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2주 주일설교. 수가성 여인, 와서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요 4장 27~42절) 김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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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순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예고해 드린 대로 이번 사순절에는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을 만난 인물들에 대해 살펴 봅니다. 오늘 주인공은 사마리아 수가성에 사는 여인입니다. 지난 주 니고데모에 이어 오늘은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이 만남 예수님을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처음 수도는 디르사였는데, 다섯 번째 왕인 시므리왕이 죽으면서 왕궁을 불태워 버려서 그 다음 여섯 번째 왕인 오므리 왕이 세멜이라는 사람에게서 은 두 달란트를 주고 사마리아 산을 사서 산 위에 사마리아성을 건축하고 수도로 삼았으며 이곳이 북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어 약 200년간 나라가 지속되다 주전 722년 앗수르의 침공에 의해 (북)이스라엘은 멸망당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 제국은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고산(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 강가에 있는 도시) 강 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서 살도록 강제 이주 시켰습니다.(왕하 17:1~6)
그리고 거의 빈 땅이 된 사마리아 땅에는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을 차지하고 거주하게 했습니다.(왕하 17:24) 이스라엘이 사마리아 땅만 빼앗긴 것이 아니라 그 땅에 이방 사람들로 채워져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방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은 자기들이 섬겼던 민속신이나 토지 신들의 우상을 마음대로 세우고 섬겼으며, 주술과 복술을 행하고, 심지어는 자기 아들과 딸들을 불에 태워 인신제사 드리는 것을 서슴지 않았습니다.(왕하 17:24~31)
더 참담한 것은 그들이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하면서 자기들 중의 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아 여호와를 섬기는 흉내를 냈습니다. (왕하 17:32~33) 이 신이든 저 신이든 마구잡이로 섬기는 혼합종교의 참람한 상황이 유대인의 땅이었던 사마리아에서 행해졌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일이 있었기에 (남)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은 정통 유대인이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추악하고 난잡한 혼합종교를 섬기는 이방사람들로 취급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남쪽 유대인들을 경멸하기는 마찬가지였고 서로 원수 같이 지냈습니다.
한 예로, 유대인이 북쪽에 다녀올 일이 있으면 지름길인 사마리아 땅으로는 절대 통과 하지 않고 길이 멀고 험해도 사마리아 지역을 크게 우회해서 다녔습니다. 이런 사마라아 땅에 예수님이 낮 시간에 찾아가셔서 수가성에 있는 우물 곁에서 물을 길으러 온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4장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수가성에서 만난 여인에게 말을 건네자 여인은 대뜸,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4:9) 라고 매우 쌀쌀 맞게 대꾸합니다. 쌀쌀 맞다기 보다는 적대적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이렇게 대하는 이유는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서로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후의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보면, “내가 누구인줄 알았으면 너는 나에게 생수를 주엇을 것이다, 물 그릇도 없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구합니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이물을 우리에게 주었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큽니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며 영생하도롯 솟아나는 샘울 이 될 것이다, 그런 물을 내게도 줘 보세요 그럼 나도 더 이상 물을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되겠네요, 네 남편을 불러와라, 저는 남편이 없는데요, 그 말이 맞다 너는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구나, 주여!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가 맞으시군요”
웬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에 와서 여자를 희롱하나 싶어서 쌀쌀 맞고 적대적인 어조로 계속 받아치던 여인은 자기의 은밀한 남성편력적인 사생활을 훤히 다 알고 있는 것을 듣고는 이 분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영적인 말에는 다 맞 받아쳤지만 자신의 사생활이 노출되자 그만 할 말을 잊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구원자에 대한 이야기나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는 아주 먼 이야기로 들리지만, 내 집의 숟가락 밥그릇 숫자나 내 자식의 미래등을 말하면 귀가 솔깃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믿음은 멀고 현실은 가깝다는 말이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교통교제 하지 않으면 아무리 영적인 유익을 주려고 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두 사람의 대화의 정점은 예배 이야기죠. 유다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성전은 예루살렘 한 곳 뿐이며 이곳에서 드리는 제사(예배)만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굳게 믿었습느다. 그래서 과거 (북)이스라엘이 벧엘과 단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 행위가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배반 행위라고 맹렬하게 비난했습니다.
장소만 놓고 보면 이 말은 맞는 말일수도 있으나, 예수님은 “이 산(사마리아)도 예루살렘도 아닌 영과 진리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올 것이고, 하나님은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시며,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장소의 문제가 아니니 너희도(사마리아 주민) 당연히 참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다, 다만 영으로 인도함 받는 예배,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는 날이 곧 올 것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수가성 여인의 귀에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차별을 없애 주시고,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 있다는 말씀이 너무나도 감동적이었습니다.
도덕적으로 떳떳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자신에게 이토록 인간 답게, 사람 답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랍비나 선생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여인은 큰 감동과 감격을 받고서야 이 분이 보통 분을 뛰어넘는 특별한 분이시라는 것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절정을 이루는 부분이 나옵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입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메시아, 그리스도, 구원자)라 하시니라” 여인은 이 말씀을 듣고 번개에 맞은 듯 온 몸이 굳어서 멍한 상태였을 겁니다. 한 마디로 예기지 않은 충격과 공포가 여인에게 내려졌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대화 내용이 오고간 이후에 벌어지는 장면입니다. 27절을 읽어 드립니다.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아멘.
제자들은 아마도 예수님이 드실만한 음식을 준비하러 동네를 돌아다녔고 그 사이에 예수님과 여인이 대화를 나눈 듯 합니다. 음식을 준비해서 돌아온 제자들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이 대화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고 이상히 여겼지만 아무도 묻지는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노상에서 알지 못하는 여인과 얼굴을 대하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듭니다. 더구나 그들이 적대시 하는 사마리아 여인과 마주하여 대화를 하는 것은 비방과 공격을 받을 만한 일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예수님이 다 이유가 있으셨겠지 라고 생각하는 신뢰,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것을 감히 우리가 뭐라 하겠어 라는 존경심 때문이었을 겁니다. 좋은 태도이며 올바른 자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의 상식이나 머리로 이해 되지 않는 어떤 말씀이나 명령이 갑작스럽게 역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 때에 우리도 당황하지 말고 다 주님의 뜻과 계획 아래 이루어지는 것임을 무한 신뢰하면서 기이하고, 어색하고, 불편하다고 할지라도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마을로 돌아간 여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28~ 30절을 읽어 드립니다.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아멘.
여인은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만나고 대화한 이야기들을 빠짐없이 생동감 있게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면서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이끌어 가려고 합니다. 여인은 듣는자에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와서 보라는 말씀은 요한 복음 1장에 빌립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친구인 나다나엘을 전도할 때 쓴 말입니다. “와서 보라”, 두말 할 것 없이 함께 가보자, 진짜인지 가짜인지 직접 보게 해 줄게, 이 말은 확실하게 예수님을 일대일로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전도용어입니다. 우리는 다 이런 확신의 말씀으로 전도할 줄 아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는 여인의 말에 긴가민가, 혹시나 진짜일까? 흥미로운데, 거짓말이면 혼날줄 알아 등등의 마음으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몰려 갔습니다. 와서 보라는 말이 일단 통했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지난 설교의 니고데모는 대단한 학식과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음에도 예수님이 그에게 내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언적으로 알려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통의 여성인 수가성 여인에게는 “내가 곧 그리스도 이니라”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상식적으로는 니고데모에게 그리스도라고 밝히는 것이 더 쉬운 대화법이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상대가 바뀐듯하게 말씀하셨을까요?
지난 주 말씀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첫째로 겪게 되는 경험은 자신의 선입견, 지식, 자아, 고집 들이 부서지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은 지식인들은 그들만이 가진 대단한 자부심인 자존심과 완고함을 깨트릴 강력한 선결과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너의 생각과 확신은 틀렸다는 말씀을 먼저 해 주신 겁니다.
그러나 여인은 달랐습니다. 여인은 율법에 목매인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이 짓고 있는 도덕적, 윤리적, 성적인 잘못에 대한 치부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남자 관계가 복잡한 삶을 사는 여성으로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늘 두렵고 창피한 일이었습니다. 사마리아 땅에서 버려진 이방인 취급을 받는 서러움도 더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녀의 수치를 가려주고, 죄로 인한 속박에서 벗어나 다시는 동일한 죄를 짓지 아니하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직접 그녀가 숨어 지내는 곳으로 찾아가셔서 그녀가 나타날 때를 기다려 주신 겁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내가 너를 구해줄 메시아, 구원자, 그리스도이니, 나를 믿고 너는 이제 수치의 여인, 버려진 땅에 사는 이방인 같은 여인의 삶을 청산하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라고 그의 인생을 을이켜 세워 주신 겁니다.
이토록 예수님은 높은 자리에 있으며 거만한 자들은 허리를 굽혀 제발로 찾아오도록 만드셨고, 소외되고 고아와 같이 버려진 자는 직접 찾아가시는 사역을 펼치신 겁니다. 사람의 상태와 상황에 최적화시킨 맞춤형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섬세하시고 한 사람의 인격을 존중해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니고데모와 같은 인간이다 싶은 분은 예수님에게로 찾아가서 그분과 쎄게 부딪쳐서 내 잘난 것들이 산산히 부서지는 경험을 하셔야 합니다. 내가 수가성 여인과 같은 인간이다 싶은 분은 골방에 들어가 눈물로 부르짖으며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주시는 예수님(성령님)을 초청하며 통곡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니고데모형 인간이십니까? 수가성 여인같은 인간이십니까? 본인이 어떤 인간형인지 알아가는 것이 이번 사순절 인물 설교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지난주 스포츠 선수 이야기를 하면서 본인이 본인의 자세와 태도를 제대로 알수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어떤 인간형인지도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각자 잘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인과 동네사람들이 몰려 오는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간에도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31~38절을 읽어 드립니다.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아멘.
“예수님 준비해 온 음식좀 드세요,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예?? 우리가 음식 준비하러 다녀온 사이에 누가 예수님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어서 이미 드셨나?”
여인과 예수님이 가시 돋힌 살쌀한 대화 였다면,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는 동문서답입니다. 제자들의 대답이 바보 같아 보이죠. 웃음이 나오는 저 모습이 우리 모습입니다. 육으로 대화하면 깔갈 웃고 넘어갈 수 있는 해프닝이지만, 영적인 대화채널로 보면 불통 그 자체이죠.
예수님은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적인 언어를 다 이해하고 그로인해 유익을 주시려는 시도를 계속하셨습니다. 한참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성령으로 인해 제자들이 다 그 수준에 이르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제자화이고, 제자도의 길을 만들어가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무지함에 화 내시지 않고 ‘알지 못하는 양식’이 무엇인지 설명 해 주십니다. 34절에, 나를 보내신 이(성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은 죄에 빠진 인간들에게 자유함을 주시려는 일이 가장 우선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바로 그 일을 하고 계셨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보다 맡겨진 일을 최우선으로 하고 그 일에 집중하는 것이 하늘 양식(하늘 평안과 기쁨과 안식)을 공급받을 있는 가장 좋은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들어도 들어도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진국 같은 진리의 말씀이십니다.
진짜 지난 주 설교처럼,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일과, 섬기는 태도만 배우고 익히면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말씀입니다.
35절에, 아직 추수할 시기가 넉달이 남았지만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라고 하셨는데, 이는 벌판의 곡식이 시기를 앞당겨 익었다는 것이 아니라, 여인과 함께 몰려오는 마을 사람들이 추수할 대상이며 그들을 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말씀이 영적이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사역에만 집중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36절에 거두는 자는 제자들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심지도 않았는데 거두는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기뻐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 하시며, 너희들이 거두는 일에 참여한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선지자, 사역자, 종들)의 선행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 곳이 직장이든, 집이든, 교회이든지 상관 없이, 그 일이 직업이든, 가정일이든, 사역이든, 봉사든지 아무 상관 없이 이루어지는 모든 성과나 열매들은 모두 하나님이 은혜 주시고 씨를 뿌려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내가 얼마나 수고했는지 알면서 나를 이렇게 무시해, 내가 이만큼 했으니 당연이 그만큼의 몫은 내꺼야, 이런 식의 주장은 하나님의 일하심, 씨뿌리심을 가로채는 망령됭 행동입니다. 심는자와 물을 주는 자가 있을지언정, 씨를 뿌리고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님을 명심하고 모든 일, 모든 성과에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제자들과 이런 대화를 주고 받는 중에 여인과 마을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사마리아에 수가성에서 벌어진 일의 결말이 나오는 39~42절을 읽어 드립니다.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아멘.
39절을 보면, 사마리아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된 처음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이 과거에 행했던(남편 많은 사생활)일들을 다 맞췄다는 말을 여자가 증언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점 보듯이 과거일을 다 맞추는 사람이 왔다는 말에 신기해서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말도 함께 전하기는 했으나 사람들은 그것에는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냥 뛰어난 선지자 정도겠지 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틀을 지내며 많은 대화를 나누고 난 뒤에는 여자의 증언하는 말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들은 것으로 인해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이신 그리스도(메시아,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땅에도 복음의 씨앗이 신겨지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가성 여인의 이야기는 이렇게 해피 엔딩으로 끝납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제자들도, 동네 사람들도 아닌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수치를 지닌 여인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이 여인은 일평생 은둔의 생활을 하면서 문란한 생활을 끝내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그의 수치를 없애 주셨습니다. 없에 주시는 방법이 가리고, 덮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드러냄으로 인해 그 여인이 자유함을 얻는 길이 열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 죄를 사해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우리가 죄를 숨기며 꼭꼭 숨어지낼 때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들을 고발하시고, 다 공개해 버리시고, 이제는 더 이상 죄의 무게와 속박세어 살지 않도록 죄의 사슬을 끊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죄인 되었던 우리들을 증인으로 만드시고, 제자로 만드시는 놀라운 변화의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죄인에서 증인과 제자가 되기까지 이러한 전 인생의 변화를 누구보다도 깊게 체험한 여인이 바로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사회의 시선에서 벗어나 손가락질 당하고, 도저히 갱생 불가능 할 것 같은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가장 우선적인 관심과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여러분은 관심 받을 대상이신가요? 외면 받을 대상이신가요? 죄를 죄로 여기는 인식, 그리고 죄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몸무림 치게 되면 누구라도 예수님의 관심의 대상에 포착 됩니다.
전심으로 기도하고, 진심으로 참회하려는 대상이 포착되었다면 우리 예수님은 그 곳이 이방 땅이든, 숨어 지내는 곳이든, 수치를 엄청 많이 지니고 있든지 상관없이 찾아와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자리에서, 내가 짓고 있는 죄 문제를 철저하게 미워하고 증오하며 구원자 예수님을 간절히 부르십시오. 영과 진리로 예배하도록 인도하시는 우리 주님이 여러분의 심령에 거룩과 성결의 영으로 충만하게 임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주시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전심으로 기도하고, 진심으로 참회하는 가운데, “너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게 되리라, 너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로 서게 하리라, 내가 너를 죄의 사슬과 속박에서 반드시 풀어 주리라, 나는 너를 생명으로 인도하여 줄 너의 그리스도, 너의 구원자, 이니라”, 나의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수치의 사람으로 살아가지 아니하고 육체와 영혼의 완전한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시는 구원 받은 믿음의 성도로 변화되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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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수가성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우리의 죄 된 모습과 수치를 보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들의 죄와 수치를 밝히 드러내 주시고, 빛 가운데로 나아가고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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