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왕으로 취임하신 예수 그리스도2(마3:13-17)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은 세례요한의 활동을 강조한다.
특히 요한복음은 세례요한에 대한 설명에서 출발하여
그가 많은 사람을 예수께로 이끈 사실을 강조한다.
그런데 마태복음만이 예수와 세례요한의 대화 내용을 기록한다.
그들의 대화는 예수께서 받으신 세례의 의미를 설명한다.
이것이 마태복음이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세례요한은 세례를 받으려고 나아오는 예수를 보고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십니까”
라고 말한다(마3:14).
그러자 예수께서
“이제 허락하라.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고 말씀하신다(마3:15).
이에 요한은 예수께 세례를 베푼다.
요한은 예수의 전령이며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따라서 요한은 예수로부터 세례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자 하신다.
예수께서는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자신이 세례를 받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에 요한은 예수께 세례를 베푼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의는 도덕적인 완전함이 아니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은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는 일이다.
왜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예수께서 세례를 받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일인가?
세례요한은 율법의 통치 아래에서 세워진 마지막 선지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율법이 명하는 바를 따라 세례를 베풀고 있기 때문이다.
또 예수께서는 율법 아래에 보냄을 받았다(갈4:4-5).
그는 율법 아래에 있는 유대인의 왕이시다.
따라서 모든 의는 언약 당사자의 언약에 대한 신실함이다.
이는 세례요한과 예수께서 율법에 신실하게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예수께서 세례를 받는 것은 율법에 신실하게 행하는 일이다.
이처럼 율법에 신실하게 행하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일이다.
이는 종말에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 사역을 이루는 일이다.
이처럼 세례요한과 예수께서는 자신들의 역할을 감당함으로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룬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뭍으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예수 위에 임하셨다.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고 하였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신 모습은 하나님과 새로운 교통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낸다.
이는 이전의 율법 아래와는 다른 교통이다.
율법 아래에서의 교통은 휘장의 장막이 있는 교통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교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세례를 받은 후에는 새로운 교통이 시작된다.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교제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에 대한 묘사는 복음서마다 다르게 기록한다.
요한복음은 세례요한이 예수 위에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머물러 있음을 보았다고 말한다(요1:32-34).
그러나 하늘이 열린 사실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는다.
이처럼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성령이 머물러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령세례를 베푸시는 분으로 말한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백성들과 함께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하늘에 열렸다고 기록한다(눅3:21).
그래서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신다.
이처럼 누가복음은 예수께서는 백성과 형제이시며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교통하시는 분이라고 증거한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뭍으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렸다고 기록한다(마3:16, 막1;10).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뭍으로 올라오신 일은 물에서의 구원이다.
노아와 그에 속한 식구들이 홍수로부터 구원을 받고,
모세와 그에게 속한 이스라엘이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은 일이
예수의 세례사건의 배경이다.
성경에서 물은 죄를 장사하는 물이며 정결 의식이다.
물의 죽음에서 올라온 자가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된 의로운 자이다.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
라고 기록한다(막1:10).
이는 홍해가 갈라진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이는 마가복음이 예수께서 큰 대적을 멸하시는 권세가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은
“하늘이 열리고”
라고 기록한다(마3:16, 눅3:21).
누가복음에서 열린 하늘은 기도와 상관된 하늘 성소의 열림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하늘의 열림은 물로 인한 죽음에서 새롭게 된 일과
하늘의 통치를 연결하는 하늘의 열림이다.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임하신 모습은 새 시대의 시작과 온전한 구원을 확증하는 성령의 임하심이다.
이는 온 세상이 물로 가득한 죽음의 세계가 종결되었음을 알리는 비둘기가 배경이다.
노아 홍수 때에 비둘기는 하나님 진노가 종결되고 새 생명의 자비가 시작됨을 알리는 전령이다.
하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예수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고 선포하신다(마3:17).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를 상속하신 천국의 왕이라는 선언이다.
이는 선왕이 문무백관들과 백성들에게 세자가 이 나라의 왕이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예수께 임하신 성령은 하나님 나라 왕의 영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성령으로 나라를 통치하고 경영하실 것이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 예언의 성취이기도 하다.
이사야 선지자는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진실로 정의를 시행하리라.
세상에 정의를 세우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고 예언하였다.(사42:1-4)
하늘에서 음성이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고 하였다.
이처럼 마태복음은 ‘이 사람’이라고 칭하여 예수께서 천국 왕으로 취임하셨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라고 기록한다(막1:11, 눅3:22).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만 예수께서 하나님의 전권과 특별한 사랑을 입은 독생자이심을 강조한다.
이러한 복음서들의 기록배경은 이삭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유일한 상속자이며 사랑하는 아들이다(창22;2).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아들의 의미는 아버지와 가장 가깝고 친밀하며 하나가 된 상속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공관복음에서 등장하는 하나님과 하나님 아들, 성령의 언급은
본체론적인 삼위일체를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천국 왕으로 임명하시는 장면이다.
이에 대한 구약적인 배경은 다윗의 후손 왕이다(삼하7:13-14, 시2: ).
다윗과 후손 왕들은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이다.
모세율법을 따라 휘장 밖에 세워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종말에 교회를 짓고 만국을 통치하는 왕이다.
그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뜻을 시행하는 아들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수세 후에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임명되신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는 그 전과는 다른 예수이다.
이는 세례를 받으신 후에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로 섰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가 무엇인가?
이를 보여주는 말씀이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머리 위에 임하여 있더니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가라사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는 말씀이다(마3:16-17).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선포하는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다윗왕국을 계승한 다윗의 자손이 아니다.
다윗왕국은 율법으로 경영되는 휘장 밖 땅에 속한 나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나라는 휘장 안 하늘의 질서가 시행되는 나라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다윗왕국을 하늘의 질서로 온전케 하신 천국의 왕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예수를 종말의 천국 왕으로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선왕이 왕위를 세자에게 양위할 때 문무백관들 앞에서
“이제부터 세자가 이 나라의 왕이니라”
고 선포하는 것과 같다.
예수께서는 종말의 천국 왕이다.
그는 하나님의 참된 뜻과 경륜을 시행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다.
구약의 하나님 나라는 사람 대리통치자를 통해서 경영되었다.
그 나라는 휘장 밖의 영역인 세상에 속한 나라이다.
그러나 아들(그리스도)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뜻이 시행되는 나라이다.
이 나라는 휘장 안의 영역인 하늘에 속한 나라이다.
중보자의 어떠함은 그에게 속한 백성의 어떠함을 결정한다.
구약의 중보자들은 죄 아래에 세워진 사람 중보자이다.
그러나 종말의 중보자는 하나님 아들 곧 하나님 자신이시다.
이러한 사실은 신구약 백성의 본질과 삶의 질서를 결정짓는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셨을 때 하나님과의 옛 관계는 끝났다.
휘장의 장벽을 두고 교제하던 옛 교제 방식은 종결된 것이다.
모세율법과 제도를 통한 옛 통치질서는 영원히 폐기된 것이다.
예수께서 천국의 왕으로 취임하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율법과는 다른 경륜을 시행하신다.
이전의 모세율법과 제도가 주지 못하던 온전한 구원과 생명이 주어진다.
이러한 성취와 온전케 됨은 하늘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취임하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셔서 천국 왕으로 취임하셨다.
이제는 모세의 율법과 제도와는 다른 경륜,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온전한 뜻과 경륜을 시행하신다.
이러한 사실을 나타내는 말이 “하늘이 열리고”라는 말이다.
이제 구약과는 다른 하나님의 뜻과 경륜이 시행된다.
이 말은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복음,
곧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내용이 다르다는 말이다.
마태복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모세가 전한 율법이 아니라 사도들의 복음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이다.
이 말은 구약성경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말고 신약성경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죽음이 그 증거이다(마26:61-68).
이는 예수께서는 모세가 전한 율법과는 다른 가르침을 전파하는 이단의 괴수로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행24:5).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은 이스라엘의 머리로서 세례를 받으심이다.
이는 유대인의 왕으로서 세례를 받으심이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모든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진다.
이는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일이나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옛 관계는 끝나게 된다.
율법 아래의 관계는 종결이 되고 새로운 관계가 시작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기뻐하는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교제의 관계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시작된다.
예수께서 물에서 죽고 물로부터 구원을 받으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머리 위에 임하심을 보더니”
라고 기록한다(마3:17).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교제의 시대가 열렸음을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심을 통해서 나타내셨다.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는 말씀의 선포에서도 나타난다.
이 말씀은 삼하7:12절 이하와 이사야서 42:1절 이하의 내용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그에게 한 아들을 약속하셨다.
그 아들은 하나님의 집을 지을 것이며 그 나라는 영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삼하7:12-16).
그 아들은 고난을 받는 종으로서 그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다(사42:1-9).
그가 종말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예수를 다윗왕국을 완성하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선포하신다.
이처럼 마태는 예수께서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분이며
그가 받으신 고난을 통해서 천하 만민 중에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을 지으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늘에 속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