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선진들 : 홍수 이후 옛 시대1.
믿음의 선진들 : 홍수 이후 옛 시대1(히11:1-6)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대하여 정의한 후에(1-2절)
노아 홍수 이전에 살았던 백성들의 믿음을 말한다(3-5).
그리고 믿음에 대하여 다시금 언급한다(6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히11:1).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안다(히11:3).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니다.
옛 백성들과 우리 모두는 믿음으로 보이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안다.
그런데 왜 히브리서는 세상 창조를 말하는가?
옛 백성의 출발점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의 근원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아래로부터 나서 세상에 속한 자들이다.
세상에 속하였다는 것은 휘장 밖의 영역에 속하였다는 뜻이다.
이는 죄 아래에 세워진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옛 백성은 휘장으로 가리신 하나님만을 알고 믿었다.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다.
우리는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힌 것이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다.
따라서 믿음이 온 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
이는 율법 아래에서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갈3:23-26).
여호와께서는 아벨과 노아의 하나님이시다.
이는 여호와께서 아벨과 노아의 구원 역사적인 위치와 환경 속에서 그들의 하나님으로 일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벨과 노아를 통한 하나님 사역의 내용이 다르다.
이러한 하나님의 옛 사역은 종말에 아들을 통해서 이루실 구원을 목표로 한다.
이는 각 시대 언약의 갱신을 통하여 종말을 향한다.
종말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서 이루실 구원 사역을 바라보고 발전적으로 나아간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되고 온전한 믿음이 나타난다.
아들의 믿음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루어진 신실함으로 말미암는다(롬3:22).
이는 아버지를 믿는 아들의 온전한 믿음의 행동이다.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행함이다.
따라서 아벨이나 노아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아벨과 노아가 바라는 것의 실상이며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여기의 ‘바라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은 서로 상응하는 말이다.
이러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서 의로운 자라고 하는 증거를 얻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벨은 죽었으나 믿음으로서 말한다.
아담의 족보에 따르면 더 많은 사람이 존재한다.
그런데 본문은 아벨과 에녹만을 언급한다.
이는 믿음의 인내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아벨과 노아는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인내하여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는 아벨이 드린 제사와 홍수로부터 노아가 받은 구원이다.
이러한 점을 부각하여 히브리서 11장은 그리스도인을 위로하고 격려한다.
창세기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누구인지를 말한다.
아버지에게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일이 어느 아들에게 상속될 것인가를 나타낸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 문제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길이 누구에게 지속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이 창세기에서 언급되는 10개의 족보 내용이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는 가인이 아니라 둘째인 아벨이다.
이는 아벨이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기 때문이다(히11:4).
이처럼 구약에서의 상속 개념은 첫 것을 폐하고 둘째를 택하는 것이다.
첫 것은 기력의 시작이다.
그러나 옛 세상에서 첫 것은 부정하다.
이는 옛 세상은 휘장 밖의 영역 곧 죄가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첫 것을 폐하시고 둘째 것을 택하신다.
이것이 언약이 갱신 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기업은 당연히 장자에게 상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아들에게 상속되게 하신다.
이것이 죄가 지배하는 옛 세상에서 부정과 더러움을 제거하시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는 가인이 아니라 아벨이다.
이러한 사실은 여호와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심으로 나타내신다.
따라서 아벨은 죽었지만 믿음으로서 말한다.
이는 제물과 예물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면 제물과 예물을 드린 제사장이 사는 것과 같다.
이러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극치는 에녹에게서 나타난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김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않았다.
에녹이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히11:5).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에녹을 데려가셔서 옛 세상 가운데 생명의 약속을 주셨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히11:1).
여기에서 “바라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은 서로 상응하는 말이다.
히브리서는 믿음을 따라 살았던 아벨과 노아, 에녹을 예로 든 후에 믿음을 다시 언급한다(히11:3-6).
히브리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
따라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심을 믿어야 한다”
고 말한다(히11:6).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 백성들이 구하는 바를 약속하고 주셨다.
따라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믿음의 선진들에게 상을 주셨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만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약속이다.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위한 약속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상속자를 낳으리라는 여호와의 약속을 믿었다.
이삭은 가나안땅을 상속받으리라는 여호와의 약속을 믿었다.
야곱은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번성하리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믿었다.
이처럼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은 구원 역사적인 위치와 역할이 다르다.
따라서 하나님 약속의 내용이 다르다.
그러나 옛 선진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어떠하심을 알고 믿었다.
결론적으로 히브리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고 말한다(히11:6).
믿음의 선진들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 아니다.
오실 예수를 믿어서 온전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하시는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믿었다.
아벨은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는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히11:4).
에녹은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는 믿음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옮김을 받았다(히11:5).
노아는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어서 방주를 지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엘리에셀이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
하늘을 우리러 뭇 별을 보라.
네 후손이 이와 같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창15:2-5).
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자 여호와께서는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15:8).
이처럼 옛 백성들은 오실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었다.
히브리서 11장의 결론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
우리가 아니면 저희는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다”
라고 말한다(히11:39-40).
이 말은
“옛 선진들은 보지 못하였지만 믿음의 경주를 하였다.
그들이 믿음으로 받고 누린 것은 온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온전한 것을 받지 못하였다면 그들의 믿음의 경주는 헛것이다.
그들이 믿음으로 받고 누린 것은 땅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이처럼 말할 수 있는 것은 옛적의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케 되었기 때문이다.
옛적의 일들은 하늘에 속한 일들의 그림자이며 참 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히10:1).
종말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믿음의 선진들은 여전히 죄와 사망 아래에 갇혀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휘장이 제거되지 않아서
여전히 성소(하늘)에 들어가는 길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히9:8).
하늘에 속한 교회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대하여 정의한 후에(1-2절)
노아 홍수 이전에 살았던 백성들의 믿음을 말한다(3-5).
그리고 믿음에 대하여 다시금 언급한다(6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히11:1).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안다(히11:3).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니다.
옛 백성들과 우리 모두는 믿음으로 보이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안다.
그런데 왜 히브리서는 세상 창조를 말하는가?
옛 백성의 출발점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의 근원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아래로부터 나서 세상에 속한 자들이다.
세상에 속하였다는 것은 휘장 밖의 영역에 속하였다는 뜻이다.
이는 죄 아래에 세워진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옛 백성은 휘장으로 가리신 하나님만을 알고 믿었다.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다.
우리는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힌 것이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다.
따라서 믿음이 온 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
이는 율법 아래에서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갈3:23-26).
여호와께서는 아벨과 노아의 하나님이시다.
이는 여호와께서 아벨과 노아의 구원 역사적인 위치와 환경 속에서 그들의 하나님으로 일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벨과 노아를 통한 하나님 사역의 내용이 다르다.
이러한 하나님의 옛 사역은 종말에 아들을 통해서 이루실 구원을 목표로 한다.
이는 각 시대 언약의 갱신을 통하여 종말을 향한다.
종말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서 이루실 구원 사역을 바라보고 발전적으로 나아간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되고 온전한 믿음이 나타난다.
아들의 믿음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루어진 신실함으로 말미암는다(롬3:22).
이는 아버지를 믿는 아들의 온전한 믿음의 행동이다.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행함이다.
따라서 아벨이나 노아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아벨과 노아가 바라는 것의 실상이며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여기의 ‘바라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은 서로 상응하는 말이다.
이러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서 의로운 자라고 하는 증거를 얻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벨은 죽었으나 믿음으로서 말한다.
아담의 족보에 따르면 더 많은 사람이 존재한다.
그런데 본문은 아벨과 에녹만을 언급한다.
이는 믿음의 인내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아벨과 노아는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인내하여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는 아벨이 드린 제사와 홍수로부터 노아가 받은 구원이다.
이러한 점을 부각하여 히브리서 11장은 그리스도인을 위로하고 격려한다.
창세기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누구인지를 말한다.
아버지에게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일이 어느 아들에게 상속될 것인가를 나타낸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 문제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길이 누구에게 지속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이 창세기에서 언급되는 10개의 족보 내용이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는 가인이 아니라 둘째인 아벨이다.
이는 아벨이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기 때문이다(히11:4).
이처럼 구약에서의 상속 개념은 첫 것을 폐하고 둘째를 택하는 것이다.
첫 것은 기력의 시작이다.
그러나 옛 세상에서 첫 것은 부정하다.
이는 옛 세상은 휘장 밖의 영역 곧 죄가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첫 것을 폐하시고 둘째 것을 택하신다.
이것이 언약이 갱신 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기업은 당연히 장자에게 상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아들에게 상속되게 하신다.
이것이 죄가 지배하는 옛 세상에서 부정과 더러움을 제거하시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는 가인이 아니라 아벨이다.
이러한 사실은 여호와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심으로 나타내신다.
따라서 아벨은 죽었지만 믿음으로서 말한다.
이는 제물과 예물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면 제물과 예물을 드린 제사장이 사는 것과 같다.
이러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극치는 에녹에게서 나타난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김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않았다.
에녹이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히11:5).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에녹을 데려가셔서 옛 세상 가운데 생명의 약속을 주셨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히11:1).
여기에서 “바라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은 서로 상응하는 말이다.
히브리서는 믿음을 따라 살았던 아벨과 노아, 에녹을 예로 든 후에 믿음을 다시 언급한다(히11:3-6).
히브리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
따라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심을 믿어야 한다”
고 말한다(히11:6).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 백성들이 구하는 바를 약속하고 주셨다.
따라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믿음의 선진들에게 상을 주셨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만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약속이다.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위한 약속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상속자를 낳으리라는 여호와의 약속을 믿었다.
이삭은 가나안땅을 상속받으리라는 여호와의 약속을 믿었다.
야곱은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번성하리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믿었다.
이처럼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은 구원 역사적인 위치와 역할이 다르다.
따라서 하나님 약속의 내용이 다르다.
그러나 옛 선진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어떠하심을 알고 믿었다.
결론적으로 히브리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고 말한다(히11:6).
믿음의 선진들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 아니다.
오실 예수를 믿어서 온전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하시는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믿었다.
아벨은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는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히11:4).
에녹은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는 믿음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옮김을 받았다(히11:5).
노아는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어서 방주를 지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엘리에셀이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
하늘을 우리러 뭇 별을 보라.
네 후손이 이와 같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창15:2-5).
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자 여호와께서는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15:8).
이처럼 옛 백성들은 오실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었다.
히브리서 11장의 결론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
우리가 아니면 저희는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다”
라고 말한다(히11:39-40).
이 말은
“옛 선진들은 보지 못하였지만 믿음의 경주를 하였다.
그들이 믿음으로 받고 누린 것은 온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온전한 것을 받지 못하였다면 그들의 믿음의 경주는 헛것이다.
그들이 믿음으로 받고 누린 것은 땅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이처럼 말할 수 있는 것은 옛적의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케 되었기 때문이다.
옛적의 일들은 하늘에 속한 일들의 그림자이며 참 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히10:1).
종말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믿음의 선진들은 여전히 죄와 사망 아래에 갇혀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휘장이 제거되지 않아서
여전히 성소(하늘)에 들어가는 길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히9:8).
하늘에 속한 교회
'기본폴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달음질 하십시오 (0) | 2023.09.19 |
---|---|
아버지 원대로... (0) | 2023.09.19 |
아굴의 평생 기도 (0) | 2023.09.18 |
그래서 기도합니다 (0) | 2023.09.18 |
스크랩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해도 안 될 때, 문제와 해결책 (0) | 2023.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