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시55:4-9)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

열려라 에바다 2024. 4. 1. 07:57

55편 4절-9절: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미쳤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황공함이 나를 덮었도다 나의 말이 내가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셀라)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저희를 멸하소서 저희 혀를 나누소서.


4절: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미쳤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황공함이 나를 덮었도다.’ 다윗이 왜 밤이 새도록 공포감에 두렵고 떨었을까? 상황이 매우 다급했던 것이 분명한데, 이 때 육신의 생명에 대한 염려가 더 컸기 때문인가, 아니면 영적 신앙생명의 문제에 대한 염려가 더 켰기 때문인가? 내용을 훑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우리가 자기의 육신에 관한 면으로 기도를 많이 하는데, 이것보다 앞서서 영적인 차원에서 위급함을 느끼고 염려 걱정하며 이를 위해 기도로 밤을 새운 적이 있는가? 아마도 별로 없지 않는가 생각이 된다. 마지막 시대에 세속화되고 조직화된 악한 비진리적 신앙사상들이 마치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때 산 그림자가 마을을 덮어 내려오듯이 말세의 성도들의 진리신앙을 죽이고 들어올 때 어느 쪽 생명이 더 두렵고 공포감이 드느냐? 이럴 때 바른 판단을 하고 자기의 영적인 생명을 위해 기도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참 옳은 성도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걸 말해주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 중에 특별히 여자성도는 세상 명절 때나 제사 때가 되면 시집 눈치 보랴, 남편 눈치 보랴 공포가 다가온다. 이 때 진리신앙을 가졌다면 육신의 생명에 더 신경을 쓰겠느냐, 영의 생명에 더 신경을 쓰겠느냐? 자기의 과거의 신앙을 생각해 봐라.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아무리 직분을 가졌어도 이런 거 하나 이기지 못한다면 하나의 종교인일 뿐이지 신앙인은 못 된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렇게 산다면 그 사고방식이 자자손손 대대로 내려가서 후손들은 한 술 더 뜨게 된다. 더욱 더 세상화 돼버린다. 이걸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신앙 믿음이 없을지라도 신령한 소원 목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들에게 신령한 것을 주려고 하신다. 그런데 교회의 인도자들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려고 하는 신령한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심판으로 불에 태워버릴 세상 것을 잔뜩 준다면 이건 말도 안 되는 거고, 이건 기독교 신앙이 아닌 예수이름을 빙자한 하나의 이방 신관적이고 미신적인 기독교인일 뿐이다. 예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믿음이다. 이렇게 나가면서 교회의 제도와 의식 등이 아무리 질서정연하고 엄숙할지라도 기독교 본질의 신앙정신 사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거다. 우리 주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거다.


신악성경에 보면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이적 기사가 일어나니까 누가 돈을 주고 이 능력을 사려고 했느냐? 시몬이다. 이 시몬은 세례도 받았고 자기가 가진 것을 다 내버렸다. 그런데도 사도가 말하기를 ‘너는 이 도에 대해서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에게 다가올 하나님의 어떤 재앙을 염려해서 기도를 한다든가, 아니면 목사님에게 이것을 위해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한다. 이걸 성경을 통해 보면 시몬처럼 참으로 간사스럽고 요사스럽고 악랄한 마음이다. 기독교 신앙의 세계에는 있을 수 없는 정신 사상들인데도 이런 일이 기독교 세계에 너무나도 많다. 심지어 교회에서 이런 교육을 하고, 이런 교육을 받은 자들에게 안수를 해서 목사로 내보내고 있다. 이건 교회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인데 수없이 많다. 기독교 세계에 이런 사고방식이 아주 충만해져 버렸다.


우리 입장에서 이런 걸 바로 잡으려고 하니 얼마나 대적들의 저항이 거세겠느냐? 그런데 속된 말로 이런 대적자들보다 더 미치고 팔딱 뛸 일은 이 진리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그런 자들과 동조하고 슬슬 같이 놀고 있다면 이건 원수대적보다 더 악랄한 거다. 말하자면 네가 어느 편이냐 그 말이다.


신앙의 세계는 처신이 분명해야 한다. 물론 진리신앙으로 나가지만 세상에는 관례적인 게 있어서 이런 걸 딱 끊지 못하고 둥그렇게 넘어가는 일이 있기도 하고, 또는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 교육의 차원에서 둥그렇게 넘어가야 할 일도 있긴 하다. 이 세상에는 두부모를 자르듯이 딱 자를 수 없는 일들이 허다하다. 그러나 ‘신앙이냐. 아니냐?’ 하는 데서는 완전히 흑백이 나눠져야 한다. 그런데 이게 아닌 아예 빛으로 가지 않고 어두움을 선택해서 간다면 이건 계속 넘어지는 거고, 이건 눈 자체가 까막눈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6절-8절: ‘나의 말이 내가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셀라).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성도다윗은 평화를 원하고 있고 안식을 원하고 있다. 그러면 누구와 평화를 원하는 거냐? 진리신앙을 버린 채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자들과의 평화냐? 다시 말하면 불신자들을 향해서 ‘내가 너희들이 하자는 대로 다 해 줄 테니 너희들이 나를 괴롭게만 하지 않으면 나는 항상 편할 것이다’ 이런 평안이냐?


성도가 진리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을 싫어하는 자들과 평화가 될 수 있는 거냐? 성도가 ‘내가 너희들이 하자는 대로 다 해 줄 테니 너희들은 나를 헐뜯고 괴롭게 하지 말아라. 그러면 나는 편안해진다’ 라는 말을 한다면 이 말을 듣는 제 삼자인 우리가 판단을 할 때 이 말이 옳은 것으로 들리느냐? 인간이 편해지는 요소가 인간들로부터 오는 것이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냐? 진짜 평화는 어디로부터 오는 거냐? 하나님으로부터다.


아내는 믿고 남편은 안 믿을 때 아내가 교회만 갖다오면 남편이 신경이 곤두서서 ‘어디에 갔다 왔느냐? 헌금을 얼마나 갖다 주었느냐?’ 라고 하면 그 가정은 편할 날이 없다. 아내가 교회에 다니면서 살림도 잘 하고, 남편에게도 잘 하고, 아이들에게도 잘 하는데도 남편이 이런다면 이건 일반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럴 때 아내는 자신이나 남편을 위해 ‘하나님, 이거 어쩝니까? 하나님께서 간섭을 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라고 기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부터 하나님 앞에 바로 서도록 해야 한다. 십일조를 내는 것은 남편이 불신자라면 상의를 해서 내는 게 아니다. 아내만 예수를 믿는다면 그 집의 주격은 남편이 아닌 예수 믿는 아내다. 아내의 신앙을 따라 하면 되는 거다.


성도가 안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맞춰주면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겠느냐? 믿는 내가 아예 순교를 당하는 게 좋지 힘든 거다. 그들과는 평화가 없더라도 하나님과는 평화가 돼야 한다. 내가 하나님과 평화가 되면 하나님이 누구 편이 되시겠느냐? 내 편이 되신다. 그래서 성도는 지혜로워야 한다. 내가 하나님께로 의사단일이 되면 하나님은 내 편이 되신다. 이러면 하나님은 내 대신 나를 대적하는 원수들과 싸워주신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기부터 살펴라. 그러지 않은 상태에서 나에게 원수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 저 자를 때려주십시오’ 하면 ‘이놈아, 너부터 고치자’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악한 자들을 얼마든지 쳐서 없앨 수 있다. 그런데 악한 자들을 없이하지 않는 이유는 악한 자들을 들어서 성도를 바로 세우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믿는 내가 하나님 편으로 산다고 해도 꾀임을 받아서 언제 내 마음이 확 돌아설 런지 모른다. 이걸 아시는 하나님께서 신앙실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한 쪽에 악한 자들을 내버려두는 거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이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나갈 때를 대비해서 반대편에 악한 자들을 키우고 계신다’ 하는 것을 느끼며 사느냐? 아마 못 느낄 거다. 못 느끼니까 그냥 사는 거다. 옳은 말을 해도 듣지 않는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반대편에 악인을 키우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성도를 바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악한 자들에게 가서 붙어 살면 되겠느냐? 특별히 목회자들마저 정신이 흐려져 있다면 어찌 되겠느냐? 목사님이 악한 자들의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교회가 어찌 되겠느냐? 믿는 내가 하나님께서 신경을 쓰시도록 산다면 자기가 편할 수 있겠느냐?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셀라).’ 성도다윗은 하나님과 평화하기 위해서 광야로 나가고 싶다고 한다. 이건 현실도피가 아니라 하나님과 평화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다. 광야로 가면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고 오직 주만 바라보는 거다. 이 마음을 광야로 나가고 싶다고 표현을 하는 거다.


집안에 속을 썩이는 자식이 있을 때 부모의 마음이 ‘나 혼자 저 광야로 나가서 편히 살고 싶다’ 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는 신앙심에서 나온 게 아니라 고통스런 환경을 피해서 편히 살고 싶다는 거다. 다윗은 이런 마음으로 광야로 나가고 싶다는 게 아니다.


자기가 진리로 무장이 되어있어서 하나님의 보호가 있다면 어디를 가던 그곳에 악한 자가 있더라도 마음이 편하다. 반대로 하나님 앞에 바로 못 서면 어디를 간들 편하겠느냐? 그러니 고치는 수밖에 없다. 일단 세상에 태어났으면 다시 엄마 뱃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거고, 그렇다고 해서 산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거고, 어쨌든 이기고 나가야 하는데, 이러려면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다른 도리가 없다. 울고 싶거든 하나님 품 안에서 실컷 울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우느냐?’ 라고 하시면서 위로가 빨리 온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 라는 말 끝에 ‘셀라’가 붙었다. ‘셀라’가 무슨 뜻이냐? 어떤 말 끝에 그 말에 동의한다는 일종의 장단을 맞추는 소리다. 한국사람들이 판소리를 들으며 말 끝에 ‘좋다’ 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거다. 그러면 다윗이 말 끝에 왜 ‘셀라’ 라고 하는 거냐? 신앙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주 좋다는 의미에서 ‘셀라’ 라고 하는 거다. 우리도 다윗의 신앙의 깊이를 생각을 하면 ‘다윗의 이 기도가 참 좋구나’ 라고 하면서 ‘아멘’ 하게 된다.


다윗이 광야에 가서 살고 싶다는 것이 악한 자들의 악한 행동들을 안 봤으면 좋겠다는 말인지, 아니면 악한 자들이 다윗에게 와서 위협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인지, 아니면 악한 자들이 멀리 가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인지, 아니면 악한 자들이 참으로 두렵다는 말인지? 우리가 어떻게 생각을 해야 자기 신앙에 제일 좋겠느냐?


몸은 같이 있어도 정신 사상적으로는 멀리 떨어질 수도 있다. 소원과 목적과 취미성이 악한 자들과 같이 있을 때 내가 그것에 물들지 않고 나는 나대로 오직 하나님께로만 나가면 정신 사상 면에서 악한 자들과 멀리 떨어진 거다. 한 집안 식구라도 이렇게 되면 신앙적인 대화는 서서히 끊어진다.


광야는 인간들이 살 곳이 못 된다. 그래서 광야에는 인간들이 없다. 인간들이 없으니 인간들의 노래도 없고, 인간들의 싸움도 보이지 않고, 인간들의 한숨도 근심 걱정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 라는 말의 의미는 다윗이 오직 하나님과만 인격적 관계를 맺고 살고 싶다는 거다.


이걸 성도의 현재적 영적 계시적으로 보면 교회들이 온통 세상차원으로 돌아가면 진리의 참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신앙이 질적 고차원적으로 올라가는 것이 광야로 나가는 정신이다. 성도가 광야로 나가면 하나님을 만난다. 질적으로 신앙차원이 올라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거고, 하나님을 만나려면 광야로 올라가야 한다. 교회들이 종교적인 세상으로 흐르게 되면 이는 벌써 악한 것이니 이럴 때 인간만 보면 안 된다. 조직만 보면 안 된다. 물질만 보면 안 된다. 계:을 보면 참 성도는 이런 것에 의지하지 않는다.


제자들이 주님께 ‘말세에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라고 물으니까 나라와 나라끼리, 민족과 민족끼리 싸움이 일어나고 유혹과 미혹이 있게 되는데 이 때 사람들을 주의하라‘ 라고 하셨다. 말세 된 오늘날을 보면 일반적으로도 결코 좋은 세상이 아니다. 먹고 마시고 교통이 좋다고 해서 좋다고만 생각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악한 것을 못 보게 해서 그렇지 정말 하나님의 보호가 아니면 하루아침에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질 수도 있다. 신앙 면으로도 처처에 믿는 자들을 유괴해가려고 하는 악한 세력들이 판을 치고 있다.


악한 자들이 다가올 때 ‘나는 나쁜 놈이다’ 하며 다가오느냐? 지금 이단자들이 별 수단을 다 쓰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귀로 듣기에 아무리 달착지근한 말일지라도 영원 궁극적 목적이 아닌 말이면, 하나님의 의사 단일성적인 신앙이 아니면 아예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를 위해 우리가 다윗처럼 생각을 깊이 하면서 기도를 해야 한다.


8절: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폭풍과 광풍’이란 큰 사건을 말한다. 개인적인 신앙이건 교회적인 신앙이건 하나님의 본질인 진리신앙에서는 똑같아야 폭풍과 광풍을 피할 수 있다. 악인의 압제를 피하려면, 자기의 신앙생명을 안 죽이려면 질적으로 광야의 신앙사상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세밀한 분석과 판단이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만이 폭풍과 광풍을 피할 수 있고 이길 수 있다.


폭풍과 광풍을 누가 일으키는 거냐? 하나님의 허락 하에 되는 거다. 이 폭풍과 광풍을 또 다른 각도로 신앙 사상적인 면으로 보면 비진리적 육적 세상적인 신앙운동이 세차게 일어나서 부는 걸 말한다. 성도에게 있어서 전쟁이나 기근 이런 게 몰려올 때는 그 이전에 신앙 면의 폭풍과 광풍이 먼저 세차게 일어난다. 반드시 그렇다. 나는 지금을 그 때로 보고 있다. 나중에는 더 세차게 불 것이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현재적으로 자기의 신앙이 정신적 차원에서 진리에 붙어있는지, 진리에 붙어서 나온 감화 감동으로 사는 건지 세밀하게 분별을 해야 한다. 비진리적인 신앙사상이 조직적 구조적으로 확산이 되어나가는 조짐이 보이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신앙적인 면의 폭풍과 광풍이 몰려오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홍수처럼 떼거지로 한 쪽으로 몰린다. 우리는 이럴 때 미리 광야신앙으로 나가 있어야 한다.


9절: ‘내가 성 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저희를 멸하소서. 저희 혀를 나누소서.’ 글자대로 눈으로 보이는 면으로 보면 이런 짓을 하는 자들은 정말 악독한 자들이요, 폭도들의 세상으로 보인다. 이 폭도들을 일반 사회적인 폭도들로만 보지 말고 교회 안의 신앙 정신적 측면에서 영의 눈으로 보는 폭도를 봐야 한다. 이게 항상 우선적이다. 영적인 면에서 보는 강포는 폭도들의 언행이고 주장성들인데,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바른 길, 옳은 길, 진리 길로 가지 못하게 주장하는 이질적, 세상적, 이방 사상적, 육적인 운동들을 말한다.


‘분쟁’이란 성이 나서 다투는 것인데, 교회 안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교인들이 진리본질을 잡지 못해서 서로의 주장성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비진리의 성도들은 마음 속에 항상 독기가 품어져 있다. 옳은 성도도 독기가 남아있지만 점차적으로 없어지는 상태이지만 비진리의 교인들은 독기가 그대로 들어있다. 어떻게 보면 그 독기가 더 진해진다. 충성봉사를 많이 하면 할수록 더 진해질 수도 있고, 성경을 많이 알수록 더 진해질 수도 있다. 이게 폭발이 되면 사람을 때려잡는 일이 나올 수도 있다. 예수님 당시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런 일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거다. 이런 사람들과는 아예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이니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그런 데서 지혜롭게 피해버려라.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신데 교회가 주님의 의사에 따르지 않고 인간 자기의 주장성만 커지면 먼저는 자기 스스로의 속에 분쟁이 생기게 되고, 교회적으로도 이러쿵저러쿵 하며 교인들끼리 분쟁이 생기게 된다. 각자 자기의 뜻을 펼치려고 하니 분쟁이 생길 수밖에 없는 거다.


교회는 누구에게 맞춰야 하느냐?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맞춰야 한다. 목사부터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맞춰야 한다. 목사가 성경을 들고 아무리 ‘하나님 운운’ 할지라도 성경문자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의사성을 말하지 않고 표면적 액면적인 면만 말을 한다면 이건 종교적 세상을 말하는 것이고, 종교적 세상은 목사 자기주장이고 인본주의 사고방식일 뿐이다. 우리교인들은 어디를 가서 설교를 듣더라도 먼저 설교의 목적관을 분별을 해서 들어야 할 것인지, 안 들어야 할 것인지 판단을 해야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