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 종으로
사람이 어떤 대상을 정말로 사랑하면 틀림없이 그것에 종이 되기 마련입니다.
때잡이 아이의 응석을 오롯이 다 받아내고 자기 시간과 권리와 휴식을 몽땅 드려서
아이에게 그야말로 종이 되고서도 그것을 매였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연인이 상대만을 생각하고 허비하고 모든 시간과 마음을 다 바쳐도 그것을 조금도
속박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다 못해 종이 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자유의 최고의 절정은 십자가의 속박이었습니다.
주님의 평생은 사람을 섬기고 고치고 발을 씻기신 종의 생애 그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것을 속박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영광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자유를 아버지의 뜻을 위해 기꺼이 종이 되셨기 때문에
그 섬김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자유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통해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무엇으로부터 자유인가보다 무엇을 위한 자유인지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자유가 의를 위해 묶이지 않고 종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라면
다시 볼 것도 없이 그런 구원이란 겨우 죄에 대해 변명과 합리화밖에
대답할 것이 없는 구차한 구원일 뿐입니다.
애굽에서 벗어난 것으로 구원을 다 누릴 수 없었고 가나안을 정복해야
하나님의 통치와 공의를 이스라엘을 통해 나타낼 수 있었듯이
하나님의 구원은 심판을 면한 것이나 이 땅의 복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입성할 때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약속을 여호수아를 통해 하셨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도달한 가나안 땅은 오직 발바닥으로 밟은 곳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냥 주실 법도 한데 왜 발바닥으로
밟은 곳만을 그들의 영토로 주시겠다고 하셨을까요?
신발은 벗고 발바닥으로 다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종을 의미하였습니다.
주님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고 고백하여 종으로서 섬김을
통해 죄인을 해방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복음이 사람에게 주어질 때 단지 그 선물 때문에 기뻐하다가 철들고 나면
비로소 그 선물을 주시기 위해 희생하신 주의 마음을 마주 대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되실 분께서 무가치한 인생을 위해 종되신 은혜 앞에
영혼이 깨어지고 교만이 무너지는 시점을 갖게 됩니다.
이때 비로소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그는 주님처럼 종의 도를 따라가는데
이유를 붙이지 않고 묻지 않고 순종할 수 있는 영광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가나안이 왜 섬기는 자인 종에게 허락되어졌는지 이해가 갑니다.
종되지 않고 누릴 수 있는 안식과 평안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영생의 크기는 우리가 진실로 종되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는 진실로 신발을 벗은 자 인지요..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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