이치의 말은 그 방편이 꾸중을 할지라도 이것은 상처를 주려는 게 아니라 사람을 깨닫게 해서 살리려는 거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고침을 받아야 한다.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경우를 보면 이기주의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은 말로 남의 마음을 찔러버린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로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에게 어떤 세상적인 것을 가지고 와서 말로써 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 안 된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있다. 진리의 성도가 안 믿는 사람의 마음을 말씀을 가지고 쿡 찌르기도 한다. 왜 그러냐? 자극을 받게 해서, 자극이 되게 해서 하나님을 찾게 하기 위한 방편이다.


상대에게 자극이 되는 말을 하는데 있어서 그 상대를 바로 되게 하려는 마음으로 하는 게 있는가 하면 상대가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욕이 들어가고 성깔이 들어간 채로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그런 것에 상처가 나거나, 그런 식으로 상처를 주면 안 된다.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여호와는 저를 그 손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재판 때에도 정죄치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반드시 정죄하신다. 그러나 의인은 그냥 버려두어서 악인들이 정죄를 당하는 것처럼 정죄를 당치 않게 하신다. 하나님은 악인들은 정죄를 하지만 의인들은 정죄를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법에 잘못했거나 악인들의 법에 걸려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들의 손을 빌려서 스스로 고난으로 들어간 거다. 만일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으신 것이 우리와는 관계가 없고 예수님 당신 자신만을 위함이라면 초능력을 써서라도 당신에게 고난을 주고 죽이려는 자들을 순간적으로 죽일 수도 있는 거지만 우리를 위해서 당신이 고스란히 고난을 당한 거다.


만일 예수님께서 악인들에게 육신에 고난을 받으실 때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면 예수님은 악인들에게 진 거다. 악한 자들이 예수님을 놀리고 할 때 예수님께서 마음이 상해서 ‘이놈의 새끼들’이라고 했다면 이건 스스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거고, 이렇게 되면 우리의 구원은 안 된다. 왜냐? 악에게 넘어갔기 때문에. 그러면 죄인이기 때문에.


의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다. 그래서 악인들이 의인을 정죄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정죄치 않는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이 의인이라면 하나님의 법이 있고, 악인들이 자기를 정죄할지라도 하나님은 정죄치 않는다. 자신이 있고 평안한 거다.


34절: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여호와를 바라고.’ 바란다고 하는 게 뭐냐? 내가 하나님을 쳐다보는 거냐? 바라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신실한 약속임을 인격적으로 믿고 기다리라는 거다. 이게 바라는 거다. 말씀대로 되어지기를 바란다. 응해지기를 바란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도를 지키게 된다. 여호와를 바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도를 지킨다. 도를 지키는 사람,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여호와를 바라게 된다.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자기가 도를 지키고 바란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자를 들어 올려서 자랑을 시키시는데, 어떻게 자랑을 시키느냐? 땅을 차지하게 하신다. ‘이 사람이 땅을 차지할 자격이 있다. 땅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 라고 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 지구 땅의 주인이 누구냐? 복덕방 거냐? 미국의 땅덩어리는 미국 국민들 것이냐? 하나님의 것이다.


신앙 면으로 들어와서 우리가 신앙 믿음이 없으면 빼앗기기 마련이다. 자기가 자기 몸을 관리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달라붙어서 눈알도 빼가고 창자도 빼가고 하지 않더냐? 자기 몸을 잘 간수해서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내 마음은 누가 지키는 거냐? 자기가 지켜야 한다. 돈이 못 지켜준다. 마음이 돈을 따라가면 어떻게 되겠느냐? 자기가 자기 마음을 지키고, 자기 집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라.’ 이 사람이 최고다. 이 사람이 땅을 차지할 자격이 있다. 이 사람이 가질 자격이 있다.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면 땅을 차지하게 하시고, 또한 악인의 종말을 네가 본다. 우리가 창:으로 올라가서 보면 노아 할아버지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니 악인을 종말을 보았다. 그러니 노아가 온 땅의 주인이 된 거다. 노아의 아들 함이 어느 땅을 차지했느냐? 사하라 사막이 아프리카가 있나? 노아에게 잘못 보인 아들이 이곳을 차지했다. 그러면 노아에게 잘 보인 아들은 어느 쪽으로 갔느냐? 서양이다. 이런 걸 세계적으로 보면 우연한 일이 아니다. 동양 쪽에는 웬 우상이 그렇게 많은지? 그러나 미국은 물질적으로 풍부하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을 차지하고 악인의 종말을 봐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은 이룰구원 성화구원 면에서 성도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이 점점 없어지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성도들에게 옳은 진리의 도를 주면 이룰구원 차원에서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악한 것이 점점 없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의인은 악인의 종말을 본다 그 말이다.


35절-36절: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나 사람이 지날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 악인의 세력들이 영원히 갈 것처럼 번창을 하고 커져도 그것은 흐르는 시간 속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임시성에서 끝나는 거다. 사람이 지나갈 때 저가 없어졌다고 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고, 사람이 지나고,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흐르니 흔적도 없어져 버렸다는 거다.


세상이 아무리 크고 좋아 보이고, 행복하게 보이고, 영광스럽게 보여도 그것은 잠시 잠깐이요 지나가는 것이니 부러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지나가는 것을 부러워하지 말아라. 영원히 있을 것을 부러워하라. 자기만 하나님의 말씀, 진리대로만 살고 만들어지면 좋은 것을 보게 된다. 이게 누구의 말씀이냐? 하나님의 말씀이다.


37절: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찌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어떤 사람을 쳐다보라는 거냐? 완전한 자. 왜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사람을 보라는 것일까? 그리고 이 말씀은 나에게 하는 말씀인가, 남에게 하는 말씀인가?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용을 해 먹을까?’ 하며 사람을 찾을지언정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람을 살피거나 정직한 사람을 보려고 찾지를 않는다. ‘누가 돈이 많은 부자인가? 누가 큰 집을 가졌는가? 누가 좋은 차를 가졌는가? 어디로 가야 돈을 많이 벌 수 있는가? 그런 곳이 없나?’ 라고 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살피고 눈독을 들인다.


이 세상에서 절대적으로 완전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욕심을 품고 배우면 그만큼 앞서가는 자가 된다. 하나님과 화평한 자가 된다. 그리고 평안이 온다. 사람이 인격적으로 바로 만들어지지 못하면 평안이 없는 거다. 이 사람은 항상 그 속에 고통이고, 걱정 근심이 도사리고 있다. 이렇게 되면 그 속에서 자꾸 병이 생겨지고 확장이 된다. 성경에 모든 병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인격적으로 만들어지지 못하면 평안이 없다. 자기가 자기를 못 다스린다. 사람에게 고통이 오는 것은 영육 간에 사람이 바로 안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자기가 평안해지려면 100%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서 예수님으로부터 인간을 배울 수밖에 없다. 어지러운 사회가 바로 되려면 완전한 자를 찾아서 바로 배워서 정직하게 살면 된다. 모두가 이렇게 되면 모두가 평안해지고 충돌이 없다. 사람을 바로 안 잡고 맨 남 탓, 누구 탓, 돈 탓을 하게 되면 분쟁이 끝이 없다.


옛날에는 걸어 다니고, 나귀 타고 다니고, 없이 살았어도 마음이 편했는데 지금은 교통도 빠르고, 돈도 많고, 먹을 것도 많은데 왜 이렇게 사람들 속에 고통이 많은 거냐? 죄가 그만큼 많아졌다는 증거다. 사람이 안 돼서 그렇다. 예수님을 안 믿고 안 닮아서 그렇다. 인간이 사는 사회가 고통스러운 것은 누구 때문이냐? 돈 때문에 그러냐? 죄 때문에 그러냐? 사람 때문에 그렇다. 문제의 핵심은 사람인데, 세상에는 참 사람 되는 교육은 없고 고통의 탓을 맨 남에게서 찾으려고 하고, 환경에서 찾으려고 하니 고통과 슬픔과 근심 걱정이 없어지지를 않는 거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인간이 사는 원리, 세상을 사는 원리를 바로 깨닫고 온 세상이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해도 나만큼은 예수를 믿어야 하고, 온 세상이 다 죄악적으로 살아도 나만큼은 하나님 앞에 의사충돌 없이 살아서 평안을 얻어야 되겠다. 하나님과 멀어지면 고통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