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요6:14-21)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

열려라 에바다 2024. 4. 1. 07:58

6장 14절-21절: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14절: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뭘 보고 이 말을 하는 거냐? 눈으로 보이는 이적 기사나 표적을 보고.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배부르게 먹은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향해서 ‘아, 사람 참 좋다’ 라고 하는 거다. 교훈을 보고 듣고 깨달아서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는 면에서 이런 말이 나와야 하는데 자기를 배부르게 해 주니까 예수님을 좋다고 하는 거다.

 

물론 예수를 믿다 보면 예수님께서 아픈 사람을 싸매주기도 하고, 배가 고픈 사람에게 떡을 먹여주기도 하는 거지만 목적을 세상에 두고 눈으로 보이고 피부로 느끼는 것에 염두에 두면 자기는 속기 쉽다. 자기의 육신의 세상살이의 소원 목적을 만족하게 채워준다면 이런 말을 안 할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은 사람들의 육신의 요구를 위해 행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들의 소원을 이뤄주려는 게 아니라 인간 너를 만드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의 위치로 끌어올리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그런데 신비로운 체험이나 육신의 만족을 위해 예수 믿는 사람이 많다.

 

마귀가 예수님께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했는데,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은 이치가 아니다. 주님은 이치를 어기지 않는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이런 것 저런 것을 다 동원하시지만 당신이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돌로 떡을 만들어 먹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들은 돌로 떡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이적과 기사를 보려고 한다.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이적을 본 무리들이 모세가 신18:5에서 말한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모세가 ‘나 같은 선지자를 보내겠다. 너희는 무엇이든 그의 말을 들으라’ 라고 했는데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는 하지 않고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와 표적에만 관심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이적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그렇게 하시는 주님의 뜻을 알려고는 하지 않고 물이 포도주가 된 이적만을 신기해했다.

 

예수님께서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해서 구정물이 아닌 깨끗한 물을 채우니 이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었다. 이는 말씀에 순종을 할 때 사람이 변화가 되어서 맛이 있는 사람으로 나온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자기 속을 진리이치로 가득 채워야 맛이 있는 사람이 된다는 거다. 진리말씀으로 채워지지 않은 것만큼 세상이 들어 있는 것이니 자기 속을 말씀으로 가득 채우라는 거다. 하나님의 진리이치의 말씀을 가득 채워라. 생명이치의 말씀을 채워라. 신적 도덕성의 말씀을 가득 채워라. 이러면 ‘인생이 사는 맛이 이런 거로구나’ 하게 된다.

 

지금 세상사람들은 사람 사는 맛을 모른다. 사람 사는 맛을 자꾸 물질성에, 돈에 두니 사람이 망가지고 문제가 생긴다. 그러면서도 망가진 줄도 모른 채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인간을 세상에 내셨는데 이 목적을 모른 채 사망계 안에서 헤매고 있다. 이런 상태로는 아닌 말로 시집장가를 가도 생명의 씨앗이 없다. 인간이 이렇게 사는 것은 존재적으로는 인간이지만 짐승들이 먹고 마시고 새끼 낳고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이 사는 거다.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혀주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고, 세상을 만들었고, 역사를 진행하고, 만물을 섭리 보존하고, 심지어 악령과 마귀까지 동원을 시켰는데 인간이면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진 게 있느냐? 인간창조의 목적, 재세기간의 존재목적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것인데 거짓 종들은 이에 관한 교훈은 주지 않고 세상을 자랑하고 세상 것을 구하라고 한다. 이건 마귀 짓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늘의 것을 구하지 않고 땅의 것을 목적으로 살면 모든 사고방식이나 이해타산이나 가치평가가 저질이다. 그러니 사람을 볼 때도 물질이나 돈을 가진 것으로 판단을 한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살게 되면 환경에 다스림을 받게 되고 돈에 다스림을 받게 되니 이건 세상과 죄에 노예다. 이렇게 살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게 다 날아간다.

 

예수님의 이적이나 표적은 그 분의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니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님의 이적이나 기사나 표적을 볼 때 그렇게 하시는 그 분의 인격을 깨달아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는 않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려고 하면 세상에 휘말려서 환경의 소산으로 살 수밖에 없다. 학생이 시험을 본 후에 상을 받는 것은 이 학생에게 공부의 실력이 있기 때문인데 상을 타는 것을 본 다른 학생이 이 실력은 욕심을 내지 않고 상만 타려고 하면 그 상이 자기에게 주어지느냐?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을 이런 식으로 믿지 말아라.

 

자기가 하나님의 설계 속에 들어가지는 않고 아무리 세상적인 포부를 가지고 세상에서의 평안과 영광의 계획을 짜놓아도 하나님께서 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거고, 이런 계획은 물질성이라서 언젠가는 다 날아간다. 우리는 자기의 수권범위 내에 있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의 실력으로 자타의 구원을 위해 이용 활용하는 것뿐이다.

 

예수님께서 이적이나 기사를 행하시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이상한 짓을 하는 것과는 질이 다르다. 사람들이 행하는 이적 기사는 하늘의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적 기사 속에는 내가 그 분의 속성으로 닮아지는 게 들어 있다. 창:에서 계:까지 다 하나님의 이적 기사요, 다 나에게 하는 말씀이다.

 

믿는 사람들이 가룟유다가 지옥에 갔다고 하면서 예수를 팔아먹은 나쁜 놈이라고 하는데, 성경을 이렇게 보면 가룟유다가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된다. 어떤 성경이라고 해도 나와 관계가 없게 보면 안 된다. 가룟유다가 스승을 팔아먹고 자살한 것이 성경에 기록이 된 것은 가룟유다가 지옥에 갔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돈과 바꿔먹었듯이 예수 믿는 내가 예수님을 돈과 바꿔먹는다면 나도 가룟유다라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예수를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가 되려고 한다면 이것은 예수를 세상에 파는 거다.

 

가룟유다가 지옥에 갔다고 한다면 이 말을 하는 사람이 가룟유다처럼 예수님을 돈과 바꿔친다면 자기도 지옥에 가게 된다는 말이 된다. 말씀의 이치를 잘못 알게 되면 이런 오류에 빠지게 된다. 사람을 볼 때 상대의 인상을 보고 도둑놈 같다고 하거나 지옥에 갈 놈이라고 하게 되면 아닌 말로 이렇게 말을 한 자기가 예수를 믿다가 어떤 사고로 인해 얼굴이 흉하게 변한다면 자기도 지옥에 가는 거냐? 불교인들은 자비를 외치고 ‘참자. 참자’ 하니까 얼마나 선하게 보이느냐? 그러니 이 사람들이 천국에 가느냐?

 

15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오병이어의 이적을 체험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세상적인 소원 목적을 채워주실 분으로 알고 왕으로 보시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마음을 아시고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다. 무리들이 아무리 당신을 왕으로 모신다고 해도 예수님은 자신들의 소원 목적을 이루는 일에 부려먹으려는 것임을 아시고 피해버린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이나 이종교인들은 다 자기가 왕으로 되어 있고, 다른 사람을 종으로 부려먹으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하늘의 왕으로 만들어 주려고 오셨다. 왕이 되려면 지혜지식성이 있어야 하고, 신적인 도덕성이 있어야 하고, 신적인 능력성이 있어야 한다. 당신의 이런 속성을 우리에게 주어서 우리를 당신처럼 만들어 주시려는 게 주님의 뜻이다. 사람이 이렇게 되어야 하나님 앞에 창조의 목적대로 바른 사람이 된다. 이게 왕이다.

 

예수님께서 혼자 산으로 떠나신 것은 당신은 세상의 왕이 되려는 마음이 없다는 거다. 교인이 아무리 많고 교인들의 입에서 말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세상 육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이 있는 곳에는 주님이 안 계시고 안 가신다. 세상 육적인 기도, 세상 육적인 마음 속에 주님은 안 계신다. 그래서 이런 사람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안 이뤄진다. 사람의 마음에 옳은 진리이치가 들어가면 이 사람에게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성령의 열매가 열리게 되는데, 성경에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말하는 것은 성령에 감화된 사람에게서 나오는 믿음의 언행심사의 맛을 말하는 거다.

 

주님은 자기의 세상적인 소원 목적을 이루어주는 왕으로 삼으려고 하는 기도는 듣지 않으신다. 성경에 보면 기도가 제단의 금 대접에 담겨서 올라간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자타의 이룰구원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가장 귀한 기도라는 것을 말하는 거다. 이룰구원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그 뜻을 따라 사는 거다. 그러니까 자기의 몸이 아플 때나 일을 할 때 육신을 위한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

 

자기의 육신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허락 하에 자기의 육신에 문제가 생긴 거다. 그러니 어떤 기도를 해야 하겠느냐? 자기에게 사건 환경을 주시는 것은 깨닫게 해서 신앙의 차원을 올려주려는 것이니 자기에게 닥친 사건 환경 가운데서 이룰구원의 깨달음을 달라고 기도를 해야 한다. 이런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이 되는 기도다. 사건 환경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영원한 게 아니다. 사건 환경이 먼저 자기를 떠나던, 자기가 먼저 세상을 떠나던 언제고 자기를 떠나는 것이니 떠나기 전에 그 가운데서 이룰구원을 이뤄야 한다.

 

장애를 가진 사람은 장애로 인해 살기가 힘이 든다고 해서 원망불평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몸이 장애로 고통을 겪는데 신앙까지도 장애인이 되면 안 되겠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영인성장을 위해 남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이러면 임시적인 장애의 고통이 오히려 자기에게 영원한 영광을 가져다주게 된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 각자가 자기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놓고 이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게 이룰구원의 삶이다.

 

16절-21절: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이 말씀을 그냥 읽으면 소설처럼 생각이 되지만 이 속을 들여다보면 지금의 믿는 자기도 이런 세월 이런 사건을 다 겪고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제자들도 사람이요, 주님도 사람이요, 나도 사람이다. 그리고 영의 눈으로 보면 주님이 그 때도 그 역사를 하셨고, 지금도 그 역사를 하고 계신다. 영의 눈이 뜨인 사람은 지금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역사를 하시는 것을 인격적으로 느낀다. 이게 진짜 체험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펄펄 뛰고 ‘입신을 했네. 뭘 보았네. 뭘 들었네’ 하는 건 체험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왕 삼으려는 것을 아시고 혼자 산으로 올라가셨는데, 이는 단순히 왕이 되기 싫어서 올라가신 것만이 아니라 제자들의 훈련을 위해서, 깨닫게 해 주려고 올라가신 거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의 이 뜻을 깨닫지 못해서 주님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지 않고 자기들끼리 바닷가로 내려와서 배를 타고서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는데 밤이 되어도 주님이 오시지 않자 자기들끼리 노를 저어서 가버나움으로 향했다.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께서 산으로 올라가시면 얼른 그 뒤를 따라 같이 산으로 올라가는 게 자연스런 일인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해가 지기 전에 내려오셔서 우리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시겠지’ 라고 생각을 했으니, 이로 인해 제자들 속에 인간적인 주관성이 가득했음이 드러나 버렸다.

 

예수님께서 ‘너희들 먼저 가버나움에 가 있어라’ 라고 하시지도 않았고, 산으로 가시는 주님을 따라가지도 않았고, 해가 지니까 ‘주님이 곧 오시겠지’ 라고 하며 기다리다가 주님이 오시지 않으니까 자신들만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간 것은 우리들에게 제자들의 수준을 말해주고 있다. ‘이 수준에서 놀면 그 다음에는 어떤 장면이 나오겠구나’ 하는 구원도리를 깨닫게 하는 장면이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니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출발을 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는데 바다로 출발을 하면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거다. 시대가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데도, 자기의 지능지수가 어두운 상태인데도 자기 딴에는 잔뜩 계획을 하고 출발을 했다면 그 앞에 문제가 놓인 거다. 제자들이 힘껏 노를 저어서 앞으로 나가고 있는데 점점 더 캄캄해지고 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데 출발을 하는 장면이 많이 있다. 제자들의 이 활동은 사람들의 마음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캄캄한 바다를 가고 있는데 바람도 강해지고 덩달아 파도도 높아진다. 바다는 바람이 불면 파도도 높아지듯이 세상은 사람이 불면 민심이 출렁이게 된다. 지금 세상에 무슨 바람이 부느냐? 정치바람, 물가바람 유행바람, 전쟁바람 등등의 바람이 교차하는 곳이 세상인데, 이런 와중에 기독자가 어떤 바람에 놀고 있느냐?

 

성경을 통해 보면 미국도 소련도 중국도 북한도 한국도 성경의 사상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어느 상황을 보면서 ‘이건 어느 나라를 말하는 거다’ 라고 하면서 유형적인 세상의 나라에 붙여서 말을 하면 안 된다. 어느 나라가 성경에서 말하는 나라와 같더라도 모든 성경은 교회에게 주는 말씀이니 그런 나라를 보면서 교회를 봐야 한다. 성경은 하나의 그림책이요, 보조계시요, 일반계시요, 비사와 비유이니 성경에서 어느 나라를 보여주는 것은 세상을 들어서 교회를 보여주는 거다. 그러니 그런 것을 보면서 교회가 어떤 정신이 움직이는지를 봐야 한다. 이걸 못 보면 세상에 가서 붙게 되고, 그곳을 자기의 피난처로 알아서 그곳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바람이 세게 불면 파도가 점점 크게 일어난다. 이럴 때 배가 바다 가운데 있게 되면 이리 저리 흔들리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게 된다. 아무리 힘을 써서 노를 저어도 사람만 지치지 배는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결국은 노를 젓는 사람의 진이 다 빠지게 되고, 이러면 먹은 것을 토하게 된다. 이걸 신앙적으로 보면 자기가 세상에 휩쓸려서 정신을 못 차리고 헤매고 있다면 자신의 이런 모습을 얼른 깨닫고 자기 속의 더러운 것을 다 내뱉고 철저히 회개를 해야 한다. 세상에 빠져 살다가 풍랑 파도를 만났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말씀기준으로 회개를 해야 한다.

 

그러면 산으로 올라가신 주님께서 제자들이 바다 가운데서 고통을 겪는 장면을 모르시느냐? 세상역사를 주권적으로 움직이고 섭리하는 분이니 다 아신다. 역시 지금의 내가 겪는 일이나 나의 언행심사도 다 아신다. 우리가 사건 환경을 겪을 때 우리의 형편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로 무슨 기도를 하기를 원하시겠느냐? 세상에서 평안히 잘 먹고 잘 사는 사고방식을 가지지 말아라. 이런 기도는 헛 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