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부활주일 설교-사망의 권세를 멸하신 주님(사25:6-8, 고전15:50-58)

열려라 에바다 2024. 3. 30. 19:19
권호만barnabak추천 1조회 9024.03.30 12:46댓글 1
 
 
사망의 권세를 멸하신 주님
이사야 25: 6-8, 고전15:50-58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교우 여러분들 가운데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시간 옆에 계신 교우들과 부활절 인사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부활합니다.’ 아멘
오늘 봉독해드린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입니다.
구약에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말씀은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만 부활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그렇게 확 들어오는 말씀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주님의 부활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7절 말씀에서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했습니다.
여기에서 가리개와 덮개는 새번역 성경에서는 수의라고 번역을 합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이 입어야 하고 덮어야 했던 수의를 벗겨버리겠다는 것입니다.
8절 말씀에서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당시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할 때는 강대국 앗수르의 침략전쟁으로 많은 나라들이 큰 어려움을 당하던 시기였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망한 때도 바로 이 즈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전쟁의 소문이 점점 더 확대되고 더 많은 생명이 죽어갈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주께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는 예언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의 권세가 얼마나 강력하게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너무나 생생하게 경험하는 때에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정말 하기도 어렵고 이루어지기도 어려운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때부터 700여년이 지난 후 예수님을 통하여 이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영원히 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1. 사망의 권세


지금까지 사망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인간을 지배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법칙에 의하여 죄인 된 인간은 한 번 죽을 수밖에 없었고 그 후에는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사망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고 인간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사냥꾼이 독수리를 잡으려고 화살을 겨누면서 독수리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독수리는 자신이 죽을 줄도 모르고 뱀을 잡으려고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사냥꾼이 뱀을 쳐다보았더니 뱀도 어딘가를 노려보았는데, 뱀은 꼼짝도 하지 않고 개구리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개구리도 마찬가지로 꿈쩍 않고 뭔가를 보고 있었는데, 개구리는 무당벌레를 잡으려고 노려보았습니다.
무당벌레도 꼼짝 않고 있었는데, 진딧물을 잡아먹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냥꾼은 그 먹이사슬을 보다가 슬그머니 화살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혹시 누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노려보는 것은 아닐까?'
사냥꾼을 잡으려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이었습니다.
인간은 죽음에 의해 잡아먹힐 수밖에 없는 없었고 모든 사람은 죄의 대가로 인해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망은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인간 최고의 두려움입니다.
병에 걸리는 것이 두렵고 특히 중병에 걸리는 것이 더 두려운 이유는 그 병을 치루면서 당해야 하는 고통 때문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죽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왜 무서운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죽기 때문입니다.
한 번 전쟁이 일어나면 수많은 생명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은 인간을 지배하는 최고의 대적이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법칙 때문에,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법칙이기 때문에 인간은 죄를 지으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갖고 살아야 합니다.
이 죽음의 권세는 지금까지도 인간을 지배하고 있고 앞으로도 지배할 것입니다.
이 죽음의 권세를 이겨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러나 죽음은 정복되지 않았습니다.
정복되지 않은 채로 여전히 인간을 지배하고 있고 인간은 죽음 앞에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미국의 역사가이며, 식품 의약국 직원이었던 존 스완은 2005 5월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에 세상을 바꾼 의약품 7가지란 논문을 기고했습니다.
첫 번째 의약품이 아편입니다.
두 번째가 천연두 백신의 발명이고
세 번째가 살바르산이라고 하는 매독 균의 치료제입니다.
네 번째는 당뇨병환자들을 치료하는 인슐린의 개발이었고,
다섯 번째가 세계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의 발명입니다.
여섯 번째가 1960년 미국에서 개발된 최초의 먹는 피임약인 에노비들입니다.
일곱 번째가 진정제, 수면제인 탈리도마이드인데 이 약은 동물실험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인체 투약 시 부작용이 발견되어서 사용이 중지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세계 각국이 의약품 규제 법안을 강화하는데 기여해서 도리어 유명해진 약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바꾼 의약품 7가지는 분명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많은 생명을 살리는 데는 공헌을 했지만 그러나 그 약이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지는 못했습니다.
죽음은 지금도 가장 권세 있는 세력으로 우리 가운데 존재하고 있습니다.


2.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


그런데 그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분이 등장하였습니다.
그 분이 바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의 시신은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도움을 받아 금요일 오후에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오후 6시부터 안식일이 시작되었기에 서둘러서 시신을 장사지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되기까지 예수님도 죽음의 권세를 넘어서지 못하고 죽음에 매여 있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동안 예루살렘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던 예수님의 사건도 그렇게 조용히 끝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이 지난 첫날에 놀라운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십자가에 죽어서 무덤에 장사지냈던 예수가 살아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처음에 막달라 마리아를 통하여 전해진 이 소식은 이후에 베드로와 제자들을 통하여 점차 확대되기 시작합니다.
이 소식은 예수님을 장사했던 무덤이 빈 무덤이었다는 사실을 통하여 더욱 확증되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직접 그 모습을 보이면서 너무나 확실하게 증거 됩니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은 예수님을 주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사로잡혀 죽음의 권세아래 있지 않고 죽음을 초월한 분이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겼습니다. 죽음을 죽였습니다. 사망을 멸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님이 부활을 통하여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였다고 선언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15:55)
지금까지 사망은 언제나 승리자였습니다. 사망이 쏘면 그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망을 이긴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사망은 더 이상 승리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증거 되었습니다.
사망은 예수님의 부활로 패배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정복하려고 했던 죽음의 권세, 그러나 그 어떤 것으로도 정복할 수 없었던 사망을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만이 부활하심으로 정복하였습니다.


3. 죽음의 권세가 사라진 세상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첫 열매라는 말은 그 다음에 있을 많은 열매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여 죽음 없는 세상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에서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1-22)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로 끝나지 않고 그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노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할렐루야


그러면 그런 영생의 축복을 우리가 언제 누리게 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그 때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라고 말씀합니다.
주께서 천사장의 나팔로 이 땅에 재림하실 때 모든 사람이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활한 생명들은 이 세상의 썩어질 것으로가 아니라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죽을 것이 아니라 죽지 아니할 것으로 옷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천국의 삶을 누리게 되는데 그 천국에서는 한 마디로 죽음이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천국의 삶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21:4)
천국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했던 사망이 없는 곳입니다.
사망이 없으니 애통하는 것이 없고 곡하는 것도 없고 아픈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살 곳이 바로 사망이 없는 천국입니다.
그 천국의 축복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로빈 S. 샤르마라고 하는 분이 쓴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너는 울음을 터뜨렸지만 너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은 기뻐했단다.
그런데 네가 죽을 때는 많은 사람이 울겠지만 그때 네 자신은 기뻐할 수 있도록 살아야한다.’
우리가 죽을 때 다른 사람들은 이별의 슬픔으로 울고 있을 때 우리가 기뻐하며 죽을 수 있는 비밀이 무엇일까요?
다시는 죽음이 없고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히지 않는 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확신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을 따라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간다는 확신이 아니겠습니까?


한 성도의 아들이 어릴 때는 교회에 다녔지만 장성해서는 발길을 끊었습니다.
우리 가정이 흔히 경험하는 모습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할 것을 권하지만 그때마다 아들의 논리에 자신이 압도당하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진정 하나님이 사랑의 신이라면 왜 태어날 때부터 불구자가 있게 하는가?”,
정말 하나님이 정의의 신이라면 어떻게 이 땅에 불의가 기승을 부릴 수 있는가”,
정녕 하나님이 전능의 신이라면 어찌 이 땅에 그토록 숱한 재난이 있을 수 있는가?”
이와 같은 아들의 반론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어서 목사님께 자문을 구합니다.
목사님의 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 세상의 삶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나 버린다면 아드님의 주장이 백 번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코끝에서 호흡이 멈추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이후에 다른 삶이 있다면 아드님의 주장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불구의 몸으로 태어났기에 한평생 영원을 바라보고 살아간다면,
불의한 자로 인해 고통 받기에 영원을 사모할 수밖에 없다면,
재난을 당했기에 비로소 영원에 대해 눈뜨는 자가 되었다면, 그보다 더 복된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져서 영원을 생각할 필요도 없이 살아가는 자가 있다면, 그야말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앞으로 아드님에게 신앙을 권유하려 하시지 말고 머지않아 반드시 관 속에 시체로 드러누울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일깨워 주십시오.
언젠가 아드님이 죽음이란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것임을 인식하게 될 때, 그는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게 될 것입니다.”(이재철)


여러분,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죽음은 예수님을 더 이상 주관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가두어둘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더 이상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계시고 앞으로도 살아계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자신을 믿는 자에게 부활의 생명 속에 참여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 부활의 축복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이 축복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8)
(2024.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