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예루살렘 : Jerusalem

열려라 에바다 2024. 2. 27. 12:27

예루살렘 : Jerusalem

 

이스라엘 민족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으로 지리적으로는 다윗 시대부터 도읍지로 지정된 도시를 말하며 영적으로는 천국을 말한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시 132:13-14)고 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찌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찌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습 3:14). 여기서 시온의 딸은 예루살렘을 여성에 비유하여 표현한 문학적 기법이다. 이는 예루살렘이 하나님에 의해 택하여진 특별한 곳이며 하나님 보시기에 기쁘고 즐거운 곳이었기 때문이다(습 3:14, 17; 슥 2:10). 이처럼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선택과 임재, 보호 그리고 영광의 장소인 동시에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 대한 불성실과 불순종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곧바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가져오게 했다.


3대 종교의 성지 : 이곳은 현재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세 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여겨지고 있다. 이슬람교에서 이곳을 그들의 3대 성지(메카, 메디나, 예루살렘) 가운데 하나로 지정한 이유는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천사의 부름을 받아 마법의 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예루살렘까지 여행하고 현재의 ‘엘 아크사 사원’(Ael-Aksa Mosque)이 있는 자리에서 승천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예루살렘 시가지에는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의 3대 종교가 공존하고 있으며, 더불어 유대인의 회당과 가톨릭의 성당과 이슬람교의 모스크가 각기 독특한 양식으로 어우러져 있다. 예루살렘의 안식일도 각각 다르다. 금요일은 이슬람교의 안식일, 토요일은 유대교의 안식일, 그리고 주일은 기독교의 안식일이다.
시가지는 성묘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서북부는 기독교(여러 종파) 지역(Christian Quarter), 모스크를 중심으로 한 아랍 지역(Arab Quarter), 동남부의 유대인 지역(Jewish Quarter), 서남부의 아르메니아 지역(Armenian Quarter)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것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면이다.

 

 


명칭과 기원 

 

예루살렘의 정확한 의미와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고대 애굽의 저주 문서들이나 후기 앗수르 문서에서 이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예루살렘의 히브리어인 ‘예루살라임’(Jerushalayim)은 ‘터, 기초‘ 또는 ‘기초를 둠‘의 뜻을 가진 ‘예루’와 히브리어의 ‘평화’에 해당하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가진, 그러면서도 가나안의 지방신 이름으로 보이는 ‘살렘’(Shalem)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원래 의미는 ‘살렘의 터’라는 의미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평화’(shalom)라는 의미가 지배적이 되면서 ‘평화의 도시’, ‘평화의 터’라는 의미로 이해하게 되었다.


성경에서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오는 곳은 아브라함이 살렘 왕이며 제사장인 멜기세덱을 만났다는 대목에서인데(창 14:17-20; 시 76:2), 이때의 살렘이 바로 지금의 예루살렘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도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는 여부스 족속을 물리치지 못했다. 이곳이 다윗에 의해 점령된 후에야 비로소 ‘다윗 성’ 또는 ‘예루살렘’으로 불렸으며, 그 이전에는 ‘여부스’라고 불렸다. 다윗이 이곳을 통치의 중심지로 삼았던 이유는 이스라엘이나 유다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전략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이다.
지형적인 위치 : 예루살렘은 북위 31도 52분, 동경 35도 13분에 위치하고 있다(북위 33도인 제주도의 서귀포보다 조금 남쪽임). 이곳은 지중해로부터 약 52km 정도, 사해 북쪽으로부터는 약 22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해발 약 800m의 유다 구릉지 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북쪽의 사마리아 지방과 남쪽의 헤브론을 연결하는 남북 간선 도로와 동쪽 요단 계곡의 여리고에서 서쪽의 지중해안의 욥바와 가이사랴를 연결하는 동서 간선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전략적 거점 도시이다.
시편 125:2의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리로다”라는 말씀처럼 예루살렘은 높은 산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예루살렘 동쪽에는 해발 830m의 감람 산이 남북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북쪽을 제외하고는 예루살렘 성으로 진입하는 모든 길들이 세 개의 깊은 골짜기에 의해 모두 차단되고 있다. 그 세 개의 골짜기는 예루살렘 성과 감람 산 사이에 있는 기드론 골짜기와 예루살렘 성 서쪽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굽어 기드론 골짜기와 만나는 힌놈 골짜기, 그리고 성의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티로포에온(Tyropoeon) 골짜기이다. 이와 같은 지형으로 인해 예루살렘은 외적을 방어하는 데도 유리했다. 그러나 3면(동, 서, 남)은 산지였으나 북쪽은 터져 있고 중앙 산맥으로 계속 이어져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공격을 받을 때는 대부분 북쪽을 통해서였다.
기후 : 예루살렘은 지중해성 기후 지대의 남단부에 속하는 아열대성 기후 지대이다. 1월 평균 기온은 섭씨 5-12。, 8월 평균 기온은 19-28。이다. 여름이라 해도 나무 그늘이나 실내는 조금 서늘할 정도이다. 예루살렘에 비가 내리는 것은 9월부터 5월까지이며, 연 평균 강수량은 500mm 가량이다.

예루살렘에 대한 별칭들
성경에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다양한 이름들이 등장하는데, 그 이름들은 다음과 같다. 살렘(시 76:2), 모리아(창 22:2), 여부스(수 18:28), 시온(왕하 19:21), 다윗의 성(삼하 5:7), 아리엘(사 29:1), 거룩한 성(마 4:5) 등이 그것이다.

예루살렘과 암탉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임박한 재앙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자신에 대해 병아리들을 잘 보호하는 ‘암탉 이미지’를 사용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 23:37-38). 이 말씀은 예루살렘이라는 지리적 환경에 암탉의 속성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연계시킴으로써 미래에 닥쳐올 재난이 확실하고 파괴적이 될 것에 대하여 강한 이미지가 남도록 주지시키고 있다. 일찍이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가장 안전한 곳으로 여겨졌었다. 시편 기자는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시 125:2)라고 노래했다.
한편 구약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사랑은 ‘독수리 이미지’로 표현되었다(신 32:10-11).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지키는 모습에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것을 은유시키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독수리 대신 암탉을 이미지로 사용하셨다.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독수리가 더 친근했다면,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살아가던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암탉이 더 친숙한 이미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확실한 지리적 방어와 그렇게 진실한 하나님의 보호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 삶을 살 때는 아무런 보장이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아신 것이다. 결국 그 안전한 땅 예루살렘을 뒤엎어 버릴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궁극적인 보호는 지형적인 이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이미지인 암탉에 초점을 맞추고 계신 것이다.

예루살렘의 역사

 

초기 역사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가장 초기의 증거는 르바임(Rephaim) 골짜기에서 발견된 구석기 및 중석기 시대의 부싯돌이다. 그리고 성 서편과 동편 오벨(Ophel) 지역에서 발견된 성벽 유물들은 청동기 중기 시대(BC 2100-1550)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애굽의 저주 문서(Execration Texts)나 엘 아마르나(El-Amarna) 서판에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때는 아마도 산지 요새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모세 오경에서 이곳이 언급되고 있는 곳은 창세기 14:18(‘살렘’)과 22:2(‘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이다. 아마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이 이곳을 다스리고 있었을 것이다(창 14:18).
후기 청동기 시대 :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여부스 족속의 아도니세덱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 이스라엘에 의해 아이 성이 무너지고 기브온마저 항복하자 아도니세덱은 다른 네 왕과 동맹하여 기브온을 공략했다(수 10:1-5). 그러나 그 동맹군은 패하고 예루살렘 왕은 다른 왕들과 함께 죽었으나 예루살렘은 함락되지 않았다(수 10:6-43)

 

사사 시대

사사기 1:8과 1:21을 보면 유다 지파가 성벽 밖에 있는 그 도시의 일부를 점령했고, 베냐민 지파는 이 지역을 물려받아 성 안에 있는 여부스 족속들과 평화롭게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사사기 19:10-12에는 레위 사람과 그의 첩이 베들레헴에서 돌아오던 길에 황혼 무렵에 ‘여부스 맞은편’에 당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까지도 예루살렘은 여부스로 불렸던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 : 다윗은 약 8년 간에 걸친 헤브론 통치 시기를 마무리하고 앞으로 정치적, 종교적 중심이 될 도시로 예루살렘을 지목했다. 이곳은 남쪽 지파와 북쪽 지파 그 어느 편에도 속해 있지 않았으므로, 예루살렘은 통일 왕국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다. 당시 여부스 족속들은 성안에 있으면 안전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결국 다윗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삼하 5:6-8). 그 후 다윗은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밀로의 성벽을 개수하고(삼하 5:9), 왕궁을 세우는 한편(삼하 5:11) 북쪽 오르난 타작 마당에 성막과 언약궤를 안치시킴으로써 예루살렘이 그 왕국의 종교 중심지가 되게 했다(삼하 5:5-6; 6:1-15; 24:8:-9; 18-25; 대상 22:1; 대하 3:1). 다윗은 자신의 왕궁을 지은 뒤 하나님의 전을 짓고자 했으나 그 일은 솔로몬에게 넘어갔다(삼하 7장).
솔로몬의 가장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무엇보다 성전 건축이다. 이 건물의 구조는 뵈니게의 영향을 받아 정교하고 방이 많았다(왕상 6-8장; 대하 2-4장). 솔로몬은 자신의 궁을 짓고 예루살렘 성벽을 쌓아올렸으며(왕상 3:1; 9:15), 그 밖의 다른 곳에 많은 건축물을 남기기도 했다(왕상 9:17, 19, 24).

 


분열왕국 시대 

유다의 르호보암 왕 5년에 애굽의 시삭 왕에 의해 예루살렘의 성전과 궁전은 모두 약탈당했다(왕상 14:25-26). 아마샤 통치 때에는 북왕국 왕 요아스와의 싸움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벽 일부가 무너지고 다시 성전과 왕궁이 약탈당했다(왕하 14:13-14). 아마샤의 아들 웃시야(아사랴)는 예루살렘의 성 모퉁이 문과 골짜기 문과 성벽 굽이에 망대를 세워 성을 견고하게 했다(대하 26:9). 그의 아들 요담의 유일한 공적은 ‘여호와의 전의 윗문과 오벨 성을 많이 증축했다’는 것이다(대하 27:3). 히스기야에 의해 성전이 정결하게 되었으며(대하 29:3-19), 예루살렘의 성벽과 문들과 망대들이 건축되어 더 요새화되었다(대하 32:5). 그는 무엇보다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에도 성안에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수로를 만들기도 했다(왕하 20:20; 대하 32:2-4). 이러한 히스기야의 예방조치들이 앗수르의 침입을 막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인 구원을 받았다(왕하 19:20-37).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 때에는 ‘무죄한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 채웠을 정도였다’(왕하 21:16). 이러한 그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은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같이 예루살렘을 씻어 버릴지라”(왕하 21:13)고 하셨다. 이 말씀은 BC 586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성취되었다. 예루살렘 성전과 대부분의 건물들은 파괴되고 성벽들도 많이 훼손되었으며 남은 주민들은 추방되었다(왕하 25:11-12, 21; 렘 52:28-30).

 

예루살렘 멸망 이후 

바벨론 포로 귀환 후, 곧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의해 재건축되기 전까지 예루살렘은 폐허로 남아 있었다. 고레스의 정책과 칙령에 의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이 유다 총독으로 임명된 세스바살과 제사장 여호수아, 스룹바벨 등과 함께 1차 귀환을 하였다(스 2장). 이들은 즉시 번제단을 수축하고 그 이듬해에 성전을 세우기 위해 기초를 놓았으나 사마리아인들의 방해와 거짓 상소로 결국 성전 건축은 중단되고 말았다(스 4:11-16).
그러나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격려(학 1:4-6, 8; 2:4; 슥 4:6-10)와 다리오 왕의 후원과 도움으로 BC 516년에 성전이 완공되었다.
그 후 BC 458년에 에스라가 백성을 이끌고 2차로 귀환했으며, 얼마 후에는 바사 왕 아닥사스다의 술 맡은 관원으로 있었던 느헤미야가 귀환하였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예루살렘 성벽을 52일만에 세웠으며, 성문을 중건하였다. 느헤미야가 귀환한 후 중건된 문들로는 양문(느 3:1), 어문(느 3:3), 옛문(느 3:5), 골짜기문(느 3:13), 분문(느 3:29), 샘문(느 3:15), 수문(느 3:26), 마문(느 3:28), 동문(느 3:29) 등이었다.

 

느헤미야의 기록을 그대로 이해하는 데에 몇 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벽의 건축 순서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며, 예루살렘 성의 북쪽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BC 198년에는 팔레스타인이 수리아의 셀류쿠스 왕 안티오쿠스 2세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예루살렘이 최대의 수난과 수치를 당했던 때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us IV Epiphanes)에 의해서였다. 그는 성전을 약탈하고 제우스 단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BC 165년 마카비 반란으로 성전이 회복되었으며, 그 후 하스모니안 왕조는 로마가 개입하는 BC 1세기 중엽까지 자유롭게 예루살렘을 통치했다.
BC 63년에는 로마의 폼페이(Pompey) 장군에 의해 점령당했으며, 파르티아의 도움을 얻은 안티고누스(Antigonus)에 의해 40년 동안 통치를 받기도 했으나 헤롯 대왕에 의해 BC 37년에 다시 회복되었다.

 

 

헤롯 대왕 시대 

 

예루살렘을 다시 되찾은 헤롯 대왕은 로마의 비호 아래 예루살렘을 확장하고 요새화하는 일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그가 제일 먼저 한 사업은 성전 경내 북서쪽 모퉁이에 있던 요새를 재건하고 그곳을 자기의 보호자였던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이름을 따서 안토니아라고 불렀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대략 4만 명에서 7만 명 가량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의 가장 야심찬 계획은 성전을 증축하고 그 경내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한편 그는 극장, 시장과 광장, 수도, 저수지, 주랑의 통로, 성전 지역과 윗성을 서로 연결하는 다리를 만드는 등 특별히 건축에 있어서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주요 활동지 가운데 하나였으며, 무엇보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성령 강림과 초대교회의 탄생도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로마 시대 

 

로마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유대인들의 반란(AD 66)으로 인해 AD 70년 로마의 티투스(Titus)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과 망대들이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후 AD 135년에 바르 코흐바(Bar Kokhba)의 지도로 유대인 독립 운동이 일어나자 하드리안(Hadrian) 로마 황제는 다시 한번 철저히 예루살렘을 파괴시켰다. 그는 예루살렘을 갈아엎고 서쪽 언덕에 철저한 로마식 도시를 건설한 뒤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고 불렀다. 그 도시에 있던 모든 유대인들은 추방되었다. 이곳이 다시 회복된 것은 콘스탄틴이 통치하기 시작한 4세기 초였다. 그의 어머니 헬레나(Helena)는 많은 전통적인 장소에 교회를 세웠다. 그후 이곳에는 많은 교회들과 성당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 이후의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그 이후에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페르시아, 아랍, 터키, 십자군, 영국과 이스라엘 군대들과 정부들에 의해 점령당해 왔다. AD 636년에 모슬렘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카리프 오마르(Khalif Omar)가 성전이 있던 자리에 모스크를 세웠으며, AD 691년에는 아베드 마릭(Abed El Malik)과 벤 마완(Ben Marwan)과 오마야드 카리프(Omayad Khalif)가 오마르의 작은 모스크를 현재의 모스크로 대치시켰다.
7세기부터 11세기까지의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던 예루살렘은 유럽의 십자군에 의해 다시 회복되었다. 1099년에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이 모스크는 ‘하나님의 성전’(Templum Domini)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187년에 살라딘(Saladin)에 의해 또 점령되었으며, 그후 88년 동안 십자가는 내려지고 초승달 모양의 모슬렘 상징이 지붕에 달리게 되었다.
현재의 예루살렘은 16세기 중엽의 오스만 터키 제국의 황제 술탄 술레이만(Sultan Suleiman) 1세가 세운 예루살렘 성을 기준으로 해서 성안의 도시가 구도시(the Old City)로 되어 있고, 그 외에 199년 전부터 새롭게 현대식으로 세운 신도시(the New City)로 나뉘어져 있다.

 


예루살렘 성벽 

예루살렘의 구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큰 성벽은 여러 시대에 걸쳐 쌓여진 것이다. 오늘날의 형태와 크기는 터키의 술레이만 대제의 통치하에서 1542년에 마지막 쌓은 것이 지금까지 보존된 것이다. 둘레 4km, 평균 높이 12m, 34개의 탑과 8개의 문으로 되어 있다. 8개의 문은 북쪽에 새 문(New Gate), 다메섹 문(Damascus Gate), 헤롯 문(Herod’s Gate)이, 동쪽에는 스데반 문(St. Stephen’s Gate) 또는 사자문(Lions Gate), 황금문(Golden Gate)이, 남쪽에는 분문(Dung Gate), 시온 문(Zion Gate)이, 그리고 서쪽에 욥바 문(Joppa Gate)이 있다.

 

통곡의 벽
AD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는 성전과 궁전과 건물들과 망대들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벽까지도 허물어버렸다. 다만 성전의 서쪽 벽 끝자락만 조금 남겨 두었는데, 이는 예루살렘이 얼마나 철저히 파괴되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다시는 반란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 후 한동안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없었고, 다만 성전이 파괴된 날에만 1년에 한 번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각지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이곳에 모여 허물어진 성전을 두들기며 슬피 울곤 했는데, 그때부터 이곳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현재 이 성벽은 밑부분부터 위로 올라갈수록 서로 다른 크기의 바위로 쌓여져 있다. 아래 바닥에서부터 7단까지는 제2성전 시대의 것이고, 그 위의 4단까지는 로마 시대에 덧붙인 것이며, 또 그 위에 있는 것은 터키 시대에 쌓여진 것이다.

예루살렘 멸망을 선포한 선지자들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 유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멸망이 갑작스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끊임없는 우상숭배와 여러 죄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선지자들의 경고에 그들이 귀기울이지 않은 결과였을 뿐이었다. 이러한 결과는 하나님께서 옛 조상들과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애 2:17).

 

BC 1500년경 / 모세
-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을 것이라 하심(레 26장; 신 28장).
- 특히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반역할 경우 타국의 침입을 받으며 성들이 파괴되고 포로로 붙잡혀갈 것에 대해 말씀하심(신 28:25, 36).
BC 742-687년경 / 미가
- 불의와 우상숭배의 죄로 인해 시온이 갈아엎은 밭처럼 되고 성전이 파괴될 것을 말씀하심(미 3:12).
BC 740-670년경 / 이사야
-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우상숭배, 위선적 예배, 교만의 죄를 책망하심(사 1-5장).
- 예루살렘 저주를 선언(사 29:1-10),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될 것을 말씀하심(사 39:5-7).
BC 640-609년경 / 스바냐
- 우상숭배의 죄를 없애기 위해 유다 땅을 멸절하신다고 말씀하심(습 1:18).
BC 640-609년경 / 훌다
- 유다의 죄로 인해 말씀에 기록된 대로 재앙을 내리겠다고 하심(왕하 22:16-17).
BC 626-580년경 / 예레미야
- 예루살렘과 유다 지도자들에게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심(렘 1-39장).
BC 600년경 / 하박국
- 바벨론 사람들에 의해 황폐해진 예루살렘을 보며 하나님께 울부짖는 하박국에게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심(합 1-4장).

 

 


새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이라는 단어는 갈라디아서와 히브리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나오고 있다. 갈라디아서(갈 4:21-25)와 히브리서(히 11:9; 12:22)의 ‘새 예루살렘’ 또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유대교와의 논쟁 속에서 언급되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은 큰 도시 바벨론과의 논쟁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다(계 17:1 이하).
‘새 예루살렘’이란 지상에 있는 예루살렘과 대조되는 말이다. 그러나 두 예루살렘은 서로 연속성을 가진다. 인류의 구속이 예루살렘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은 죄와 분리되고 철저하게 하나님께 바쳐졌으므로 ‘거룩’하다고 불린다. 예루살렘은 신부, 즉 어린 양의 신부로 불려지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사 54:5; 엡 5:32; 계 21:2)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리킨다. 심지어 구약에서도 교회는 상징적으로 ‘성’(城)이라 불렸다(사 26:1; 시 48편). 성은 영원한 거처, 수많은 거주민, 보호와 안전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후 더 이상 하늘과 땅의 구분이 없게 된다. 이는 이미 지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천국을 경험하고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맛봄은 훗날 천국에서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의 아름다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역사를 그의 장중에 주관하시고 자기를 경외하는 백성을 위하여 새로운 세계 곧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을 예비하고 계신다. 그 도성의 크기는 144규빗이며, 그 기초를 이루는 성곽의 기초석은 대제사장의 흉패에 붙이는 열두 보석들과 유사한 보석들이다(계 21:19-20; 출 28:17-20 참고). 성곽에는 각각 하나의 보석으로 이루어진 열두 문들이 있는데(계 21:12, 21),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나타내 준다. 문들은 각각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미칠 것을 나타낸다. 그 문들은 결코 닫히지 않을 것이다(계 21:12-13, 25).


도성 구조물 위에 지파들과 사도들의 이름들이 새겨지게 함으로써(계 21:12, 14) 하나님은 다시금 역사를 통한 자신의 사역의 통일성을 보여 주고 있다. 12라는 숫자의 배수와 관계된 도성의 크기(사방이 1만 2천 스다디온, 즉 약 2,200km의 정방입체형)는 신부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완전함을 상징한다. 놀라운 것은 그 성에는 성전이 없다는 사실이다(겔 40:1; 46:24 참고).
하나님의 거주의 물체적 상징은 영적인 실체 자체로 대체된 것이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에 계심이라”(계 21:22). 또한 그곳은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시기’(계 21:23) 때문에 해나 달의 비췸이 필요 없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분의 얼굴 빛 속에서 ‘세세토록 왕 노릇 할’ 것이다(계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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