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편 1절-3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부패’란 변질이 되어서 썩는 것, 썩은 것, 썩어가는 것. 음식만 부패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정신도 부패하는 것이 있다. 사람에게 잘못된 정신이 들어가면 그 사람은 추해진다. 그러나 옳은 정신이 들어가면 사람이 생기가 있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건전하고, 도덕성이 좋아진다.
사람의 이런 특성을 다른 각도로 생각을 하면 사람은 생산성이 있어야 모든 면에 건설이 된다. 그런데 소비성으로만 사는 사람이 있다. 자기는 손가락 하나도 꼼짝하지 않고 순전히 남의 혜택으로만 사는 사람이 있다. 특히 기독교인의 경우를 보면 예를 들면 신학교도 다녔고 전도사라고 하면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 전도인의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전도사라고 하면서 그 면에 대한 일은 전혀 없고, 어느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자기가 전도사라는 것만 내세운다면 어느 목사가 이런 사람을 교회에 소개하겠느냐?
사람의 생각이 건설적이면 다른 사람을 살핌이 있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이런 게 나온다. 사람을 제쳐놓고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느냐? 일반적으로도 마음이 좋은 사람은 사람을 위하느냐, 개를 위하느냐? 사람을 무시하고 사람보다 개를 더 위한다면 남자 같으면 ‘개 같은 놈’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믿는 사람의 사고방식과 정신과 마음이 생산적이면 물론 믿음으로 하는 건데, 사람 보기에 좋도록 되어간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게 산다. 믿는 우리가 눈에 안 보이는 주님을 어떻게 섬기느냐? 형제 섬김이 나오고 교회 섬김이 나온다. 그러면 ‘나는 일을 잘 한다’ 이런 마음으로 하느냐? 아니다. ‘나 같은 사람을 불러주셔서 영원한 복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라는 마음으로 한다.
주님에게는 본분이 있고, 본성이 있고, 본질이 있고, 본능이 있다. 이게 다 진리에서 되는 거다. 믿는 내가 성질과 성분적으로 이런 사람이 되는 게 믿음이고, 이런 사람으로 되어서 내 몸을 움직이면 나의 몸이 의의 병기로 쓰여지는 거다. 내 몸이 의의 병기로 쓰여지는 것은 머리로만 되는 게 아니다.
내가 이런 면에서 “활동에 붙여서 ‘신앙이다. 아니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라고 말을 하면 이 말을 듣는 사람 중에 ‘그러면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거냐?’ 라고 말을 하기도 하는데, 진리신앙 사상은 생산적이고 생기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옳은 목적을 가지고 얼마든지 활동을 할 수 있는 거다. 자기가 진리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 활동적으로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다면 이건 자기 만들어지는 건 없다.
진리신앙을 받고 이 진리의 정신 사상으로 몸을 움직여 나가면, 앉고 서고 활동하는 모든 면에서 자기 감찰 자기 성찰이 들어간다면 이 사람은 규모가 바로 선다. 규모 있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통해 나타난다. 밤에 잠잘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런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말아라. 신앙은 사람을 통해서다. 신앙 믿음을 옳게 가지면 품행도 좋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들어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사람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띄워주는 교훈이다. 그 다음에는 성도 각자가 모든 봉사는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다. 아무리 진리의 교훈을 들어도 배운 진리를 가지고 사람에게 써먹지를 않는다면 자기 만들어지는 것은 없다. 이러면 가정이나 일상생활도 맨 그 모양이다. 진리교훈을 듣고 배운 진리를 일상생활에서 써먹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입만 살았고 이론만 바삭한 거다.
우리는 살아생전에 믿음생활로써 많은 사람 앞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러려면 교회의 살림도 살필 줄 알아야 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도 알아야 하고, 늘 자기를 성찰하는 것도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은 자기 집 가정도 잘 돌보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이런 사람을 세상 어디를 가도 무시하겠느냐?
‘저희는 부패하며.’ 이걸 신앙 사상적으로 보면 성화구원이 없이 세상적으로만 사는 게 부패한 거다.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산다면 이 사람은 부패되고 썩는 거다. 그의 정신이 그렇고, 그의 인격과 성품이 그렇고, 인격과 성품이 썩어져 가니, 즉 자꾸 세상으로 찌들어가니 그 가정도 세상으로 썩는 수밖에 없는 거다.
시궁창 속에는 썩은 게 많다. 시궁창에는 좋지 않은 물이 흐른다. 그리고 찌꺼기가 흘러가다가 바닥에 가라앉는다. 썩은 시궁창은 냄새도 고약하다. 날파리도 많다. 각종 해로운 것들이 서식하기 때문에 그 위에 아무리 깨끗한 물을 부어도 좋은 물이 될 수 없다. 깨끗하게 하려면 먼저 시궁창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퍼내고 청소를 해야 한다.
이 시궁창이 우리들에게 진리이치를 깨닫게 한다. 정신 면으로 보면 사람의 마음 속에 더러운 것이 들어있으면 이 사람에게서는 늘 썩고 부패한 것들만 나온다. 이런 사람은 어느 것이 산 정신이고, 어느 것이 죽은 정신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늘 죽은 정신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바로 사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
썩고 부패한 곳에 가면 그곳의 병이 묻어올 수도 있다. 그런 곳에 가봐야 아무 이득이 없다. 마찬가지로 썩고 부패한 사람들만 모이는 곳에서는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 그러니 그런 곳은 생산이 없는 낭비의 곳이요, 그곳에 사는 사람은 질이 낮아지기 마련이다.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가증한 악을 행한다는 것은 방자하여 도덕적으로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하는데, 법을 빙자하여 갈취하는 것, 신앙을 빙자하여 갈취하는 것, 성경을 빙자하여 하나님을 우상으로 믿게 하는 것, 신령한 영적인 복을 물질성적인 복으로 대치하는 것, 아가페 사랑을 인본주의 사랑으로 대치하는 것, 하나님의 것을 인간의 것으로 대치하는 것 등을 말한다. 뭘 가지고? 성경을 가지고 예수이름을 이용해서 세상 것을 가르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것인 양 바꿔친다. 마귀의 수법이 이런 거고, 거짓 종들의 수법이 이렇다. 악한 자들이다.
기독교 안에 가증한 종들이 많다. 성경을 빙자하여 교인들에게 세상의 것을 가르치고, 세상의 것을 가지도록 해서 심판을 받게 한다. 이렇게 할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영의 눈이 밝은 사람만 아는 거지 늘 ‘복 복’ 하는 사람은 절대로 알지 못한다.
기독교 TV를 보니까 어느 목사님이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라고 하면서 ‘지금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 몇 십억이 생겼는데 그 후손 중에 누구는 무슨 직을 가졌고, 누구는 무슨 일을 하고’ 라면 말하면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을 육적인 복으로 말을 했다. 이렇게 말을 하게 되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복은 없어져 버렸다. 그 말대로라면 안 믿는 사람들이나 이방 종교인들은 세상 복을 안 가졌느냐? 가졌다. 그러니 이런 말은 이치가 달라져 버린 거다.
기독교의 복은 이방 그 어느 종교에서도 받지 못하는 복이다. 물질적인 것은 예수를 믿건 이방신을 믿건 각자에 따라 많이 받고 덜 받고 하는 거지만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것으로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방 종교인들은 받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거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의 복을 세상 물질적인 것으로 말을 하는 것은 참 복을 놓친 거다. 이런 식의 가르침은 교인들의 정신 사상을 완전히 세상으로 돌아가게 하는 거짓 가르침이다. 이런 행태가 가증한 거다. 그런데 본인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기독교에서만 불쌍한 사람을 돌보는 게 아니라 이방 종교인이나 아무 신도 믿지 않는 사람도 선을 행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했을까? 왜 이 말씀을 했을까?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도 일반적으로 선을 행하고 있는데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했으니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우리는 그 뜻을 필히 연구하고 깨닫고 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 당신 자체가 선이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의사, 모든 활동, 모든 계획, 모든 역사의 진행이, 그리고 모든 결과가 다 선이다. 이런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징계를 한다거나 명령을 하는 것은 전부가 선에 목적을 두고 하시는 거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선이 아닌 악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자체적 본성적 선이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모든 것은 다 선의 발로에서 되어지는 거다. 선생님이 학생을 때릴 때 공부를 잘 하라고 때리는 거냐, 못 하라고 때리는 거냐? 잘 하라고 때리는 거다. 그러니 매를 맞으면 아프지만 그 선생님은 선의 마음으로 때리는 거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은 선하신 뜻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 궁극적 최종적으로 그 열매도 모두 선으로 맺혀진다. 따라서 믿는 우리가 이런 열매로 인해 누리는 누림도 선이요, 쾌락도 선이요, 향락도 선이요, 기쁨도 선이요, 즐거움도 선이요, 행복도 선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목적을 두고 우리를 이런 자로 만드는 선의 역사를 분초찰나 순간순간마다 진행을 하신다.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모든 인간들이 이것을 모른 채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자기 중심으로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시대마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가정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선을 찾기가 힘들다. 인간들이 선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전부가 자기 중심적 선이다. 하나님의 선이 인간 자기 것으로 되었다면 나에게도 선이고 너에게도 선이지만 자기 중심적 선은 자기는 좋은데 다른 사람에게는 안 맞는다. 결과적으로 안 맞는다.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선을 행하는 사람은, 성경이 옳다고 인정해 주는 선을 행하는 사람은 그 생각과 열매가 죽음 저 너머에 내려져 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선을 행했을 때 그 어떤 사람이 헐뜯더라도 ‘몰라서 그러는구나. 못 깨달아서 그러는구나’ 라고 하면서 상관하지 않는다. 진리의 목사가 자기를 야단을 하고 책망을 할 때는 너의 이룰구원 면을 염려해서 하는 것이니 감사함으로 받아라.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을 통해서도 받을 줄 알아라.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사람들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이 천차만별이다. 세계적으로는 그만두고라도 한 나라의 법관들도 천차만별이다. 우리가 볼 때는 있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 같은데 변호사와 검사가 대립을 한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누가 봐도 죄를 지은 것이 빤한데도 이 사람을 맡은 변호사는 죄가 아니라고 하기도 한다. 세상은 그런 곳이다. 그러니 세상에서 선을 찾으려고 하지 말아라.
타락한 세상은 각자가 자기에게 맞으면 선이라고 하고, 맞지 않으면 나쁘다고 한다. 정확한 선의 기준이 없다. 그리고 자기가 선이라고 하던 것도 시간이 지나면 악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린아이 때의 선의 기준과, 학생 때의 선의 기준과, 청년 때의 선의 기준과, 어른이 됐을 때의 선의 기준이 다르다.
세상에는 선의 기준이 명확하지를 않다. 선의 기준이 없다. 법정에서 판사가 ‘선이다. 악이다’ 라고 판결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이 아니다. 세계 모든 나라의 재판관이 다 선이라고 판결을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인 선이 아니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선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을 행해야 한다.
먼저 하나님의 선을 찾고 그것을 내 것으로 삼으면 이 사람의 모든 언행심사가 선이요, 선의 질이 된다. 이 사람은 행동이 나오기 전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모든 사고방식도 선이다. 이런 상태에서 행동이 나오는 것은 선행이다. 이 사람이 매를 때려도 선, 도와줘도 선, 책망을 해도 선, 칭찬을 해도 선이다. 이 사람이 이렇게 하는 모든 것은 영원 궁극적인 구원에 내려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이 이렇게 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선한 일들이 나오고, 영원 궁극적 구원의 일에 협조 동참이 나오고, 자원이 나오고, 선의 열매가 나온다. 하나님의 선의 사람으로 되느니만큼 소원도 목적도 선이요, 활동도 선이요, 가치판단 평가성도 영원한 효력을 지닌 하나님과 같은 선이다. 하나님과 같은 사고방식의 선이다. 이런 사람이 되라고 우리들에게 성경을 준 거고 깨닫게 하는 거다.
성경을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중에 우리 인간에게만 줬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정신을, 지혜지식을 성경에서 배우고 깨달아서 인격과 성품이 하나님의 선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선의 사람이 되면 행동만이 아니라 모든 사고방식, 모든 일에 세밀히 관찰이 들어간다. 왜냐? 선의 사람으로 살려니까, 선한 행동을 하려니까 관찰이 들어가는 거다.
사람이 세상을 사는 게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일하러 가고 하는 게 다냐? 그렇지 않다. 사람과의 관계성이라는 게 물질관계, 행동 활동관계, 말 관계, 약속 관계 등등 얼마나 복잡한지? 성경은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을 찾고 하나님의 선의 사람이 되라고 하는데 오늘날 기독자들은 이것을 싫어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선을 찾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에게 선을 행함이 있어야 하는데 사람에게 나타내지는 않고 말로만 한다면 이게 하나님의 선이냐? 이것도 문제다.
우리교회에서나 이런 얘기를 하지 목사나 교인들이 하나님의 선을 아느냐? 오늘날 교회에서 가견적인 인본주의 사랑을 하나님의 선으로 대체해 놓고 이것이 하나님의 선이라고 주장을 한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가견적이고 물질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선을 하나님의 선이라고 하니 이로 인해 성도들의 마음이 세상을 향하게 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할 말이냐? 이런 말이 보좌로부터 나오는 소리냐? 이건 가증한 소리다. 악하다.
2절: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하나님께서 인생을 굽어 살피시는데, 무엇을 살피느냐?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를 찾고 있다. 하나님은 ‘척’ 하면 ‘짱’ 하고 다 아는 분이다. 창세 이후로 인간이 수백억이 넘겠지만 지금까지, 또는 마지막 그 날까지 동시성으로 한꺼번에 아신다. 그런데 왜 이런 표현을 하는 거냐?
‘지각’이 무엇이냐?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이방 세상사람들 입장에서 말하는 ‘지각’이란 세상학문이나 지식을 많이 배워서 사물의 이치를 잘 알고 거기에 대처를 잘 하는 것을 말한다. 신앙 면에서 성경으로 보는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지각’이란 신앙정신 사상이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자기 목숨보다 더 중히 여기며 천국을 천국만큼 바로 알고, 세상을 세상만큼 바로 알아서 세상의 그 어떤 사건 환경도 미리 미리 대비하여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신앙 믿음의 실력을 키우는 것을 ‘지각’이라고 한다.
믿는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해야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늘 상고하는 사람은 앞으로 가면 갈수록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길을 여신다. 나는 이걸 믿는다. ‘처음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렇게 된다. 그러면 이렇게 산다고 해서 일도 못하고 못 먹고 못 사는 거냐? 그렇지를 않다. 그러나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찮게 여긴다면 살아있는 동안 잘 먹고 잘 살 런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두고두고 그만큼의 역사를 하신다. 이걸 분명히 알아라.
자기가 잘 되기를 바라느냐?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되고 싶으냐? 아브라함이나 나나 같은 사람인데 아브라함은 되고 나는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 그런데 목사 집안이던, 집사 집안이던, 장로 집안이던, 평신도 집안이던 자기가 된 것만큼 성경을 가까이 하거나 내팽개치거나 한다. 그러면 자기가 하는 그만큼 자기 앞길이 열리고 닫히고 하는 거다. 이걸 절대로 우습게보지 말아라.
3절: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늘 상고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성도의 자세요 삶인데 이렇게 하는 자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교회는 어떠냐? 우리교회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자기 마음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자기 생명보다 귀히 여기며 살고 있느냐?
하나님을 바로 믿지 않는 자들이 각기 어디로 갔다고 하느냐? 각기 물러가서 너도 나도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을 찾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더러운 곳이 어디냐? 시궁창이냐? 뒷골목이냐? 전부가 선악과 따먹은 세상의 차원으로 들어갔다는 말이다. 이방세상이 하나님을 찾지 않듯이 속화된 교회가 진리를 찾지 않고 어른의 간섭이 없이 자란 아이들처럼, 이방인들처럼 하나님의 도덕성도 없고, 규모도 없고, 버릇도 없고, 위아래도 없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서 제 멋대로 산다는 거다. 그러니까 무엇처럼 되었다는 거냐? 도엑처럼 되어버렸다는 거다. 다 선악과 따먹은 저주받은 차원에서 산다는 말이다.
그러면 지금의 나는 여기에 하나도 안 걸리느냐? 그 때 그 때마다 다 걸린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 때가 지나면 그만이고, 또 그 때가 지나면 그만이고 이런 식으로 살고 있지는 않느냐? 하나님께서 나의 이 마음을 모르시겠느냐? 내가 마이너스의 생각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나를 마이너스로 인도하는 거고, 플러스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나를 긍정적으로 인도하시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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