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과교제

히틀러에 대한 모든 것

열려라 에바다 2024. 1. 15. 11:03

(1) 히틀러의 
 
아돌프는 1889년 4월 20일 독일 국경 근처의 작은 오스트리아 마을 [브라우나우]에서 태어났다. 그는 42세의 세관 공무원 [알로이스 히틀러]와 그의 부인 [클라라]의 네번째 자녀 였다. 아버지 알로이즈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직업 공무언이 되기를 바랬지만 [린츠]실업중학교 시절 히틀러는 성적부진으로 한학년을 낙제하기도 해서 아버지를 실망시켰다.
그가 14세 때 부친 알로이스가 죽었다. 그는 평소의 희망이었던 화가가 되기 위해 고향린츠를 떠나[비인]으러 간다. 하지만 비인의 미술하교 입학시험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셨고, 18세가 되던 해에는 어머니마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913년에 비인생활을 청산하고 독일의 [뭔헨]으로 이주한다.
1914년, 25세로 독일 국적을 얻게 된 그는 술과 담배를 입에도 대지 않고 여자에 대해서도 전혀 흥미가 없다는 몇 가지 이례적인점을 뺀다면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한 청년이었다.

 마침내 1차대전이 발발하자 제16바이에른 보병연대에 자원입대한다. 연대의 연락병이었던 그는 세차례나 부상을 당하며 사병으로서는 극히 이례적으로 1급 철십자 훈장을 받는다. 파세바르크 육군병원에서 종전을 맞은 히틀러 하사는 군대에 남기를 원했고, 그에게 맡겨진 직책은 군소 정치단체들의 동향을 체크하여 보고하는 정보관계의 임무였다.
그 과정에서 [독일사회주의 노동당]이라는 작은 정당에 55번째 당원으로 입당했고, 군에서 제대하다.

1923년, 허약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중앙정부와 바이에른 주정부사이에 심각한 불화가 닥쳐왔을 때 나치당은 이미 바리에른 주에서는 꽤 세력을 굳힌 정당으로 성장해 있었고 히틀러는 이것이야말로 자신에게 찾아온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11월 8일 바이에른 주정부의 관료들을 맥주홀에 몰아놓고 바이에른 주의 독립과 남부독일 공화국을 구성할 것을 선언한다. 하지만 이 [국가 전복기도]는 단 하룻밤사이에 끝나 버린다. 
이틀 뒤에 체포된 히틀러는 국가반역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다. 재판과정에서 그는 타고난 웅변으로 독이국민들을 도탄에 빠트린 공화국 정부의 '매국행위'를 성토하고 조국 독일과 민중에 대한 자신의 '한없는 사랑'을 열렬히 피력한다. 재판이 끝나자 아돌프는 이미 바이에른에서만이 아니라 전 독일에서 유명한 애국자요, 영웅이 되어 있었다.

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렌츠베르크] 형무소에 수감되지만 9개월 만에 석방된다.
1932년 선거에서 히틀러는 대통령에 출마 37%의 득표를 얻음으로써 57%의 지지를 얻은 전임 [힌덴부르크]대통령에 밀려 낙선한다. 하지만 그해 7월 최근 5개월 사이에 벌써 세번째로 실시되는 총선거에서 나치당은 230석의 국회의석을 얻어 제1당으로 부상한다. 그에 따라 1933년 1월 히틀러는 수상에 임명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8월 2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따난다. 이에 히틀러는 사상과 대통령의 권한을 양손에 거머쥔 강력한 지도자 - 총통[fuhrer] - 이 탄생한 것이다.

오스트리아인으로 태어났으면서도 독일을 더 좋아해서 젊은 시절에는 자신이 바이에른 토박이처럼 보이기 위해 열심히 그 지방의 사투리를 익히기 위해 애썼고, 독일 의 최고 권력자가 된 다음에 가장 먼저 실행한 일은 자신의 모국을 독일에 합병시키는 것이었다.
혈통이나 지연, 학벌 등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미천한 출신 배경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진 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이용할 줄 아는 교활함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평생토록 일관 되게 간직했던 지배민족 이론에 따르면 "켈트족과 라틴족, 기타 잡다한 열등인종들의  잡종"에 불과한 영국에 대해서 "그들과 세계를 절반씩 나누어 가질 용의"까지 피력할만큼 영국인의 함리성과 이성을 높이 평가했고, 특히 영국수상 [윈스턴 처어칠]은 평생에 걸친 자신의 개인적인 라이절 쯤으로 간주했다.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자신의 생활은 더없이 소박하고 검소했으며, 기라성 같은 프로이센 귀족출신의 장군들을 휘하에 거느리게 된 다음에도 1차대전 당시 자신이 착용 했던 사병용 군복과 거기에 달린 1급 철십자 훈장 을 가장 자랑스러워했다.

알려진 바와 달리 그는 수백만의 인간을 단숨에 휘어잡는 뛰어난 웅변가는 아니었다고 한다. 오리려 말투는 어눌한 편이었고, 오스트리아 사투리가 심했으며, 목소리조치 새되어 듣기에 거북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힘이 있었고, 간단명료했으며, 무엇보다도 잘 들렸다. 그는 이 연설에 의지하여 권력의 정상 까지 올라섰고, 전 독일군민을 휘어잡아 그들을 죽음의 전선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그리고 마치내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의 지하 방공호에서 울려퍼진 한발의 총성과 함께 현실과 공상, 광기와 이성 삶과 죽음이 상항 사이좋게 공존했던 이 사나이의 모순으로 가득찬 생애가 끝났을 때 그의 나이는 56세 , 집권 11년을 맞고 있었다. 

(2) 나치스(Nazis)

 

1. 나치즘
나치즘이란 히틀러를 당수로 하는 독일의 파시스트 당 '나치스'의 정치 사상 및 체제를 말한다. 나치 리더쉽은 2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6년여에 걸친 대전의 전 기간에 걸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나치 사상은 향후 세계 강대국과의 대결을 위해 독일 영토 내에서의 새로운 사회 질서 구축을 목표로 하였다. 즉 나치 이념은 인종적, 생물학적 특징에 상당한 주안점을 두면서 오직 타 인종이나 국가와의 투쟁을 통해서만 위대한 독일제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쇼비니즘(광신적 애국주의, 일종의 극우사상)에 기초한 사상이었다.

로젠베르크에 따르면 그들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가치를 배격하였으며 대신에 새로운 권위주의 엘리트들에 의한 일사불란한 지배체제를 열렬히 옹호하였다. 이들의 사상은 당시 유럽 대륙 전체에 퍼진 문화적 비관주의-부르주아라 불리는 중상계급에 의해 지배되는 유럽대륙의 운명은 암울하며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에 그 기초를 두고 있었다. 나치 사상가들은 인간세계를 자연의 세계와 같이 적자생존의 법칙(Survival of The Fittest)이 지배하는 체제를 Darwinian Jungle로 보았으며 우세한 문화나 인종만이 다른 문화나 인종과의 끊임없는 투쟁을 거쳐 생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또한 선택된 인종이 이러한 투쟁에서 승리하려면 반드시 충분한 거주영역(Lebensraum, Living Space)을 확보하여야만 한다는 지리적 편견에도 사로잡혀 있었다. 이러한 거주영역의 획득은 인구와 영토의 적절한 균형을 의미하며 내부적 쇠퇴를 막을 수 있는 확실한 수단으로 각광을 받았는데 히틀러가 옥중에서 저술한 "나의 투쟁(Mein Kampf, My Strife)"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정치사상과 함께 인종적 관점도 나치세계관Weltanschauung에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자연에서와 같이 역사도 끊임없이 지속되는 인종간 투쟁의 과정이라고 보았으며 독일 민족의 적은 모든 인종의 적이며, 혼돈과 불행을 가져오며, 국가의 활력을 빨아먹으며 기생하는 유태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유태인과 독일민족과의 마지막 투쟁을 그릇된 세계역사를 올바르게 되돌리는 장으로 간주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의 몰락을 보상하는 기회로 여겼다. 히틀러는 또한 유태인 외의 다른 인종, 특히 슬라브족The Slav과의 투쟁도 배제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이러한 인종적 편견에 대한 유효한 수단을 제공을 목적으로 독일 내에서 인종적으로 부적격 판정자들(동성애자. 매춘부, 장애자. 정신병자)들을 일소하기 위해 안락사Euthanasia프로그램, 폭력에 기초한 생물학적 정치체제의 추구 등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였다. 독일 내 유태인에 대해서는 사회로부터의 격리(흔히 유태인 집단 거주지역은 게토(Guetto)로 불리운다.)시킨다거나 시민권의 박탈, 대전 중에는 인종적 말살을 위한 대량학살The Holocaust의 조치가 취해졌다.

나치의 인종적 관점은 필연적으로 대외적 투쟁뿐만 아니라 내부적 인종의 순수성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치 지도자들은 전쟁을 독일민족의 인종적 활력을 유지하기 위한 시험장으로 보았으며, 他인종과의 투쟁은 역사적으로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히틀러에 의하면 "인류는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서만 진화할 수 있으며, 항구적 평화 하에서는 쇠퇴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역사가들은 나치 이데올로기의 의의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였다. 몇몇 역사가들에 따르면, 나치 이데올로기는 단지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의해 형성된 기회주의적 정치선전(Propaganda)에 불과하다고 보았고 실제적으로 이념적 목표와 사회적 또는 군사적 현실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존재하였다.

나치 이데올로기는 독일의 정치, 군사적 선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또한 나치 정책 구상과 수행에 광범위한 이념적 틀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독일인에게 나치당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였고, 나치당에 반대하는 자들은 폭력으로 응징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나치 이데올로기는 정복과 학살로 점철된 전쟁을 합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나치스<Nazis>
히틀러를 당수로 하여 1933~45년 정권을 장악한 독일의 파시즘 정당. 정식 명칭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NSDAP)이다. 나치스란 원래 정적(政敵)들이 만들어 낸, 얕잡아 부른 명칭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이 말이 전세계의 통칭이 되었다.

19세기 말엽 유럽에 일반적으로 공통되어 있던 반(反)유대주의·백색인종지상주의·국가주의·제국주의 및 반(反)사회주의와 반(反)민주주의 사상을 기초로 하여 발생하였다. 중심이론은 독일민족지상주의와 인종론이다. 즉, 게르만족은 인류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종족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을 지배할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이와 반대로 가장 열등하고 해악적인 인종은 유대인으로, 그들은 아무리 환경을 개선하고 교육을 실시하더라도 그들의 천성적인 열등성과 해악성은 개선되지 않으며, 항상 주위환경을 부패시키거나 또는 해악을 만연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우수한 민족은 그들의 열악성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을 격리시키거나 또는 절멸시켜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본래 나치스의 근본사상은 국가주의적 경향, 중산계급과 지식인의 반민주주의적·권위주의적·민족주의적 경향, 특히 군부·관료·경영진·교회·교육계 등 사회 일반에 통하는 권위주의적·군국주의적 전통과 강렬한 국가주의 사상이었고, 나치스의 지지자로서는 항상 몰락의 위협을 받고 있던 중산계급이 중심이었으며, 거기에 다시 군인으로 복원된 병사·장교와 중소농민, 노동조합에 불만을 품은 노동자·점원·실업자 등이 참가하여 나치스의 대중적 기초를 이루었다. 또한, 대자본가층이나 보수파 및 군부 등도 나치스와 공통의 목적, 즉 계급투쟁의 배격, 강대한 독일의 건설, 군비의 대확장과 군국주의적 국가건설, 독재정치의 수립, 경제발전, 민주공화제의 전복, 독일의 유럽 제패 등의 주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치스를 지지하였다.

1919년 1월 안톤 드렉슬러에 의하여 독일노동자당이 결성되고, 1920년 2월 24일 대중집회를 열어 25개조의 당강령을 공포하였다. 21년 7월 임시당대회에서 히틀러의 독재적인 지위가 확립되었고, 당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 국내의 혼란을 틈타 남부독일의 바이에른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그것은 바이에른의 군부와 보수왕당파 및 대자본가 등이 후원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힘입은 히틀러는 23년 11월 8일 바이에른 보수왕당파와 군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서 독재제도를 수립하려고 공화정부와 맞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때는 시기가 일러 군부·경찰·관료 등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으며, 이로 인하여 당도 한때 금지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당은 25년 2월 재건되었으며, 그 후 히틀러는 합법주의를 지키면서 히틀러-유겐트(Hitler-Jugend:나치스청년단)·나치스학생동맹·나치스돌격대(SA) 등 대중조직을 발전시켜 독일의 국민적 전통과 민족주의적 풍조에 합치하는 대중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특히 사회주의적 슬로건을 강조하였다.

세계적 경제공황의 혼란기에 국민의 다수가 나치스의 힘에 의하여 강대한 독일을 재건하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지지를 받아 독일의 제1당이 되었다. 이때부터 군부와 대자본가, 각종 압력단체·관료 층 및 농업계까지도 나치스를 지지하게 되었으며, 진정한 뜻으로의 반(反)나치스파로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청년부 등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 마침내 합법적인 총리로 임명되어 독일 제3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독일의 관료층·군부층·경영진·압력단체 등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나치스의 정권획득은 기정사실이 된 것을 의미하였다. 국내 각 방면 유력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은 히틀러는 보다 강력하게 경제적·정치적 시책을 감행하여 나갔다.

1933년 초 600만 명을 넘었던 실업자들을 군수산업과 토목사업에 거의 흡수시켰으며, 농업면에서는 세습 농장법을 제정하여 대농과 중농을 보호하였고, 또한 식량의 자급 자족화를 도모하였다. 공업면에서는 인조석유·인조고무를 비롯하여 대용품 생산에 힘을 기울였으며, 종래의 노동조합을 폐지시키고 노동자를 자본가·기술자 등과 함께 새로 조직된 독일노동전선에 가입하게 하였다.

정치면에서는 1당 독재를 실시하였으며, 나치스친위대(SS)를 강화하고, 비밀경찰로 하여금 정보를 위한 기관으로서 전국민을 감시하게 하였다. 또한 유대인·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를 강제수용소에 수용시켜 혹독한 학대와 살육을 자행하였다. 교회·군대·학교 등도 나치스식으로 획일화시키고 일반 국민도 나치스 신봉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반(反)나치스 저항운동은 1936년이 되자 거의 그 자취를 감추었다.

국제관계에서는 1933년 10월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1935년 1월 자르지방의 인민투표에서 승리하여 이 지방을 독일영토로 복귀시켰으며, 3월 국민징병제를 채용·실시하여 육군을 일시에 5배로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6월에는 영국-독일해군협정 체결에 의해서 해군도 4배로 증강하였다. 36년 3월 독일군을 라인 비무장지대로 진주시켜 독일-프랑스 국경지대를 요새화하였다. 이처럼 독일의 실력이 유럽세계를 제압하게 되자 독일국민의 나치스에 대한 신뢰도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실력을 배경으로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강제적으로 독일에 병합시키고, 10월 체코의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합병시켰으며, 이어 1939년 3월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정복하여 독일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히틀러는 여세를 몰아, 9월 폴란드에 단치히 자유시(自由市)를 독일에 반환할 것과 동(東)프로이센과 독일 본토를 연결하기 위하여 폴란드령 포메른을 경유하는 치외법권적인 도로와 철도의 건설을 인가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폴란드로부터 거절당하였기 때문에 폴란드 침입을 감행하였으며,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나치스는 폴란드와 구소련을 멸망시키고 그 지방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종족인 게르만족의 생존권(生存圈)으로 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었다. 나치스는 45년 패전으로 연합군에 의하여 금지되고, 그 금지조치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가져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