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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소경과 귀신들린 사람을 온전케 하심2.

열려라 에바다 2024. 3. 16. 11:49

두 소경과 귀신들린 사람을 온전케 하심2.
 

천향추천 0조회 024.03.16 08:18댓글 0

 
 
두 소경과 귀신들린 사람을 온전케 하심2(마9:27-34)


마태복음 8장과 9장에서는 예수의 권세를 강조한다.
예수께서 하나님 아들로서 행하시는 권세를 강조한다.
하나님 아들의 권세는 율법 나라의 왕 다윗과는 다른 종말의 천국 왕의 권세이다.
다윗에게 위임된 권세와는 다른 하나님 자신의 권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셔서 잔잔하게 하시고(마8:23-27),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시며(마9:1-8),
율법이 금하는 죄인들과 어울려서 함께 식사하시고(마9:9-13),
제자들은 율법이 명하는 금식을 하지 않는다(마9:14-17).
이처럼 예수와 제자들이 모세율법(구약성경)을 행하지 않는 것은 새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모세율법을 통한 여호와의 옛 통치가 종결되고 아들을 통한 새로운 통치가 시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통치 가운데 거하면 모세가 명한 율법을 시행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역사 전환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혼인 잔치와 옷을 깁는 비유, 포도주 비유로 설명하신다(마9:14-17).
혼인 잔치와 옷을 깁는 비유, 포도주 비유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한 가르침이다.
이는 모세율법을 고집하여 대적하는 자들에게 예수께서 새 시대의 주인임을 가르치는 내용이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은 모세율법을 버리고 자신을 따르라는 권고이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구약성경이 아니라
이제는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라는 말이다.
이전에는 모세의 말을 따라야 하였으나 이제는 자신의 말을 따르라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역사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라고 요약한다(히1:1-2).
따라서 종말은 모세가 아니라 아들의 말이 시행되는 시대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종말에는 아들의 말만을 들으라고 하시는가?
모세율법으로는 죄를 없이 하지 못하고(히10:4,11),
그 아래에 있는 자를 온전케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히7:16-19, 9:9-10).
이러한 모세율법의 한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신 것이다(갈4:4).
이는 율법이 주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믿는 자들을 아들(자녀)로 세우시는 결혼잔치가 시작된다.
왜 예수께서 오심이 결혼잔치의 시작인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셔서
종(머슴)이던 자들을 아들(자녀)로 들이시기 때문이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여 아들(자녀)이라는 특별한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결혼은 많은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자신의 가족으로 들이는 일이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소유된 백성으로 세우시고,
종말에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속량하셔서 아들로 세우신다.
이처럼 종(머슴)이 아들(자녀)로 세워지는 일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로 들어서는 일이다.
율법 아래의 종(머슴)이 하나님 아들(자녀)로 세워지는 일이다.
참되고 온전한 가족으로 맞아 들이시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구원하는 일을 결혼잔치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종말의 결혼잔치 신랑이시다.


예수께서 떠나실 때 두 소경이 따라오며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소리를 질렀다(마9:27).
두 소경은 예수를 가리켜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다.
다윗의 후손은 여호와께서 남은 자들에게 약속하신 종말의 구원자이다.
그는 종말의 하나님 나라인 천국의 왕이시다.
그는 다윗의 혈통을 따라 사람이 되신 하나님 아들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온전한 다윗왕국을 세우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구약의 선지자들은
다윗의 후손이 죄를 용서하거나 문둥병을 고친다고 구체적인 사역 내용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기 백성을 치료하고 정결하게 하며 생명을 새롭게 하신다.
이는 예수께 나아온 자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다른 성경에서는 소경을 한 사람으로 말하나 마태는 두 사람으로 기록한다.
이는 마태복음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율법에서 둘은 증인 수이며 두 사람의 증거는 확실한 증거이다.
두 명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보증하는 확실한 증거이다.
이러한 기록방식을 통해서도
마태는 동족들에게 예수께서 자신들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예수께서는 두 소경의 눈을 만져서 고치신다.
두 소경의 눈을 만지심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루만지시는 일이다.
율법 아래에서는 성소의 기물에 접촉되기만 하면 모든 부정함이 제거된다.
그것은 성전에 여호와께서 계신 처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전의 기물을 만지는 자마다 정결함을 입었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손으로 만진 두 소경의 눈은 어떻게 되겠는가?
따라서 예수께서 두 소경의 눈을 만져서 고치신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임하셨음을 나타내는 표적이며 증거이다.
이러한 은혜를 입게 됨은 무엇 때문인가?
그들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나아왔기 때문이다.
성전에 나아가서 기도하지 아니하고 예수께 믿음으로 나아왔기 때문이다.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두 소경의 눈을 만지셔서 자신과 함께하는 거룩한 교제의 대상자로 세우신다.


마태는 귀신들려서 벙어리가 된 사람들을 데려오니
예수를 알아본 귀신들이 쫓겨나간 것처럼 묘사한다.
가다라 지방의 귀신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시려고 여기에 오셨나이까?”
라고 말하나(마8:29),
본문에서는 사람들이 귀신이 들려서 벙어리가 된 자를 데려오자마자
귀신이 쫓겨나게 되었다고 말한다(마9:32-33).
이처럼 마태는 천국 왕의 권세를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말한다.
이 모습을 본 무리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고 말하며 기이하게 여긴다(마9:33).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라고 비하한다(마9:34).
이처럼 마태는 예수의 사역과 그에 대한 무리의 반응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배척을 동심원적인 물결구조로 말한다.
예수의 사역에 대한 무리의 반응과 바리새인들의 대적을 점진적이며 발전적으로 기록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귀신들려서 벙어리가 된 자를 데려오자
예수께서 고쳐주시니 무리가 기이하게 여기며
    “이스라엘 가운데 이런 일을 본때가 없다”
고 말하고,
이를 본 바리새인들은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고 하더라고 기록한다(마9:32-34).


마태복음에서는 무리와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더욱 진전된다.
그래서 12장에서는
    “그때 귀신이 들려서 눈이 멀고 벙어리가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되었다”
고 기록하고(마12:22),
이에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
라는 더욱 진전된 반응이 나타난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
고 더욱 격앙된 반응을 보인다(마12:24).
이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자신의 위치를 설명하신다.
예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 가운데 임하였다”
고 말씀하신다(마12:28).
이는 천국 왕의 등장이 곧 천국의 등장임을 말한다.
따라서 천국 왕을 거절하면 그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12:30-32).
구약에서 모세의 말인 율법을 거절하면 가나안땅에 거하지 못한 것처럼,
종말에는 예수의 말을 거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천국 왕을 거절하는 자들은 일곱 귀신이 들린 집보다 더욱 비참하게 될 임을 경고하신다.
이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계셨으나
종말에는 직접 사람으로 직접 오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아들의 가르침과 사역을 거절하면 그에 대한 심판도 더욱 중하게 된다.
이처럼 예수의 사역도 더욱 진전되어서 강화되지만
이에 대한 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의 대적도 점점 진행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부활하신 자신의 몸을 보이시지만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도둑질해 갔다고 말한다.
이러한 대비를 통해서 마태는 바리새인들의 완악함을 고발한다.


본문에서 마태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러한 일을 본적이 없다”
고 반응한 무리들과(마9:33)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좇아낸다”
는 바리새인의 반응을 대비한다(마9:34).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도 많은 병 고침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좇아내는 것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좇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고 말씀하신다(마12:27).
이처럼 공생애 당시에도 유대 사회에서는 많은 병 고침이 있었다.
이러한 병 고침은 선지자들이 활동하던 시대에도 있던 일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12장에서는 제사장의 아들들도 귀신을 쫓아냈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종교적 의식을 통해서 행하였으나
사람들이 귀신들린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오자 마자 귀신이 쫓겨나가게 된다.
그래서 무리는 이런 큰 권세는 이전에는 본 일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는 성전에 계셨던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그들 가운데 오셨기 때문이다.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휘장으로 가리고 계셨으나,
율법 아래에서는 휘장으로 가리셔서 백성들과 거리를 두셨으나,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백성의 집에 방문하신다.
이처럼 마태복음은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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