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역경의 열매] 윤복희 (11) 1964년 코리언 키튼즈 ‘K-Pop’의 원조가 되다

열려라 에바다 2012. 2. 15. 09:46

[역경의 열매] 윤복희 (11) 1964년 코리언 키튼즈 ‘K-Pop’의 원조가 되다


1964년 말, 코리언 키튼즈가 싱가포르에서 공연을 하고서 공식 탄생을 알렸습니다. 수천의 관객이 우리 공연에 환호했습니다. 우리는 자신감을 안고 다음날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2주 계획으로 한국을 떠나온 지 1년을 넘기면서 우리는 한국과 정반대 방향으로 날고 있었던 겁니다.

매니저를 자처한 찰스 메이더는 역시 명성에 걸맞게 우리의 스케줄을 세밀히 준비해 놓았습니다. 런던 도착 다음날 우리는 BBC의 ‘투나잇 쇼’에 출연했습니다. 우리는 한복을 차려입고서 ‘아리랑’을 부른 뒤 당시 전 세계인이 부르던 비틀스의 ‘Can’t Buy Me Love’를 불렀습니다.

방송이 나간 뒤 우리는 일약 스타가 됐습니다. 웃음거리가 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습니다. 여기저기서 공연 요청이 밀려들었습니다. 거리에만 나서면 사람들은 우리를 알아봤습니다. 비틀스보다 더 개성 넘치는 그룹이라고 극찬한 신문도 있었습니다. 유럽 전역에서 초청이 쇄도했습니다. 서독의 대통령 선거 유세에 특별 초청되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날개를 달았습니다.

메이더는 저를 친딸처럼 잘 대해 주었습니다. 그의 부인은 저에게 수양딸로 입적시켜 영국 시민권을 얻어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4개월 일정의 유럽 순회공연을 성공리에 마쳤습니다. 그러자 진정한 꿈의 무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계 흥행의 중심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우리를 초청한 거죠.

1965년, 제 나이 만 열아홉 살에 라스베이거스로 들어갔습니다. 전 세계 최고의 가수들이 모이는 그곳에선 매일 황홀한 공연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가장 나이 많은 언니가 사정상 코리언 키튼즈에서 나가게 됐습니다.

우리는 유럽에서 얻은 인기를 발판으로 라스베이거스 센더볼 호텔과 3개월간 출연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라스베이거스가 얼마나 비정한 곳이며 세계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를 알았습니다. 유럽에서의 환호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했으나 반응은 냉랭했습니다. 그러자 매니저인 메이더는 우리의 실패 요인을 분석했습니다. 그리곤 탁월한 음악 선생인 딕 베이커를 영입해 활동 무대를 뉴욕으로 옮겼습니다. 새로운 레퍼토리를 개발해 밤낮으로 연습했습니다. 그리고 메이더는 또 하나의 카드를 썼습니다. ‘라틴 쿼터’라는 걸출한 프로모터와 계약한 겁니다. 라틴 쿼터는 프랭크 시나트라, 주디 갈랜드 등 정상급 연예인들이 소속된 흥행 전문 회사로서 뉴욕 최고의 극장식 식당도 갖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약발이 받았습니다. 쟁쟁한 연예인들과 함께 뉴욕의 라틴 쿼터 무대에서 코리언 키튼즈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카네기홀 못지않게 큰 무대인 코파카바나에서도 먹혀들었습니다. 뉴욕에서 선풍을 일으키자 라스베이거스에서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이번에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대단한 각오로 우리는 라스베이거스에 재입성했습니다.

우리는 라스베이거스의 뉴프런티어 호텔에 이어 시저스팰리스 호텔에서 공연했습니다. 호평이 쏟아졌습니다. 시저스팰리스에서는 7년간의 출연 계약을 제안했습니다. 이어 생각지도 않게 세계적 휴양지인 푸에르토리코에서 초청이 왔습니다. 그런데 푸에르토리코에서 공연을 하는 도중 기적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때마침 그곳에 휴양 온 미국의 코미디언 봅 호프가 예정에도 없이 무대에 올라와 공개적으로 CBS-TV의 ‘봅 호프 크리스마스 스페셜’에 출연해 달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스타들에게만 주어지는 기회를 우리에게 제시한 겁니다.

“하나님이 한국의 아기 고양이들을 많이 예뻐하시는가 봅니다.” 무대에서 내려오자 스태프 중의 누가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습니다. 그땐 무심코 넘겼지만 정말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