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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윤복희 (13) ‘윤복희, 대한민국 미니스커트 1호’의 진실은

열려라 에바다 2012. 2. 18. 16:50

 

[역경의 열매] 윤복희 (13) ‘윤복희, 대한민국 미니스커트 1호’의 진실은


“한국에 좀 갔다 오겠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봅 호프의 크리스마스 스페셜’에 출연한 후 코리언 키튼즈의 주가가 껑충 뛰는 바람에 저는 더욱 바빠졌습니다. 그런 중에도 베트남에서 만난 한국 군인과 그로부터 받았던 한국 껌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매니저인 찰스 메이더에게 한국에 다녀오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메이더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승낙해줬습니다.

“일주일! 꼭 시간을 지켜야 해요. 일주일 후에는 뉴욕에서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해야 합니다.”

‘에드 설리번 쇼’는 무명의 비틀스를 스타덤에 올려놓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프로였습니다. 당시 팝 가수라면 누구나 출연하고 싶어하는 꿈의 무대였죠.

1967년 1월, 드디어 일주일간의 귀국 휴가를 얻었습니다. 2주간 일정의 해외 나들이가 4년이나 지나서야 한국 땅을 밟게 된 겁니다. 그 동안 저도 스물한 살이 되어 있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새벽 2시였습니다. 한국 땅은 눈으로 온통 새하얀 세상이 돼 있었습니다. 당시는 통행금지 제도가 있었습니다. 공항 대합실에서 추위에 떨다 4시 넘어서야 택시를 탈 수 있었습니다. 숙소인 조선호텔로 가는 길의 낯익은 풍경이 정겨웠습니다. 한글로 된 간판들만 보고도 반가움에 눈물이 났습니다.

호텔에 도착해 여장을 풀었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유주용씨가 생각나 코트를 걸치고 후암동 그의 집으로 갔습니다. 아직 이른 아침인데도 유주용씨와 어머니는 반갑게 맞아줬습니다. 4년 만에 어엿한 숙녀가 돼 돌아온 저의 모습에 두 사람은 처음엔 당황스러움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다 이내 예의 따뜻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여기서 잠깐 밝힐 게 있습니다. 당시 제가 귀국할 때 미니스커트를 입었다는 말이 돌고 있는데, 그건 사실과 다르답니다. 당시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저는 털 코트에 부츠를 신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며칠 뒤 한 패션쇼에서 미니스커트를 입었고, 앨범 재킷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진을 썼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게는 ‘대한민국 미니스커트 1호’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어쨌든 한국에 들어온 저는 오빠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유주용씨와 함께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이태원에 살고 있는 오빠의 행방을 알아냈습니다. 오빠는 미8군을 중심으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는데, 좀 어렵게 살고 있었습니다.

오빠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미국으로 전화해서 휴가를 늘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곤 한국에서 공연을 하기로 했습니다.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인 시민회관에서 윤복희 귀국 리사이틀을 가졌습니다. 공연은 성황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빨리 들어오라는 성화가 대단했지만 공연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리사이틀 마지막 날인 4월 2일, 수천 명의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주용씨와 약혼식을 하게 된 겁니다. 기발하고 치밀한, 그가 사전에 짜놓은 각본에 따라 이뤄졌습니다.

리사이틀 사회를 보던 후라이보이 곽규석씨가 공연이 끝날 때쯤 갑자기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지만 그를 좋아했기 때문에 망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감동적이고 황홀한 이벤트였습니다. 사진기자들의 플래시가 연신 터졌습니다. 유주용씨는 언제 준비했는지 반지까지 끼워 주었습니다. 아무 준비도 하지 못한 저는 그가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서 다시 팔목에 채워 주었습니다. 결혼까지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진정과 집념으로 우리는 이듬해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었습니다. 미약하기 짝이 없는 저로선 거역할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