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린도전서의 배경

열려라 에바다 2024. 4. 8. 08:01

고린도전서의 배경

고린도전서

 

1. 들어가는 말

고린도서신을 보다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린도교회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통해서 고린도서신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즉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역사적 사회-문화적 배경을 탐구하지 않고서는 고린도서신을 정확히 분석할 수 없다. (독자로서의) 우리는 바울로부터 직접 그가 고린도서를 쓰면서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를 물을 수도 없고 그의 답변을 들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문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린도 교회의 역사적 사회-문화적 탐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1세기 고린도교회의 사회-문화적 콘텍스트에서 고린도서가 의미했던 것은 무엇이며, 그것이 현대 교회의 사회-문화적 콘텍스트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잘 이해하려면, 그 사회-문화적 모체(matrix)가 되는 1세기 고린도 시(市)의 사회-문화적 현상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때 우리는 바울의 의도(intention)와 그의 서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서 일어났던 특별한 문제점들을 그 시대의 일반적인 상황과 관련시켜 그의 수신자들에게 독특한 방법으로 편지를 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바울서신의 독특성(distinctiveness)은 바울 시대의 역사적 사회-문화적 콘텍스트를 추적할 때 뚜렷이 드러난다. 또한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특별한 특징은 사도 바울 당시의 고린도 시의 일반적인 사회-문화 현상을 추적할 때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즉 고린도교회의 독특성과 유일성은 당시 고린도 시의 일반성과 유사성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의 문제점들과 그에 따른 갈등과 분쟁의 원인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린도 시의 일반적인 사회-문화 현상과 고린도교회 내의 특별한 사회-문화적 상황을 관련지어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2. 고린도 시(市)의 사회-문화적 특징들: 일반적이고 공통적인 현상

먼저 우리는 헬라-로마 주요 도시들(major cities) 중의 하나인 “고린도(Corinth) 시(City)”의 일반적인 현상으로써 사회-문화적 특징과 상황 그리고 그 문제점들을 탐구함으로써, 고린도 텍스트(text)의 의미와 고린도교회의 특별한 콘텍스트(context)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 고린도 시(市)와 시민: 지리적이고 환경적인 요소

고린도 시는 고린도 걸프(Gulf)와 이오니아 바다(서쪽에 샤론 걸프가 있고 동쪽에는 에게 해가 있는)를 양분시키는 좁은 지협(isthmus)에 위치해 있다. 고린도 시는 서쪽에 레기움(Lechaeum) 항구와 동쪽에 겐그레아(Cenchreae) 항구를 두고 있으며, 그 두 항구를 통제하는 대도시였다. 그래서 고린도 시는 지중해 무역과 수공업의 중심 도시였다.

고린도 시는 기원전 146년에 파괴된 이후 기원전 44년에 쥴리어스 시이저의 명령으로 로마식으로 재건된 도시였다. 로마의 식민지로서 고린도 시는 로마적인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시는 로마식 스타일과 헬라적인 요소가 결합된 이상적인 헬라-로마 도시였다.

고린도 시민들은 주로 로마로부터 이주해온 자유민 남녀였다. 거기에는 로마 군인들, 피식민지인인 약간의 헬라인들과 그 후손들 그리고 제 3 세계인들로서 유대인들이 포함되었다. 비록 공식 언어는 라틴어였고 로마법이 도시 전체를 지배하였지만, 헬라어와 헬라 문화는 그 도시민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바울의 시대에, 고린도 시는 로마의 전략 요충 도시로써 무역과 수공업의 중심지였으며, 관광 산업과 이방 종교의 주요 순례지로 그 명성을 떨쳤다. 바울 당시의 고린도 시에는 옛것과 낡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 했고, “헬라-고린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로마제국은 새 고린도를 건설할 때에 옛 헬라 도시의 전통을 싹 없애버리려 하였다. 그래서 “로만-고린도(Roman-Corinth)”는 새로운 문화-사회적 정체성(identity)을 추구하려는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예를 들면, 새 고린도 시에는 시민적 자만(civic boasting), 자기 과시(self-promotion), 개인적 자부심 등이 도시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관은 “명예-치욕 가치관”(honor-shame value)이었다. 그 가치관은 고린도 시민들 사이에 지배적인 가치관으로써 “대중이 자신을 어떻게 알고 있나”(public recognition)에 초점을 맞추는 가치관이었다. 따라서 바울 당시의 고린도 문화에서 개인의 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척도는, 어떤 개인의 성취를 대중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었다.

1) 명예-치욕 가치관(Honor-Shame Value)

명예-치욕 가치관은 로만-고린도 뿐 아니라 1세기 지중해 지역의 중요한 가치관 중의 하나였다. 당시 그 세계의 “명예”는 어떤 힘이나 성별 또는 종교가 상호작용을 하여 사회적으로 적절한 대응과 행동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공적으로 받아들일만한 사회적 행동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헬라-로마 세계의 명예란 오늘날 돈과 같은 어떤 중요한 신용으로써 얻을 수 있었다. 명예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날 때부터 혹은 고귀한 신분의 사람이 수여함으로 획득하는 “자생적 명예”(ascribed honor)와 도전과 응전(應戰)의 사회적 게임을 통해 얻는 “성취적 명예”(achieved honor)가 있었다. 이 둘 중에서도 특히 “성취적 명예”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성취적 명예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우 제한적인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사회적 상호작용인 “도전과 응전”이라는 매우 중요한 “사회적 게임”을 통해서 오직 승자만이 명예를 얻었다. 그리고 도전과 응전은 세 가지 국면으로 나타났다:

1. 도전(도전자에 의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 행동)

2. 메시지를 수락(개인과 대중 모두)

3. 도전을 받은 개인의 응전(적극적 거절 혹은 승인, 혹은 부정적 거절)과

대중의 평가.

도전과 응전 게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도전자와 응전자의 자격이 동등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먼저 응전자는 자신이 도전자와 동등한지를 식별해야만 한다. 그 다음 요건은 응전(response)이다. 응전자는 도전자의 메시지에 대해 경멸, 조소 등과 같은 적극적 거절을 취하든지 아니면 도전자의 제의를 받아들이든지 선택하여야 한다. 무반응이나 응전의 실패는 치욕(恥辱)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대중에 의한 공적 평가가 있다. 명예를 얻느냐 잃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공공의 판결(사회 대중의 견해)에 달려있다. 그 대중의 평가는 도전자나 응전자를 파멸시킬 수도 죽일 수도 있었다.

요약하여, 헬라-로마 사회의 명예-치욕 가치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개인적인 판단보다는 사회적인 평가와 인정이었다. 그래서 사회단체로부터의 평가와 인정은 개인의 결정 보다 상위(上位)에 있었다. 둘째, 단체는 항상 개인보다 우위에 있었다. 셋째, 명예-치욕 가치는 사회적 신분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사회적 상호 작용은 명예를 얻거나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도전과 응전으로 이루어졌다. 도전에 대한 무반응은 치욕으로 인정되었다.

2) 사회적 관계성과 역할(Social Relationships and Roles)

헬라-로마 사회에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가 있었다. 관계성의 과정에서 뚜렷이 구별되는 두 그룹이 생겼다: 강자와 약자, 부자와 가난한자, 상류층과 하류층, 기득권층과 비기득권 층, 시혜(施惠)자와 수혜자, 주인과 하인 등. 이 두 그룹은 관계성 속에서 각각의 역할을 하였다. 즉, 각 그룹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상대를 이용하였다.

로만-고린도 시에도 똑같은 사회적 관계성이 존재하였다. 또한 그 고린도 시에 있는 고린도교회에도 보이지 않게 그 사회적 관계성이 작용하였다. 고린도교회에도 부자와 가난한 자는 있었고 이들의 사회적 관계성과 역할이 또한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타이센(G. Theissen)은 고린도교회 내에 로만-고린도의 사회적 상류 계급으로서의 부자들의 역할에 주목하였다. 아울러 고린도교회 내에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 사이의 내적 갈등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고린도교회 내의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로써 사회적 상류 계급인 부자들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초우(J. K. Chow)는 로만-고린도 시와 고린도교회의 사회적 관계성과 역할을 후원자의 관계성과 역할로 보았다. 후원자와 수혜자는 불평등의 관계요, 수직 관계였다. 전자는 물질을 제공하고 후자는 복종과 섬김을 제공하는 일종의 불평등한 거래 관계였다. 이 관계는 하류층으로부터 로마 제국 황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였다. 그리하여 초우는 이 후원자의 관계성이야말로 고린도 시와 고린도교회의 긴장과 문제점들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열쇠라고 보고 있다. 마샬(P. Marshall)은 선물을 주고받는 자 사이의 갈등과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헬라-로마 사회에서 관계성의 실패를 선물 교환의 실패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선물을 거절하게 되면 적이 되고 선물을 호의적으로 받음으로 친구가 된다는 것이다. 선물을 받은 자는 답례해야 할 의무가 생기는데 이것은 사랑과 우정의 신호이고 이 의무를 게을리하면 평등한 친구 관계는 깨어지고 종속적 사회관계가 형성된다. 더욱이 선물을 거절하면 더 이상의 친구 관계는 존속하지 않고 사랑은 적의(敵意)로 변한다. 이상 세 학자(타이센, 초우 그리고 마샬)의 사회적 관계성에 대한 이론을 간략하나마 살펴보았는데, 우리가 이 세 학자의 이론들을 참고한다면, 고린도교회의 문제점들과 갈등 상황을 보다 잘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나. 무역과 수공업(Trading and Manufacturing): 사회-경제적 상황

고린도 시의 사람들은 사회적 상황 뿐 아니라 경제적 여건에서도 매우 급진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경제적 변혁의 주요 요소로써 공예품 생산, 은행, 정부 통제 그리고 이스트미안(Isthmian) 운동 경기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래서 고린도 시는 부(富)의 축척과 부의 적절한 사용을 통해 영예로운 사회적 신분을 획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그 도시는 사회적 명성과 신분을 획득할 기회를 노리는 상인, 은행인, 예술인(특히 동으로 만드는 공예품 기술자) 등으로 가득 차 마치 “야심적인 사회 시장” 같았다.

 

다. 관광 산업(Tourism): 사회-문화적 여건

이스트미안(Isthmian) 게임, 임페리얼(Imperial) 게임 그리고 케자리안(Caesarean) 게임 등과 같은 연례 체육 경기는 고린도 시에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체육 경기 동안에 “도시 주도하의 제사(the imperial cult)”가 강력하게 거행되었고, 제사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특히 제사장)을 맡은 시민은 아주 명예로운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위의 상황으로 보아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교회 일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다른 종교적 행사나 그것으로부터 얻어지는 사회적 유익들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라. 다양한 이방 종교들(Various pagan religious)

고린도 시는 이방 종교 순례지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다양한 이방 종교들이 성행하였던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데 고린도 시의 대부분의 이방 종교의 특징은 그것들이 “성적인 부도덕 행위”(sexually immoral practices)에 탐닉하였다는 사실이다.

1) 아폴로(Apollo)

아폴로는 예언의 신으로서 “델피의 예언”(the oracle of Delphi)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바울 시대에 델피의 예언은 여전히 만연되어 있었고, 이러한 영향들 때문에 고린도 시의 사람들은(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도) 예언을 이방 종교적 문맥에서 취급하는 경향이 많았다. 심지어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 어느 여인들은 교회에서조차 델피적 예언의 종류들(예를 들면, 운명, 아이 생산, 행운 등)을 묻곤 했다.

2) 데미터(Demeter)와 코어(Kore).

이 신전은 은밀한 제사 의식으로 유명하다. 이 제사 의식에는 여 사제인 젊은 여인들이 수종(隨從)을 드는 데 그 의식은 식당 뒤의 조그만 방에서 거행된다. 그리고 그 제사 의식을 거행할 때 음란한 연극 같은 오락을 수반한다.

3) 아프로디테(Aphrodite)

이 여신은 해상(海商)인들의 여신일 뿐 아니라 창녀들의 여신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사랑, 미, 그리고 다산(多産)의 여신으로 불렸다. 이 여신의 신전은 성적 방종의 장소로써 악명이 높았다. 아프로디테(Aphrodite) 신전은 너무 부자였다. 왜냐하면 그 신전은 일천 명이 넘는 여 사제(司祭)를 소유하고 있었고 그들은 실제로 고급 창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 신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성적 유희를 위해 돈을 물 쓰듯 썼다. 그래서 “모든 남자는 고린도로 항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속담이 생길 정도였다.

4)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

그는 치유의 신이었다. 그래서 질병에 걸린 많은 사람들이 그 신전에 몰려들었다. 신전 본당 주변에는 많은 부대시설이 있었는데 이는 마치 현대의 건강 리조트(resorts) 시설 같아서 신전에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훌륭한 목욕 시설과 식당 시설 때문에 그 신전 주위는 성적 유흥이 수반되는 공공 식사 장소로 인식되었다.

이 외에도 고린도 시에는 많은 신들이 있었다: 여성들의 성생활을 주관하는 결혼의 여신 헤라 아르게아(Hera Argaea), 운명의 신 타이케(Tyche) 등이 있었다. 고린도 시의 많은 여인들은 헤라 아르게아(Hera Argaea)와 성적(性的) 연합인 제사 연합(cultic union)에 깊이 관련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고린도 시민들은 그들의 운명이 타이케의 손에 달려있다고 믿고 있었다.

 

3. 고린도 교회의 사회-문화적 문제점들: 개별적이고 특수적인 현상

대부분의 바울 서신들이 개별적이고 특별한 상황과 문제점들을 다루듯이 바울은 고린도서신에서도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삶의 양식과 가치관에 관련된 특별한 문제점들에 초점을 맞춘다.

 

가. 사회적 상태: 힘없는 다수와 힘 있는 소수

무엇보다 우리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사회적 상태와 관계성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특별히 고린도 교회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다수의 그룹과 소수의 그룹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갈등 그리고 관계, 사회적 상태 등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다수(majority)는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에 속하는 가난한 자들, 노예들, 그리고 가정 하인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1:26-28과 11:22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다수가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힘없고 낮은 신분임을 암시하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οὐ πολλοὶ),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οὐ πολλοὶ),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οὐ πολλοὶ).”(1:26);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μωρὰ), ... ,약한 것들(ἀσθενῆ), ... ,천한 것들(ἀγενῆ), ... ,멸시받는 것들(ἐξουθενημένα)을 택하사(1:27-28); 너희가 빈궁한 자들(τοὺς μὴ ἔχοντας)을 부끄럽게 하느냐(11:22)?” 위의 문장들의 단어들을 통해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다수의 교인들은 사회적으로 약하고 낮은 신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더욱이 고린도교회 공동체 내의 더 낮은 계급 사이에는 노예들과 가정 하인들이 있었다. 고린도전서 7:21에서 바울은 신자가 된 노예들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괴로워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다(δοῦλος ἐκλήθης, μή σοι μελέτω). 이처럼 노예 신분의 교인들에게 그들의 처지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바울이 권면했다는 것은 고린도교회 공동체 내에 노예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증거 하는 것이다. 헬라-로마 사회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노예(servi), 자유민(liberti), 자유 출생인(ingenui). 이 세 부류 중 노예들 특히 시골 노예들이 가장 낮은 신분의 소유자들이었다. 고린도교회 내에는 이 세 부류의 노예들을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힘없는 다수들이 존재 하였을 것이다(예를 들면, 가난한 자유민 남녀, 가정 하인 하녀들, 노예들 등).

그에 비해 고린도교회의 소수(minority)는 사회적으로 힘과 부(富)를 가진 상류 계급이며 여러 가지 면에서 교회 내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고린도 사회에서 행하였던 행동과 생활방식을 그대로 교회 내에서 행하려 하므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자들이다. 고린도전서 1:26에서 바울이, “너희들 중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not many; οὐ πολλοὶ)...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not many; οὐ πολλοὶ)...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며(not many; οὐ πολλοὶ)...”라고 언급할 때, 고린도교회 내의 소수(minority)의 교인은 사회적으로 부와 정치적 지위를 가진 상류계급임을 암시한다 얼핏 보면, 이 문장은 고린도교회 내의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하류계급인 힘없는 다수에게 초점을 맞춘 것 같다. 그러나 주의 깊게 살펴보면, 바울은 “의도된 독자들(intended readers)”로서 사회적 힘과 부를 지닌 “힘있는 소수(a dominant minority)”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6에서 고린도 교회 내에 지혜 있는 자와 능한 자와 문벌 있는 자가 많지 않다고 말한 것은, 교회 내에 약간(some)은 사회적인 지위와 힘이 있는 상류 계급임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함이다. 바렛(C. K. Barrett)은 그 구절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수가 아니라(not many) 소수(a few)는 돈을 가지고 있고 교육을 잘 받았으며 영향력이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사업에서나 시의회 등에서도 지도력을 발휘하였으며 지교회의 여러 가지 행사에도 자신의 집을 제공할 정도로 크고 화려한 집을 가지고 있었다.”

 

나. 급진적 개혁가로서의 바울

바울은 유대적 전통과 교육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헬라-로마 문화와 교육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바울은 유대 기독교인이었을 뿐 아니라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재외(在外) 헬라-로마의 유대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헬라-로마의 사회적 계급 구조를 거부하였다. 헬라-로마 사회에 대해 비평적인 입장을 취하였던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로서의 기득권과 랍비적 훈련으로부터 오는 사회적 지위를 기꺼이 포기하였다. 대신 그는 당시 고린도 시에서 번창하던 수공업인 천막을 만드는 가게에서 주말을 제외하곤 매일 노예처럼 일하였다(고전 4:12상; 행 18:1-3). 바울은 로마의 사회적 가치와 구조적인 측면에서 소위 성공과 명예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도 그렇게 살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교회 내에 존재하는 유대적 전통이나 헬라-로마의 계급적 구조의 잔재를 급격히(radically) 없애기 원했다. 고린도전서 1:27-28에 나오는 바울의 주장을 통해 우리는 그의 급진적(急進的) 개혁 성향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τὰ μωρὰ)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ἵνα καταισχύνῃ) 세상의 약한 것들(τὰ ἀσθενῆ)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ἵνα καταισχύνῃ)... 세상의 천한 것들(τὰ ἀγενῆ)과 멸시받는 것들(τα ἐξουθενημένα)과 없는 것들(τὰ μὴ ὄντα)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ἵνα καταργήσῃ)” 실로 바울은 고린도교회 내에 만연한 세속적 가치와 구조를 복음을 통해 급격히 변화시키기를 원했다.

더욱이 바울은 사도의 직분을 신실히 감당하기 위하여 고린도교회의 힘있는 소수로부터 사례나 선물받기를 거절하였다. 이것이 힘있는 소수를 화나게 만들었다. 바울 시대의 헬라-로마 사회는 사회적 우월자와 열등자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졌다. 고린도 교회 내의 힘 있는 소수는 사회적 우월자로서 바울에게 선물을 하고 사례를 지불하므로 바울을 자신들의 (세속적) 영향력 하에 두기를 원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의 사례와 선물을 거절하므로 고린도 사회의 세속적 가치관이 고린도교회 내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제동을 걸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힘있는 소수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교회 내에서 좌절시키기를 원했다. 고린도전서 9:12, 15, 18에서 바울은 “엑수시아”(ἐξουσία, 권리 혹은 권위)라는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교회 내의 힘 있는 소수가 사용하는 “엑수시아”가 교회 내의 다른 교인들에게 지장이 된다면 그들은 마땅히 그들의 힘과 권리를 자제해야 함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한편 바울 자신도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교회로부터 마땅히 재정적인 지원을 받을 “엑수시아”가 있지만(고전 9:3-12상, 13-14), 교회의 유익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엑수시아”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한다(고전 9:12하, 15, 19-23; 10:23-24, 33하). 더 나아가 바울은, 기꺼이 모든 교인들을 위해 스스로 종이 되겠다(“πᾶσιν ἐμαυτὸν ἐδούλωσα”)고 선포한다(고전 9:19). 이처럼 바울은, 고린도교회 내의 힘 있는 소수가 세속적 권위와 영향력을 교회 내에서 행사하려는 것을 좌절시키려 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이 헬라-로마의 계급적 가치관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하였다.

 

다. 바울과 힘 있는 소수 사이의 갈등과 분쟁

고린도 교회에는 다양한 인종, 종교적인 배경 그리고 사회-경제적 수준의 차이점 때문에 내적으로 많은 문제점들과 갈등이 있었다.

첫째로, 인종의 다양성과 종교적 배경의 차이점이 고린도교회에 갈등과 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 고린도전서 6:10-11; 8:7; 12:2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 대부분이 이방인이었으며 이방 종교에 깊은 영향을 받았음을 거듭 언급하고 있다: “너희 중에 얼마는 이와 같은 자들이었으나 씻음을 받았느니라”(...ταῦτά τινες ἦτε. ἀλλὰ ἀπελούσασθε...)(6:11); “어떤 자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로 알고 먹는다”(τινὲς δὲ τᾖ συνηθείᾳ ἕως ἄρτι τοῦ εἰδώλου ὡς εἰδωλόθυτον ἐσθίουσιν...)(8:7);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ὅτε ἔθνη ἦτε πρὸς τὰ εἴδωλα τὰ ἄφωνα ὡς ἂν ἤγεσθε ἀπαγόμενοι...)(12:2). 한편,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는 약간의 유대인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고린도교회를 신실하게 섬기는 유대 기독교인 부부였고(고전 16:19; 롬 16:3-4), 그리스보는 회당장이었다(고전 1:14; 행 18:8). 고린도전서 7:18을 보면, 바울은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라는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고린도교회 내에 약간의 유대 기독교인이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6:22에서 바울은 어떠한 설명이나 해석도 없이 아람어적인 표현

“Μαράνα θά”(우리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표현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고린도교회 내에 있는 유대 기독교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반응을 기대하였음을 암시한다.

둘째로, 사회-경제적 계층의 차이가 고린도교회 내에 갈등과 분쟁을 불러일으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예를 들면, 신전에서 거행하는 식사에 참여하는 문제(고전 8:1; 10:14-24)나 우상에게 드려진 제사 음식을 먹는 문제(고전 8:1-13; 10:25-33) 등은 사회-경제적 격차 그리고 신앙적 차이 때문에 일어난 갈등이다. 무엇보다 바울과 힘 있는 소수 사이의 신앙적, 사회적 차이 때문에 일어난 갈등이요 분쟁이었다. 바울은 글로에의 집편으로부터 구두 보고(oral report)를 받자(고전 1:11-12; 참고 1:26-28), 고린도교회 내에 힘있는 소수의 부자들과 힘없는 다수의 가난한 자들 사이에 갈등과 분쟁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갈등과 분쟁의 근본원인을 바울 자신의 권위에 대한 힘있는 소수들의 도전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들의 기대를 만족시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울이 훌륭한 연사(orator)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비친 바울은 천막 만드는 가게에서 노예처럼 일만하는 자였다. 바울도 그 사실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고전 4:12): “우리는 수고하여 친히 우리 손으로 열심히 일한다”(κοπιῶμεν ἐργαζόμενοι ταῖς ἰδίαις χερασίν). 이처럼 주중에는 천막 가게에서 천막 만드는 일을 하고 주말에는 목회자요, 설교가로서 고린도 교회를 섬기는 바울을 그들이 곱게 볼 리가 없다. 더욱이 자신들이 제공하는 사례비를 단호히 거절하는(고전 9:12, 15) 바울과 왜 갈등이 없겠는가?

그러면 바울은 왜 이와 같은 모습의 사역을 하였을까? 그 이유는 고린도교회 내의 힘 있는 소수의 세속적 영향력과 입김을 배제시키기 위함이었다. 사도 바울과 힘 있는 소수 사이의 갈등과 분쟁의 구체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1) 가정 교회로 모이는 데서 오는 갈등과 분쟁

대개의 경우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예배와 성도의 교제를 위해 가정집에서 함께 모였다. 그래서 고린도 시에 있는 전 교인들이 한 지붕 아래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고린도전서 16:19에서 바울이 회중들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할 때, 그는 가정 교회에 대해 명백히 언급하고 있다(σὺν τῇ κατ᾽ οἶκον αὐτῶν ἐκκλησίᾳ). 그리고 그것은 그 당시 흔히 있는 일이었다(참고 롬 16:5).

그럴 경우 힘 있는 소수는 그들의 큰 집을 예배를 위한 모임의 장소로 제공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고린도전서 11:17-18에서 바울이 교회에서 성만찬을 하기 전에 음식 문제로 갈등과 분쟁이 있었음을 나무랐는데, 그때 그 교회는 가정 교회였을 것이다. 그 집 주인은 힘 있는 소수 중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집을 예배 처소로 제공했을 가능성이 크다: “너희들이 함께 모일 때(συνέρχεσθε), 그것이(모임이) 유익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17절),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συνερχομένων),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18절), 너희가 함께 모여서(συνερχομένων)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20절).” 고린도교회 교인들 간에 일어나는 분쟁 중 많은 경우가 예배 장소로 인한 갈등이었다. 어떤 집주인은 교회의 교인들을 마치 자신의 집에 일하는 사람처럼 여길 때도 있었다. 또 어떤 집주인은 교인들에게 여러 가지 것을 제공하면서 사회에서 행했던 세속적 권위를 행사하려 하였다. 고린도전서 1:11-16과 3:1-9에서 바울은 사회적으로 힘 있는 소수에 의해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는 분쟁과 파당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니 ...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11-16), 형제들아 ...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3:1-9).”

실로 힘 있는 소수의 집을 가정교회의 예배처소로 사용하므로 야기되는 교인들 간의 갈등과 분쟁이 만만치 않았다. 가난한 교인들에 대한 배려와 수용이 결여된 힘 있는 소수의 영향력 행사와 횡포는 고린도교회를 끊임없는 갈등과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였다. 이런 상황을 간파한 바울은 힘 있는 소수의 그런 영향력 행사와 횡포를 “젖 먹는 어린아이와 같은 행동”이라고 비판하였다(고전 3:1-3).

2) 음식을 먹는 문제에서 오는 갈등과 분쟁

가) 애찬을 따로 먹는 데서 오는 갈등과 분쟁

위의 “1) 가정 교회로 모이는 데서 오는 갈등과 분쟁” 항목에서 언급하였듯이, 고린도 교회는 가정 교회였다. 고린도교회 내의 영향력 있는 소수의 부자들은(고전 1:26) 자신의 집을 교회로 제공하였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1:21-22에 보면, 소수의 힘 있는 부자 교인들이 “애찬(愛餐)”이라고 부르는 음식을 다른 시간에 다른 방에서 먹었다. 그들은 가난한 교인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지 않았다. 그들은 비싸고 좋은 음식들을 가난한 자들과 분리된 방에서 먹음으로 가난한 교인들을 모욕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우월성을 과시하였다.

타이센(G. Theissen)에 따르면, 고린도교회 내의 영향력 있는 소수의 부자들은 자신들이 “초청인”(host)이 되었다. 그래서 초청인은 사회적 신분이 높고 부자인 소수의 교인들을 초청할(고전 1:26) 뿐 아니라, 아무 것도 가지지 아니한 가난한 교인들도 초청하였다(고전 11:22). 그런 후 사회적 신분이 높고 부자인 소수의 교인들에게는 특별한 식사와 그것에 필요한 특별한 장소를 제공하였고, 가난한 교인들에게는 차별대우를 하므로 갈등과 분쟁을 야기하였다. 초청인의 그와 같은 행동은 당시 헬라-로마 사회에 만연(蔓延)하였던 사회-문화적 관습을 교회에서 버젓이 자행하는 것이었다.

원래 애찬(love feasts)은 오순절 이후 초대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에 의해 널리 시행된 아름다운 식사교제였다. 오순절 이후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자 수천 명의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모이기를 힘쓸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나누는 징표로 애찬을 적극 실천하였다(행 2:42, 46). 그 이후 애찬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의 인증(hallmark)으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시행되었다(행 20:7, 11). 그와 같은 배경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애찬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고린도교회에서의 애찬은 성만찬을 행하기 전에 시행되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에서 시행된 애찬에는 문제점이 따랐다. 왜냐하면 애찬이 남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11장 17-22, 33-34절에서 애찬과 성만찬의 남용에 관해 몇 가지로 경고하고 있다. 첫째, 애찬의 남용은 안하느니만 못하다는 것이다(17절). 남용을 하기 위해 모인다면 차라리 안 모이는 것이 낫다. 정말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으라고 가르치고 있다(34절). 둘째, 애찬의 분쟁을 통해 누가 진정 성숙한 그리스도인인가 드러난다는 것이다(18-19절). 비록 사회적으로나 신분적으로는 엘리트이고 상류층일지 모르나 고린도교회 내에 있는 힘있는 소수는 애찬의 남용을 통해서 영적으로 미숙한 자들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더 이상 소수의 부자들이 무분별하게 애찬을 시행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22절). 그러므로 고린도교회 내에 있는 소수의 부자들은 함께(συνερχόμενοι) 시행하기 위해 가난한 자들을 기다림으로(ἐκδέχεσθε) 그들을 멸시하지(καταισχύνετε)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33-34절). 셋째, 애찬의 남용을 적극적으로 피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존중하고 주님이 그들을 사랑하였듯이 서로 사랑하는 방법으로 식사해야 함을 경고하고 있다. 그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성만찬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실로, 예수님의 유월절 최후 식사에서 유래한 애찬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나누는 교제의 장(場)이었다. 오순절 이후 초대교회 성도들은 애찬을 사랑의 인증으로 적극 활용하고 실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애찬을 고린도교회에서 중지시켰다. 그 이유는 고린도전서 11:17-22에 나오는 애찬 시행의 폐단 때문이었다. 애찬 시행으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기는커녕 오히려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고 멸시하여 갈등과 분리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애찬 시행으로 고린도 교회에는 가난한 자와 부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갈등과 분쟁이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 우상에게 제사 드린 음식을 먹는 데서 오는 갈등과 분쟁

힘 있는 소수는 우상에게 제사 드린 음식을 먹는 데에 자유로웠다(고전 8:4, 9-10; 10:25-28). 그들은 또한 우상에게 제사 드리는 신전에 자유롭게 참석하였다(고전 8:1; 10:14-22). 그런데 그들의 그런 행동은 그들의 지식(γνῶσις)에 근거한 것 같다(고전 8:10, 11). 바울이 지적하였듯이, 고린도전서 8:1에서, 힘 있는 소수는 자신들이 모든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πάντες γνῶσιν ἔχομεν”).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이 세상에 우상이란 없다. 하나님을 제외하고 신(神)이란 없다(οὐδὲν εἴδωλον ἐν κόσμω. οὐδεὶς θεὸς εἰ μὴ εἶς).”(고전 8:4)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게 우상 신전제사에 참석하여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을 먹을 "권리"(ἐξουσία)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롭게 우상 신전제사에 참석하여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을 먹었다. 심지어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권리를 즐기는 것 같았다. “권리”(ἐξουσία)라는 말과 ”자유“(ἐλευθερία)라는 단어는 우상 신전제사에 참석하여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을 거리낌 없이 먹는 힘 있는 소수에게 슬로건과 같은 용어들이었다(고전 8:9; 참고. 고전 6:12; 9:12, 18, 22; 10:23).

바울은 그와 같은 그들의 거침없는 권리 행사가 약한 자들을 실족(πρόσκομμα)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고전 8:9-10). 더 나아가 그들의 그러한 처신이 약한 자들을 죄에 빠뜨릴 수 있다고 책망하였다(고전 8:10, 13; 10:28). 바울은, 한편으로는, 약한 자들의 양심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그들의 지식에 근거하여 탐욕을 채우는 힘 있는 소수의 사회적 행동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ἀπόλλυται ὁ ἀσθενῶν ἐν

τῇ σᾖ γνώσει, 고전 8:11). 또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힘 있는 부자들을 변화시키기를 원했다. 바울은 그들이 사랑에 기초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는 방향으로 행동하기를 원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ἡ γνῶις φυσιοῖ, ἡ δὲ̀ ἀγάπη οἰκοδομεῖ, 고전 8:1),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ἐγενόμην

τοῖς ἀσθενέσιν ἀσθενής, ἵνα τοὺς ἀσθενεῖς κερδήσω, 고전 9:22),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πάντα

ἔξεστιν ἀλλ᾽ οὐ πάντα συμφέρει, πάντα ἔξεστιν ἀλλ᾽ οὐ πάντα οἰκοδομεῖ, 고전 10:23),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μηδεὶς τὸ εαυτοῦ ζητείτω

ἀλλὰ τὸ τοῦ ἑτέρου, 고전 10:24).

3) 교인들 사이의 민사 재판에서 오는 갈등과 분쟁

고린도교회 교인들 사이의 민사 재판은 사회적으로 상류 계급인 힘있는 소수에 의해 주도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류 계급인 가난한 자들과 재판할 때에 사회적으로 우월한 그들의 신분을 십분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 법적 제도의 편견 때문에 고린도 시의 대부분의 고소인들은 부(富)를 지녔고 사회적으로 상류계급에 속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자유민들은 후원자들을 고소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상류 계급의 사람들에게 대항하는 사건들을 가져오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6:1에서 첫 단어, “톨마”(τολμᾷ, 감히 ~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힘있는 소수가 재판에서 이용하는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 신랄히 비평을 하고 있는 것이다. 6장 1절에서 바울은 분명히 그리고 단호하게 교인들 사이의 분쟁에 관한 그의 입장을 밝힌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πρᾶγμα)이 있을 때 어떻게 감히 불의한 자들(ἀδίκων) 앞에서 재판을 받으려(κρίνεσθαι)하고 성도들(ἁγίων) 앞에서 하지 않느냐?” 고린도전서 6:2-3에서 바울은 수사학적 의문문 “너희는 알지 못하느냐”(οὐκ οἴδατε ὅτι)를 통해서, 성도들 사이의 재판에 관한 그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성도들은 장차 세상을 심판할 뿐 아니라 천사들조차 심판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고 바울은 충고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적인 사회적 가치, 특히 재판 문제에 관하여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모습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즉, 교인들 사이에 세상적인 문제로 불신자들 앞에서 재판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고 바울은 경고하고 있다(2-3절).

고린도전서 6:4-6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 특히 힘 있는 소수를 부끄럽게 만들려고 애쓴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된 교인들로부터 변상과 배상을 얻어내는 적절한 도구로 재판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만일 교인들 사이에 재판 문제가 생겼고, 그것이 그리스도인들로서 부끄러운 행동으로 판가름 났다면, 당연히 불신자들(ἀπίστων)앞에서 재판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고린도전서 6:7-8에서 수사학적 의문문을 적절하게 사용함으로, 바울은 믿는 자들 사이의 재판 문제에 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즉, 고소인으로서 힘 있는 소수는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된 가난한 교인들로부터 적절한 배상이나 변상을 얻으려 하기보다 차라리 손해를 보라고 바울은 가르친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차라리 손해를 보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διὰ τί οὐχὶ μᾶλλον ᾶδικεῖσθε,... ἀποστερεῖσθε; ... )

바울의 의도는, 세속 법정을 통하여 보상을 받고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바라는 힘 있는 소수를 책망하기 위함이다. 바울이 힘 있는 소수에게 차라리 그들의 사회적 신분을 포기하고 손해를 보라(7절)고 훈계하자, 세상 법정 소송과 사회적 계급 구조에 익숙해 있던 그들은 몹시 당혹해하며 분노하였을 것이다(8절). 그런 의미에서 바울의 훈계와 책망은 당시 헬라-로마 사회적 가치체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은 로마 시민법과 사회적 가치체계에 길들어져 있는 힘 있는 소수를 화나게 만들었다.

요약하여, 힘 있는 소수와 힘없는 다수의 가난한 교인들 간의 갈등과 분쟁은 결국 사도 바울과 소수의 힘 있는 교인들과의 갈등이요 분쟁이다. 왜냐하면 첫째, 바울이 힘 있는 소수의 선물이나 사례비를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힘 있는 소수는 선물이나 사례비로 바울에게 세속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그런데 바울이 그들의 의도를 차단하여 버렸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들의 세속적인 처신을 신앙적인 모습으로 변화시키려 하자, 그들은 분노하였다. 둘째, 힘 있는 소수와 가난한 교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생활적인 갈등과 분쟁(집 문제, 먹는 문제, 옷 입는 문제, 재판 문제 등 생활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바울은,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약한 교인들을 힘 있는 소수가 배려하기는커녕 오히려 멸시하고 이용하는 것을 보면서 분노하였다. 바울은 힘 있는 소수가 자신의 사도적 권위와 가르침에 도전한다고 생각했다(고전 4:21; 11:22).

 

4.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사회-문화적인 접근을 통해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문제점들과 그에 따른 갈등과 분쟁을 살펴보았다.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문제점들과 그에 따른 갈등과 분쟁은 신학적인 문제보다 사회-문화적인 원인에 기인한 바가 더욱 크다. 즉 사회-문화적인 배경에서 비롯된 파당문제, 가정 교회문제, 음식 먹는 문제, 재판문제 등이다. 특히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사도 바울 사이에 생긴 갈등과 분쟁은, 사회적으로 힘 있는 소수의 부자들과 바울과의 갈등과 분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린도교회에는 일차적으로 소수의 힘 있는 부자들이 교회 내에서 세속적인 행동과 처신을 하므로,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약한 다수의 교인들과 갈등과 분쟁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사이의 갈등과 분쟁은, 실질적으로는 힘 있는 소수와 사도 바울과의 갈등과 분쟁이었다. 왜냐하면 소수의 부자들은 세속적인 영향력으로 교회를 장악하려 하였고, 바울은 이를 저지하고 좌절시키려 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도 바울은 힘 있는 소수를 신앙적으로 변화시키려 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헬라-로마의 계급적 구조와 가치관에 젖어 있는 힘 있는 소수의 행동과 처신을 영적이고 신앙적으로 변화시키려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구원의 말씀으로 힘 있는 소수의 세속화된 가치관과 행동을 변화시키려 하였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문제점들과 그에 따른 갈등과 분쟁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한국교회도 고린도교회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신학적인 차이와 갈등에서 마음이 나누이고 갈등을 갖기보다 사회-문화적인 상황과 문제점들에서 비롯된 갈등과 아픔 때문에 분쟁이 생기고 나누어지게 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린도교회의 세속화, 특히 힘 있는 소수의 세속화된 처신과 행동으로 인한 사도 바울과의 갈등과 분쟁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시사(示唆)하는 바가 많다.

현재 한국의 대표적 대형교회 중 하나인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가 2010년 12월 26일 분당성전에서 원로목사 추대 예배를 드리면서 지난 40년간의 목회활동 중 “5가지를 참회”하고 싶다고 고백하였다. 그 5가지 중에는 “소외되고 연약한 성도들의 눈물과 아픔에 동참하지 못한 일”과 “교회 내 기득권층에게 예언자적 설교를 제대로 못한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교회 내 기득권층 사이의 갈등과 긴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한국교회가 외형적으로 부흥 성장하는 가운데, 내면적으로는 담임 목사의 절대 권력 행사 의지와 그것을 저지하려는 교회 내 소수의 기득권층 사이에 갈등과 분쟁이 심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수많은 교인들이 상처를 받았으며, 교회 공동체는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종국에 교회가 수도 없이 분열되어 갔다. 겉으로는 신학과 신앙을 내세우면서 내면으로는 권력과 탐욕과 물질만능으로 가득 찬 결과였다. 마치 고린도교회의 힘 있는 소수처럼 그들은 부와 사회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난하고 힘없는 교인들에 대한 배려와 나눔이 없었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가 외형적으로는 급속히 성장한 것 같으나, 내면적으로는 많은 교회가 목회자와 소수의 기득권층 사이의 갈등과 분쟁으로 인해 폭력이 난무하며 법정소송과 분쟁에 휘말리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가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영향력을 발휘하기보다는 점점 세속화되므로 비난과 거부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름만 거룩하고 실제 생활면에서는 점점 거룩함이 사라져 가고 있다(살전 4:3).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사라져가는 것이다(딤후 3:5).

이러한 한국교회의 현실상황에서, 목회자를 포함한 교회 지도자들은 사도 바울처럼, 교회 내의 힘 있는 소수 기득권층에게 예언자적 말씀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목회자를 포함한 교회 지도자들 스스로 사도 바울처럼, 모든 기득권과 절대 권력을 포기하고, 일반 교인들에게 맹종과 지연, 혈연, 학연을 주장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자기 십자가를 지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려는 결단이 필요하다. 아울러, 교회 내의 실력 있고 힘 있는 소수의 기득권층은 세속 사회에서 행하였던 처신과 습관을 버리고 십자가의 복음으로 변화되어 배려와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려고 애써야 한다. 그때 한국교회는 다시 일어나 빛을 발하게 될 것이고, 진정한 부흥과 성숙이 있는 교회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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