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
- 마가복음 1:1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1. 탄생 설화 없이 바로 공생애가 시작되는 마가복음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설화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구절 하나를 제시하고는 바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고 공생애에 진입합니다. 마가는 왜 이처럼 급하게 휘몰아치는 저술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마가복음의 주제가 고난받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의 경우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으며, 유대인들에게 약속된 왕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이 주제입니다. 그래서 왕의 족보가 등장하고 탄생설화도 간략하게나마 제시가 됩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합니다. 그 이전 사람은 전 인류에 대한 것이지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대의 왕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동시에 다윗의 자손이어야 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탄생 설화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세례 요한의 탄생설화까지 기록되어 있지요. 누가복음의 주제는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탄생으로부터 시작하기에 탄생설화에 시간을 많이 할애합니다. 탄생설화 후에는 예수님의 족보를 삽입합니다. 모든 인간에게 족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의 족보는 마태의 족보와는 다릅니다. 마태의 족보가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오는 족보라고 한다면, 누가의 족보는 예수님으로부터 올라가 다윗을 넘고 아브라함을 넘어 아담을 만나는 족보입니다. 누가복음의 독자는 헬라인이었기때문에 아브라함과 다윗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족보가 있습니다. 그 족보를 타고 올라가다 보면 공통적으로 만나게 되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곧 아담입니다. 그리고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지요. 누가는 족보를 통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논증하고 있는 셈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탄생 설화도 없고 족보도 없습니다. 요한이 그리고자 했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족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탄생하지 않습니다. 그저 위에서 은혜로 내려오신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자, 생명이시자, 빛이라는 말씀으로 선포하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도 탄생 설화와 족보가 없습니다. 종에게 무슨 족보가 있겠습니까? 종이 어떻게 태어났는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종은 그저 맡겨진 임무를 다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공생애로 바로 들어가 할 일을 묵묵히,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하실 뿐입니다.
2. 마가가 예수님을 고난의 종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마가복음의 저자는 마가입니다. 요한 마가라고도 불립니다. 요한은 히브리식 이름으로 여호와의 은총이라는 뜻입니다. 마가는 로마식 이름으로 망치라는 뜻이지요.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12사도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사도 베드로의 통역관으로 활동했으며, 베드로에게서 전해 들은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이 고난받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마가복음의 독자가 처한 특수한 상황때문이었습니다. 마가복음의 1차 독자는 로마제국의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로마시대는 특별히 황제를 신성시하였기 때문에 황제에게 절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하나님만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에게 절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신론자’라 불리웠습니다. 신이 인간화 된 황제를 숭배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핍박을 받습니다. 당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고난과 환난과 궁핍과 죽음을 향한 지름길이었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로마제국 전역에서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마가복음을 집필하게 된 것입니다. 집필의 목적은 죽음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가가 그리고자 했던 예수는 바로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을 받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라면 스승이신 예수님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동참을 해야 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셨다면, 그 제자들 역시 그 길을 따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길의 끝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 있지요. 마가복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승천하는 영광으로 끝납니다. 로마의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에 의해 변절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는 힘은 바로 그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복음서 중에 가장 짧습니다. 확확 지나가지요. 종이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강해설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종은 말을 할 시간이 없지요. 또한 곧장, 즉시 등의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종은 명령에 즉각 순종해야 하니까요. 족보도 없습니다. 종이 족보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요. 또한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수난에 특별한 관심과 초점을 두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3. 마가복음의 핵심 주제: 제자도와 제자들이 받게 될 영광
로마의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핍박 가운데에서도 믿음을 지켜낼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었고, 둘째는 그것을 지탱하게 하는 소망이었습니다.
첫째, 마가복음에는 제자도가 가장 극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스승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았으니, 그 제자도 당연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메시지입니다. 마가는 이것을 잘 설명하기 위해 샌드위치 기법이라는 것을 잘 활용합니다. 예를 들면, 제자들의 이야기 사이에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삽입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의로운 일을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한낱 십대 소녀의 춤바람에 그 목숨이 날아갑니다. 그 이야기를 굳이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 사이에 삽입을 합니다. 이것을 샌드위치 기법이라고 부릅니다. “선교하는 제자들 – 세례 요한의 순교 – 선교보고하는 제자들”의 순서로 되어 있는 모습이 샌드위치처럼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하여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제자들의 이야기 사이에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삽입하여, 세례요한의 모습이 바로 제자들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는 세례 요한처럼 의를 위해 핍박받고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제자들이 받게 될 영광입니다.
제자들은 그저 허무하게 죽고 끝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 역시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영광스럽게 승천하시는 장면으로 이야기를 맺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인 16:20절은 또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러 나가는 것으로 끝납니다. 제자도를 다시 강조하고 있지요.
공생를 사시는 동안에도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종처럼 즉각적인 순종을 하며 사시는 모습을 그리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일화들을 소개를 합니다. 귀신을 내어쫓고, 문둥병자와 중풍병자를 고치며,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리고, 오병이어나 칠병이삼어의 기적을 베푸는 것 등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은 믿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배척하였기 때문에 영광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혈루증여인과 회당장 야이로는 믿었기 때문에 영광을 누립니다. 여기서도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 샌드위치 기법을 씁니다. ‘죽어가는 딸을 둔 야이로의 이야기 – 혈루증 여인 치유이야기 –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살아나는 이야기’를 보면 구조가 샌드위치같지요? 이런 기법을 쓴 이유는 혈루증을 앓는 여인의 믿음을 보았기에 회당장 야이로가 죽은 딸도 살아날 거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믿으면 영광을 본다는 것이지요.
믿음을 통한 영광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 누리는 하나님의 영광은 물론 이방인이나 여인에게도 열려 있지요. 그것을 잘 드러내는 본문이 바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주는 장면입니다. 이방인이며, 여인이었고, 심지어는 가나안 족속이었던 이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4. 모든 이야기를 응축한 한 구절
마가복음 1:1절은 이 모든 이야기를 한 문장 안에 담아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1) 복음
복음이란 단어는 원래 성경적 용어가 아니라, 로마인들이 사용하는 용어였습니다.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황제가 태어났을 때, 전쟁에서 로마군이 승전했을 때, 쓰던 용어입니다. 그러나 황제가 탄생한 것이 정말로 기쁜 소식일까요? 황제를 섬기느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했습니까? 로마가 승리하는 것이 기쁨일까요? 로마의 압제 아래서 얼마나 많은 민족이 아픔을 당해야 했습니까? 그러니까 진짜 복음은 황제의 탄생도 아니고, 로마의 승리도 아니고 진정한 기쁨의 소식이 있다라는 말로 마가는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이것은 이미 구약에 예언되고 예표된 소리이기도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갈릴리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발할 것이라 예언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입는 예복 중 에봇받침 겉옷에는 금방울과 석류모양의 공이 번갈아 가며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지성소에서 아름다운 방울 소리가 들리는 것이지요. 이 역시 복음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
로마 황제가 신이라 거짓 주장을 하지만 그는 인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로마 황제를 믿는 사람은 핍박을 면하는 것이 고작이겠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영광을 보장 받습니다.
그 말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말 하나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직분입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구원자로 오셨으니, 그 구원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믿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을 얻게 됩니다.
헬라어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직분이라고 했지요? 메시야가 약속된 구약시대에는 기름부음을 받는 세 직분이 있었습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셔서 원래 우리가 지니고 있던 세상에 대한 왕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사장으로 오셔서 단 한번의 제사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로 오셔서 우리에게 천국에 대하여 말씀해주시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강조한 것이 마태복음,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을 강조한 것이 마가복음, 선지자로 오신 예수님을 강조한 것이 누가복음,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님을 강조한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사복음서가 모두 합을 이루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 중에서도 마가는 특별히 제사장이자 희생제물이자,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과 권능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빠뜨리지 않습니다. 또한 선지자이자 왕으로 오신 분이라는 것 역시 함축을 해두고 있습니다. 마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왕, 제사장, 선지자의 모습으로 이땅에 오셨다는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전하면서도 강조점은 역시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에 둠으로써 제자도를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3) 하나님의 아들
마가복음의 가장 강력한 강조점은 사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가지신 분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마가는 로마의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핍박을 견디고 이겨낼 당위성과 함께, 그것을 이겨낼 용기와 희망도 함께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즉 마가복음은 고난의 책임과 동시에 영광의 책인 셈이지요. 고난에 참예한 자가 영광에도 참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 하나님의 영광의 잔에 참예하기 위해 오늘 고난의 잔에 참예하고 있습니까? 모두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성탄은 분명 그러한 날입니다. 성탄이 진정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탄은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말하는 영광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기뻐하고 즐거워함과 동시에 십자가를 향한 결단이 있는 날이어야 하고, 십자가의 고난을 결단하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꿈꾸는 즐거움이 있는 날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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