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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버티는 기둥 (시 128:1-6 절)

열려라 에바다 2024. 1. 8. 14:56

가정을 버티는 기둥 ( 128:1-6 절)

(1)여호와를 경외(敬畏)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2)네가 네 손이 수고(受苦)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亨通)하리로다.  (3)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結實)한 포도(葡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子息)은 어린 감람(橄欖)나무 같으리로다.  (4)여호와를 경외(敬畏)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5)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平生)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6)네 자식(子息)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平康)이 있을지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은 행복하십니까? 진심으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행복한가? 내 가족은 행복한가? 내 가정은 행복한가? 내 부모님은 행복한가? 내 아내는 행복한가? 내 남편은 행복한가? 내 아들 딸은 행복한가?

 

고전13:1-2절에,“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결혼해서 한 평생을 살았으나 내 가정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했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인생을 산 것입니다. 내가 한 남편이 되고, 내가 한 아내가 되어 살았으나 진정으로 부부 간에 사랑을 나누며 행복을 느끼며 살지 못했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닌 헛 인생 길을 걸어 온 것입니다.

부모된 내가 자녀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했다면, 내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식된 내가 부모를 행복하게 해 드리지 못했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인간입니다. 거짓 인생, 위선적인 인생, 비인간적인 인생, 낭비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

 

내 가정은 행복한가? 나는 행복한가? 내 삶은 의미가 있는가? 이 모든 질문은 결국 하나의 질문입니다. 내 가정이 불행하다면, 내 인생이 불행한 것입니다. 내 가정이 불행하다면, 내 삶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3가지의 튼튼한 기둥으로 지탱됩니다. 부부 사랑, 부모 공경, 형제 자매 우애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이 3가지가 아름답게 조화된 가정입니다. 불행한 가정은 이 중에 하나 이상의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가정입니다. 다음의 질문 들은 내 가정의 행복 여부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될 것입니다.

 

 

1.부부 간에 애틋한 사랑이 있는가?

2.남편이나 아내에게 신뢰를 갖고, 미래에 대해 상대방에게 기대하고 있는가?

3.경제적 여건이 여유가 있는가?

4.추구하는 인생의 목표와 이상이 일치 하는가?

5.일상의 취미생활이 일치 하는가?

6.아내가 남편에게 기꺼이 복종 하는가?

7.자녀가 부모에게 순종 하는가?

8.부모님께 효도하고 있는가?

이상의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내릴 수 있다면, 내 가정은 행복한 가정입니다. 그러나 그 대답이 부정적이라면 내 가정은 불행한 가정이요, 내 인생은 불행한 인생입니다.

 

오래 전에“범양”이라는 해운회사가 1천억원이 넘는 큰 부도를 내고 넘어진 사건이 있었다. 우리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사건의 핵심이었던 박 모회장과 한 모사장이 모두 명문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한 재계의 지도자들일 뿐만 아니라, 두 사람 다 기독교 신자였다는 것이다. 회사가 부도가 나 넘어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액의 부정 축재와 달러 유출을 일삼았고, 회사 재산을 사유로 빼돌리고, 내연의 처까지 두고 살았다. 박회장은 신자의 금기 사항인 자살로 일생을 끝냈고, 한사장은 이미 그 전부터 가정이 파괴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 신자들의 윤리 의식에 경종을 울려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부모 살해로 사회에 무서운 충격을 던졌던 박한상 군의 가정도 기독교 가정이었다. 죽음을 당한 100억 대가 넘는 재산가였던 그 부친은 교회의 안수집사였다. 강동구의 모 유명한 교회 안수집사는 가난을 비관하여 온 가족이 동반 자살해 버리는 가정 파괴를 자행했다.

 

우리는 모두 가정에 속해 있다. 부모로서, 또는 자녀로서 가정을 지키고, 가정의 울타리 속에서 성장한다. 가정은 사회 구성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이며, 한 인간의 인격 형성과 생존의 기본 단위이다. 그런데 이 가정이 오늘날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다. 모든 사회 범죄, 부패, 타락, 죄악의 뿌리는 사실 가정 부재에 그 원인이 있다.

사회학자들은 가정 몰락의 주요 원인을 세속주의, 이기주의, 물질주의라고 진단한다. 이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 없는 신앙 부재의 세계가 윤리, 도덕 부재의 가정을 양산하고, 그 비참한 결과를 재삼 재사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 민족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쉐마 교육>으로 유명하다.‘쉐마’는“들어라”는 뜻인데, 6:4-9절 말씀에 근거한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유대인들은 이 쉐마 교육으로 2,500여 년 간 그들의 종교와 신앙을 지켜 왔다. 지금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영역을 모두 유대인들이 장악하고 있다. 이것은 신앙 교육과 신앙 가정의 중요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우리에게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가르쳐 준다.

부모는 마땅히 자녀들에게 여호와를 알도록 가르쳐야 한다. 가르치되 철저히 가르쳐야 한다. 부모는 자신의 신앙 생활을 통해서 자녀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섬겨야 하는지, 하나님을 섬기되 분명히 축복을 받도록 섬기는 법을 삶으로 몸소 가르쳐야 한다.

오늘 말씀은 우리 믿음의 가정들이 나아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 주간은 어느 주간 보다 가정과 가족의 의미가 새롭게 반추 되어야 할 기간이기 때문에, 가정의 화목함과 소중함을 구구 절절이 아름답게 표현한 본문을 상고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절 말씀에,“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 가는 사람과 가정은 복이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 삶의 중심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는 삶의 중심을 잃었기 때문에, 숱한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다. 물질주의의 노예가 되어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하고, 사치하고, 낭비하는 사조가 전 사회 계층에 만연해 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잘 사는 사회가 아니라, 열심히 일해도, 죽도록 일해도 결코 잘 살 수 없는 사회가 우리의 사회 구조가 되어 있다.

이러한 비관적인 사회 풍토 속에서는 건전한 가정이 자생할 수가 없다. 아빠가 흔들리고, 엄마가 흔들리고, 부모가 비관하고, 절망하며 가치관이 흔들리는데, 자녀인들 온전할 리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 풍토, 이러한 가정들 속에서 모두가 생각하는 것은 한탕주의, 황금 만능주의, 이기주의, 독단주의일 수 밖에 없다.

 

오늘날의 모든 사회적, 국가적 위기는 결국 가정의 위기이다. 가정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가정의 지주가 없고, 정신적 가치관이 없다. 이런 전도된 시대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먼저 개인과 가정을 하나님 중심으로 굳게 세워야 한다. 자녀들에게 “온 세상이 악으로, 부정으로, 편법으로 달려 갈지라도 너희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그리하면 반드시 축복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여 가르쳐야 한다.

 

과거에 제가 아는 한 학생은 절도 습성이 있었다. 그런데 상습적이다. 온 가족의 돈이란 돈은 다 훔친다. 그 누이가 교회 선생님이었는데, 한 달에 월급 25만원을 받아 십일조를 하려고 봉투에 넣어 두면 어느 사이엔가 빼내 가 버린다. 그 가정은 정말 너무도 가난한 가정이다.

그 누이가 이런 사실을 말하면서 눈물로 하소연을 하길래, 몇 번이나 충고를 해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기가 찰 일이다. 그는 여전히 고치지 못하고 있다. 그 후 그 학생은 청소년 감화원, 교도소를 드나 들었다. 학교를 중퇴하고 직장에 들어 갔는데, 단 두 세 달을 견디지를 못했다.

그러나 그 학생이 성장한 배경을 살펴 보면 절도 습성 그 자체만 가지고 정죄하지 못할 사연이 있다. 바로 가정의 문제이다. 돌보고 지도할 가족이 없고, 자신이 쉬고 안주할 가정이 없었던 것이다.

가정을 회복해야 한다. 가정이 하나님 중심으로 굳게 서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윤리 질서를 지키는 일이 생활화 되도록 일상 생활 속에서 가족이 자연스럽게 훈련 되어져야 한다. 이렇게 살아 가면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나의 삶이 순조롭게 일치되게 된다. 양자가 갈등을 일으키며 병행하는 한 예수 믿는 것은 언제나 고통과 도피성 믿음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에게는 물질도 필요하고, 권력도, 명예도, 사회적인 지위도 다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생명이다. 우리의 생명이 올바른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면, 나머지 육신의 일은 저절로 제대로 풀려 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기를 쓰고 거꾸로 살려고만 든다.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안타까울까? 이것은 신앙인의 삶의 태도가 아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에 축복이 있다. 하나님을 올바로 섬겨야만 각종 현대적 우상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설 수가 있다. 온통 이기적인 사고와 풍조로 물들어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 가는 가정이라야 이타와 헌신을 배워 실천할 수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여러 성도님의 가정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2절 말씀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는“자기 손이 수고한 대로 먹으며 살 수 있는 축복이 있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하나같이 다 자기의 능력으로 살아 가는 것 같이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재능과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살아 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자기 잘났다고 자랑하고, 교만하며, 으시대는 사람처럼 불쌍한 인생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 건강 하나만 빼앗아 가 버리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제 아무리 권력이 있고, 지위가 있고, 재능이 있어도 다 끝나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정말 큰 일 날 사람이다.“경외”란 두려운 마음으로 벌벌 떨며 섬기는 자세를 말한다.

하나님은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의 생명을 위한 길이라면, 우리 자녀를 데려 가실 수 있다. 내 가진 것을 순식간에 깡그리 빼앗아 가실 수 있다. 아니 내 생명을 바로 불러 가실 수도 있다. 두려움으로 예수 믿으며 하루 하루 살아 가야 한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섬기고, 믿음의 길을 걸어 가다 보면, 때로는 신앙생활이 압박처럼 느껴지고, 어떤 굴레가 나를 씌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그만 대강 대강 예수 믿는 시늉만 하고, 세상으로 뛰쳐 나가 버리고 싶을 때가 간혹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인생의 근본을 찬찬히 하나님 앞에서 살펴 보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에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신앙은 속박과 굴레가 아니다. 신앙의 모든 일들은 밥을 먹듯이 자연스러워져야 한다. 힘들지 않아야 한다. 교회 오는 것도, 헌금 드리는 것도,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도 다 그렇게 되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기가 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힘이 들고, 어깨에 지워진 십자가의 짐이 잘 맞지 아니하고, 고통스럽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을 잘 이겨 내야 한다. 인내하며 이겨 내는 자 만이 축복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

 

요즈음은 사회가 현대화, 도시화, 물질화 되다 보니 가난과 청빈의 미덕은 다 사라져 버렸다.“돈만 있으면 다 된다.,“돈이 없으면 다 소용 없다.”는 생각이 신자이건 비신자이건 머리 속에 꽉 차 있다.

사실 돈 없으면 신용도 없어진다. 돈 없으면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한다. 돈 없으면 사람이 곁에서 죽어 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무서운 세상이 되었다. 정말이지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가난과 청빈은 정말 돈으로 살 수 없는 기독교 본래의 미덕이었다. 리챠드 포스터라는 사람이 쓴 책 가운데 <돈 섹스 권력>이란 책이 있다. 내용 가운데“돈”에 관한 부분을 읽어 보면 우리 인간은 쓸 데 없는 탐욕 때문에 너무나도 부자유하게 살아 간다고 갈파한다.“좀 포기하고 살면 굉장히 자유롭다.”는 것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일례로 우리 가정 들에는 없어도 좋은 온갖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좋은 옷에 대한 탐욕이 없고, 좋은 옷을 입을 필요가 없는 사람은 옷에 관한 한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지하철 같은 데를 지나다 보면, 구걸하는 사람들이 지하 복도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손을 내밀고 있다. 저는 그렇게 편하게 앉아 볼 수 있었으면 할 때가 많다.

먹는 것도, 집에 갖고 있는 것도 다 마찬 가지이다. 작은 TV를 갖고 있으면 큰 것을 갖고 싶고, 나무 농장을 갖고 있으면 자개 농장을 갖고 싶고, 비닐 쇼파는 가죽 쇼파로 바꾸고 싶고, 방바닥에 자는 사람은 침대를 놓고 싶고... 사람은 다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소유욕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탈출하면 할수록, 더욱 더 큰 자유와 축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오늘 2절 말씀은“자기 수고의 댓가를 자기가 먹는 사람은 복되다.”고 말씀한다. 수고하고 그 댓가를 남에게 빼앗기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그러나 수고한 댓가만큼 그 열매를 자기가 거두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세상에는 자기가 일해도 다른 사람이 그 이익을 가로 채는 경우가 많다. 저는 이 나라의 중소기업들이 이러한 피해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이러한 억울함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기업이나 재벌들이 수 백억, 수 천억원 씩을 빼돌리거나 부도를 내거나 할 때는, 정말 견디기 힘들 정도의 분노를 느낀다. 회사가 부도 나는 것이 대부분 경영자의 사리 사욕과 축재, 비리가 원인이기 때문이다.

 

한 해에 우리 나라에 공중 전화에서 그냥 거두어 들이는 낙전 수입이 약 250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공중 전화기를 쓸 때마다 2-3년 전 만해도 청색 전화기는 10원짜리 아니면 100원짜리를 써야 하기 때문에, 80원은 고스란히 날아 간다. 지금도 60원은 회수할 수가 없다. 도대체 이런 전화기를 공용으로 허가한 당국의 처사나 납품한 회사나 속이 뻔히 보인다는 생각이 들어 분노를 금치 못한다.

1조원이니 2조원이니 하는 석유 기금을 그냥 방치해 둔다느니, 정치 자금으로 변통한다느니 하는 이야기, 년간 1 조원 이상의 교통 범칙금 수입이 거의 다른 영역으로 빠져 나간다는 이야기 등등을 듣고 있으면 저절로 혈기가 달아 오른다.

공평한 사회는 수고한 만큼의 댓가가 충분히 지불되는 사회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그러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일한 만큼 댓가를 받을 수 있어야 사람이 살 맛이 나는 법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이상적인 교회는 모든 직능과 직제가 세분화 되어 모든 사람이 업무와 충성의 양을 균등히 분담하는 교회이다. 예를 들어, 교회 교육 사항은 교육위원회로, 전도나 선교에 관한 사항은 선교위원회로 철저히 나누어지는 식이다.

모든 정책을 당회에서 다 심의할 수 없다. 큰 일들만 당회가 처리하고 세부적인 사항은 각 기관들에게 자율권과 재량권을 대폭 할애하는 교회, 이러한 교회가 가장 이상적인 교회이다. 위 아래가 물 흐르듯 순리로 흘러 가야 모든 일들이 제대로 이가 들어 맞고 풀려 나가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이런 점에서 참으로 모범적이다.

아름다운 가정은 가장의 전권이 무자비하게 휘둘러지는 가정이 아니라, 온 가족의 목소리가 합창을 발하는 가정이다. 사회나 가정이나 개인이 자기 몫을 자기가 챙길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세상이다.

오늘 2절 말씀은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가정과 사회는 바로 이렇게 정당한 수고의 댓가를 충분히 누리며, 축복을 향유하며 산다는 것이다. 자신의 수고와 염려, 그리고 기도의 열매들을 남에게 다 빼앗겨 버리고 무익하게 살아 가는 것은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일이다. 우리는 이렇게 되지 말아야 한다. 그 비결은 온전히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있다.

학생은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한다. 열심히 공부한 학생에게는 장학금이 주어진다. 이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반대가 되어 장학금을 타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면 이것은 공부가 벌써 수단화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식의 공부는 잘못된 것이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 신앙을 단순한 수단이나 도구로 사용한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 자세는 근본이 바로 되어 있는 자세이다.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찌돼도 좋다고 생각하는 신앙이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죤 웨슬레는 형제 자매가 자그마치 19명이었다. 그 부친은 성공회 신부였는데, 항상 가난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떤 때는 빚을 갚지 못하여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웨슬레의 집은 항상 먹을 것이 부족했다. 그러나 이들의 어머니 수잔나의 가정 교육은 성공하여 죤 웨슬레와 챨스 웨슬레와 같은 위대한 인물을 배출했다. 그들은 복음 전도자로서, 감리교의 창시자로서, 청빈하게 살며, 가난한 자들을 돕는데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부정직한 물질의 풍요는 가정의 파탄과 사회 붕괴와 인간 파멸을 가져 온다. 그러나 정직한 가난은 우리에게 복이 되고, 사회에 빛을 비추며, 사람의 영혼을 살찌게 한다. 본문 2 절 말씀은 이렇게 우리가 정직하게,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하여 살 것을 명령하신다. 그 정직한 열매를 또한 거두며 살 것을 말씀하신다.

 

 

3-4절은,“네 집 안방의 아내는 푸짐한 포도알 같고, 밥상에 들러 앉은 네 자식들은 올리브 나무 햇순과 같구나.”말씀한다.

여호와를 섬기며, 성실하고 가난하게 살면서도 아름다운 덕의 열매를 가득 맺는 아내를 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지, 비록 좋은 옷을 입지는 못하고, 좋은 음식을 포식하지는 못해도 믿음으로 티 없이 자라 나는 자식들이 가득한 가정은 얼마나 든든한지...이 축복을 알아야 한다고 주님은 오늘 말씀하신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병든 포도나무 같은 아내들이 많다. 가정을 이탈하는 여인, 춤 바람으로 탈선하는 여인, 사치와 유흥에 넋을 잃은 여인, 심지어 남편을 정부와 짜고서 살해하는 여인들이 가득 찬 세상이 되었다. 아내들이 이러할진데, 남편 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순수하고 건강하게 자라야 할 청소년들이 타락된 이성 교제와 방종과 사치와 마약과 음란과 사탄 문화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비행 청소년, 범죄 청소년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가고 있다. 이제 술, 담배는 중고교생에게는 더 이상 단속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 모든 타락 현상은 타락한 가정에서부터 비롯된다.

 

빅토르 위고는“집은 나무와 돌, 타일과 기둥과 석가레로 짓지만, 가정은 천년 가는 사랑의 행동으로 짓는다.”고 했다.

가정은 사랑의 산물이다. 자녀는 사랑의 선물이다. 부부의 사랑이 자녀를 낳게 하고, 자라게 하고, 성숙하게 한다. 부부의 참 사랑이 없으면, 자녀 양육은 불가능 하다. 피차 존중하고 사랑할 때에 가정은 화목하게 되고, 자녀는 정상적으로 자라 나게 된다. 이러한 가정들로 구성된 사회라야 비로소 건전한 사회가 된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자녀의 인생을 부모가 강요해서는 아니된다. 소유의식, 노후 의탁 정신 등을 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위탁 받은 선물로서 자녀를 정성껏 양육해야 한다. 이러한 올바른 가족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은 성숙해 가는 것이다.

 

누군가는 오늘날 기독교 가정들의 병을 다음 4가지로 진단했다.

1>.가정에 영적인 분위기가 없다. 믿는 가정의 모습이 전혀 나타 나지 않는다.

2>.식구들이 제각기 이기적이다. 가정의 화목하고 따뜻한 분위기, 부부 간의 신뢰와 사랑, 자녀와 부모간의 깊은 대화가 전혀 없다.

3>.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자라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고, 가구나 장만하고, 자기 가정 하나 잘 사는데 모든 힘과 재물과 정성을 다 투자한다.

4>.자기 가족만 생각하고, 남이나 이웃은 전혀 돌아 보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 가정들의 위기 상황이다. 성도 여러분의 가정을 한번 돌아 보시기 바란다.

 

어느 가정에 8살 난 똑똑한 아들이 있었다. 하루 아침에는 식탁 위의 어머니 자리에 아들이 보낸 청구서가 한 장 놓여져 있었다.

“어머니는 브래들리에게 빚이 있습니다. 심부름 값 25 센트, 착한 일한 댓가 10 센트, 음악 교수 비용 15 센트, 기타 5 센트, 합계 55 센트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메모를 본 어머니는 미소를 짓고는, 아무 말 없이 점심 식탁 위에 아들이 청구한 55 센트와 한 장의 메모지를 남겨 놓았다.

“브래들리의 빚을 다 갚는다. 그러나 엄마는 브래들리에게 한번도 빚을 청구한 적이 없었다. 네가 열병이 났을 때 간호한 댓가, 너에게 항상 잘 해 준 댓가, 옷과 신발과 장남감을 사준 댓가, 너의 놀이 방을 꾸며 준 댓가, 너의 식사를 지금까지 준비해 온 댓가, 너를 위해 밤낮으로 기도한 댓가 ...

 

여러분! 이러한 가정이면, 이러한 어머니가 있으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행복한 가정이 아닌가?

오늘 우리 믿는 부모님들은 자녀를 너무 이기적으로 키우고 있다. 불신과 이기심과 독선으로 똘똘 뭉쳐 지도록 자녀를 키우고 있다.“남을 이기고, 남을 죽여야, 네가 살아 남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가정이 인생의 방향과 삶의 질을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잘못 되었다. 이제 우리는 진실로 성숙한 삶을 살고, 자녀에게도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부모가 자녀를 바로 양육하고, 자녀가 부모를 공경할 때 비로소 그 가족들은 성실해지고, 진실해지고, 아름다워지며, 행복한 사람으로 자라 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 가정이 잘 되고, 성도로서의 우리의 삶이 축복되기 위해서는 진실로 여호와 하나님 경외하기를 성실히 해야 한다. 건성으로 주를 믿지 말아야 한다. 온 가족이 생동적으로 믿음 생활, 교회 생활해야 한다.

 

본문 5절 말씀은“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했다.

하나님은 교회에서 우리에게 축복을 선사하신다. 교회 생활이 내면적으로 훌륭한 분은 그 삶도 반드시 축복되게 되어 있다. 교회 부흥은 곧 개인과 가정의 성장과 축복과 영달과 직결되어 있다.

우리들의 가정을 부정적 오염으로부터 막아 내야 한다. 우리의 가정들을 사회로부터 받은 온갖 부정적인 상처를 치유하는 믿음과 사랑의 병원이 되게 해야 한다. 적극적인 신앙으로 행복을 창조하는 가정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사명이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에게 있다.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이 성도 여러분의 가정과 부모님과 자녀들에게 차고 넘치시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