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스크랩 덕을 세우는 신앙생활(고전7:29-31)

열려라 에바다 2024. 1. 20. 14:31

덕을 세우는 신앙생활:고전 7:29-31(권호만 목사)

 

오늘도 주현절 후 세 번째 주일 예배에 참석하신 성도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제 친구목사가 공군 군목으로 강릉에 있는 전투비행단에 근무했을 때,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의 일입니다만 그 부대 사령관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는지 봉사할 일거리를 달라고 해서 예배시간 전에 주보를 나눠주라고 했답니다.

최고 지휘관이 정복을 입고 들어오는 병사들에게 인사를 하며

주보를 나눠주니까 병사들이 어떻게 할 줄 몰라 하더랍니다.

사령관이 교회에 나오고 주보까지 나눠주니까 자연스럽게 부대가

복음화가 되고 교회가 차고 넘치고 부대 분위기도 좋아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높은 계급을 갖고 있어도 없는 자 같이 섬길 때 하나님의 영광도 나타나고 자기 자신도 존경받는 멋진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고 합니다.

보통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일이 있거나 기쁘고 행복한 일이 있으면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고 알리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고 남보다 더 뛰어난 존재인 것을

나타내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이유는 물론 안전도 있지만

자기의 부함을 과시하고 싶어서입니다.

많은 돈을 들여서 묘지를 화려하게 쓰는 것도 사실은 자기의 부함을 과시하고 싶어서입니다.

목회자들이 입는 가운에 박사 표시를 하는 것도 자기의 학력을 자랑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모습을 보이지 말고 오히려 있는 자는 없는 것 같이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권면을 고린도교회에 하게 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1. 먼저, 그 교회에 많은 계층의 사람들이 출석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있었고 노예가 있었고 남자들이 있었고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이 함께 있었는데

문제는 이렇게 서로 다른 모습을 극복하지 못하고 교회에 커다란 문제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11장에 보면 성만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당시 만찬은 각자 집에서 음식을 갖고 와서 함께 먹는 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들이 자기들이 갖고 온 음식을 자기들끼리만 먹는 거예요.

가난해서 갖고 오지 못한 사람들은 부자들이 먹는 모습을 보면서

소외감을 느끼고 불평하게 되고 급기야 교회에 분쟁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에 대하여 사도는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려서 모든 사람이 함께 먹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33)

 

오늘 본문에서 제일 먼저 언급되는 사람이 아내 있는 자들입니다.

이 언급은 결혼을 하고 부부가 함께 출석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결혼을 하지 못하여 혼자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지금이야 결혼 안 한 것이 보통의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 때는 결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것이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못했고 노예 신분이라 못했고 그런 사람에게 딸을 주지 않아서 못했습니다.

하고는 싶은데 하지 못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부부가 함께 출석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부럽겠습니까?

그런데 부부가 교회에서도 꼭 같이 앉아서 자기들끼리만 소곤거리고 티를 낸다면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그런 자들을 향하여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30절 말씀을 보면, 우는 자들이 나오는데, 성서 주석가들은 우는 자들이

이혼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유부녀들로 보인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남편을 사랑하지만 남편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거룩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위해서 이혼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혼을 하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사랑하는 남편과 헤어져서 혼자 살아갈 생각을 하면 너무 슬퍼집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는 자들은 교회에서 울지 않는 자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이 많았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돈이 없는 노예나 서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바울 사도는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매매하는 자들은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반대로 노예는 자기 재산을 전혀 가질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배려하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권면의 핵심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내가 사업을 잘 해서 돈을 많이 벌고 번 돈을 내 수준에 맞게 쓰는데 이것이 무슨 잘못이냐

부부가 금실이 좋고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신앙인의 아름다운 모습이지

뭐가 잘못이냐?’ 고 항변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말이 절대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말이 덕이 있는 말인지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 여기에 사도 바울이 이런 권면을 하는 두 번째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더하라”(벧후1: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14장에서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26)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한결같은 교훈은 성도들이 옳은 모습으로만 살지 말고 덕스러운 모습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모습이 덕스러운 모습입니다.

욥을 찾아온 친구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고난을 받는다고 하면서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때 욥이 한 말은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입니다.

친구들의 말이 옳은 말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고통 중에 있는 욥을 위로하지는 못했습니다.

옳은 말이라고 함부로 아무 때나 하면 상대방을 더 고통스럽게 합니다.

옳은 말도 할 때가 있고 할 장소가 있습니다.

많은 돈을 갖고 있지만 없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조심하고 절제하는 것이

성도들의 덕스러운 모습이고 그런 모습을 보일 때 더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덕을 생각하며 덕스러운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형제자매 된 교회의 지체들을 실족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 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18:6-7)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8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음식을 먹는 문제를 결론지으면서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도는 자신의 믿음대로 살지 않고 덕을 도모하는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자신의 믿음대로 고기를 먹은 것이 아니라 형제에게 덕을 세우기 위하여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천하보다도 귀한 한 영혼을 실족하게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중요한 일을 위해서 우리는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금요 기도회 때 1시간 설교하는 동안 35분을 자기 자녀들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큰 아들은 서울대학을 나와서 미국유학을 다녀와서 지금은 대학교수를 하고 있다.

큰 딸은 미국유학중에 변호사 자격을 따서 미국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때가 한참 대학입시가 발표될 때였다는 것입니다.

그 교인들 중에는 자녀가 대학에 떨어져서 안타까워하고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이 되어서 기도회에 참석한 사람도 많았는데 목사님이 자기 자식들

자랑만 하고 있으니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 사회는 남을 배려하는 덕스러운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의 약점을 파고들어서 그들의 아픔을 들쳐 내는 모습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남을 배려하는 덕스러운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있는 자들은 없는 자들을, 없는 자들은 있는 자들을 배려해야 하고

건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배려해야 하고 비장애인은 장애인들을 배려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를 좀 더 살기 좋고 아름다운 사회로 만드는 비결입니다.

교우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에서부터 먼저 배우고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비결을 배우고 실천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3. 세 번째로, 이런 모습을 실천해야 할 이유가 주님이 오실 날이 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9절에 보면,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했고,

31절에서는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말은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는데

그때가 단축하여 졌다는 말은 주님이 재림하실 날이 가까웠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그 때는 이 세상에서 보이는 외적인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외형은 지나가 버리고 남는 것은 오직 믿음과 사랑과 소망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교훈을 주시는 이유는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교인들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그대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어진다.’는 임박한 종말 의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당연히 사도 바울도 이런 종말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생각처럼 빨리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종말이 속히 오리라는 2천 년 전 당시 예수님의 가르침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종말이 속히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예수님이 종말은 지금부터 2천년이나 지나서

먼 미래에 올 것이다.’ 라고 가르치셨다면 그것은 옳은 가르침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종말론적인 재림은 오지 않았지만

개인적인 종말은 곧 닥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사도 바울 그리고 많은 초대교회성도들은 임박한 종말의식을 갖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에게도 이런 임박한 종말의식이 필요합니다.

종말의 때와 시간을 정하는 시한부 종말론자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종말은 언제든지 임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임박한 종말의식을 갖고 사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임박한 종말 의식을 갖고 있었기에 사도 바울은

"이제부터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라"고 말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되, 아내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라"고 말합니다.

슬픈 일을 만났을 때, 그것으로 세상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라"고 말합니다.

좋은 일이 생겼다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교만해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라"고 말합니다.

물질에 사로잡혀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라"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전부로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모든 것들은 다 사라져버릴 것이기에 그것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위의 말씀은, 얼마든지 우리의 현실에서 연장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갔을 때 세상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어떤 사고를 만났다고 마치 인생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기치 않은 질병이, 심각한 질병이 발견되었을 때,

마치 온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재림과 함께 영원한 하늘나라의 축복 속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마지막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더 행복하고 더 건강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세상의 외형은 지나간다는 말씀을 꼭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것 때문에 진정 중요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지 못한다든지 이런 것 때문에

더 중요한 가치를 잃어버리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잘못 사는 것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더 가치가 있는지를 알아서 그 중요한 가치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미국의 한 학교에서 한 여학생이 암에 걸려 투병을 하다가 완치판정을 받고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출석하는 날 이 학생은 자신의 머리가 밀어져서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친구들이 머리카락이 없다고 놀리면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 가보니까 같은 반 친구들이 전부 머리를 밀고 있었습니다.

같은 반 학생들은 머리털이 없이 와서 걱정할 친구를 위해 모두가 그와 같은 모습을 한 것입니다.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없어도 있는 것처럼 남을 배려하며 살아갈 때 교회와 사회는 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여전도회 회원 여러분,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덕스러운 신앙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교회를 더욱 화목하고

아름답게 세워가는 회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이런 모습을 신앙생활을 하시고 그래서 주님의 재림을 잘 준비하는 삶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4.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