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파
“바리새(Pharise)”라는 말은 “분리된 자”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페루쉼(Pherushim)”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리스(헬라)와 로마 문화가 융합된 이방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헬라시대에 이스라엘 고유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이스라엘의 고유 야훼 신앙이 점차적으로 약하여 지는 것을 우려하여 모세오경(토라 또는 율법)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준수하는데 철저함을 보였던 유대교의 종파가 바리새파입니다.
BC 135년경, 마카비 전쟁 이후로 유대교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적인 당파로 발전하였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토라)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운동의 결과로서 제사장 계층보다는 유대인 일반인들, 성전보다는 회당 중심으로 하여 시작된 움직임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에세네파, 사두개파와 함께 유대교의 3대 분파의 하나로서 예수님 시대에는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들이었으며,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들이 많았고 경건한 지도자와 존경받는 사람들이 바리새파 사람들 중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물려받은 율법 및 선조들의 전통을 존중하고 일상생활의 사소한 데에 이르기까지 이 율법을 정확하게 지키려는 열정을 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 되기 위해서는 3명 이상의 바리새파 회원 앞에서 십일조 및 결례 규정과 같은 바리새파의 규범을 엄격하게 잘 지킬 것을 맹세하고 1년 동안의 시험 기간과 같은 예비 기간을 거친 뒤에 바리새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는데 그들의 직계 가족까지
회원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바리새파의 규범이란, 바리새파 회원이 아닌 사람과는 식사를 함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바리새파 회원이 아닌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일주일에 두 번씩(월요일과 목요일) 금식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은 이후의 삶, 부활, 그리고 천사들 및 영들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에 적힌 것뿐만 아니라 입으로 전해 내려온 정확하고도 엄격한 적용 규칙들, 곧 “장로(=이전의 율법 스승)들의 유전”도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들은 의식상 부정을 가져올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엄격하게 피했습니다. 제사의 정결 문제나 음식 먹는 법, 안식일 계명 등에 대해 특별한 주의를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 시대에 활약하였던 다니엘은 이러한 하시딤(경건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적은 집단을 이루고 있었으며, 헤롯왕 시대에는 6,000명 정도에 불과하였던 적은 무리들이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율법을 강조하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들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헬라 시대에 헬레니즘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담당하였던 유대교 종파였습니다.
그들이 반드시 지켰던 율법은 613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248개는 긍정적이며 365개는 부정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에 첨가되어 많은 보조적인 율법적인 명령들이 추가되었는데, 이러한 원칙은 아무도 깨뜨릴 수 없었던 조항이었습니다. (안식일에 관련된 조항만 해도 39개나 되었다).
또한 이들은 기록된 토라, 즉 모세 오경과 마찬가지로 구전 토라, 즉 미쉬나(2세기경 랍비 유다 하나시가 편집함)도 똑같은 권위를 부여했습니다. 바리새파 안에는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샴마이 학파”와 좀 더 부드럽게 해석하는 “힐렐 학파”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1:46)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율법학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견디기 힘든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고 있다. 그러면서 너희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도 그 짐에 대려고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말씀하셨던 바리새파 율법학자는 “샴마이 파”로 보이는 바리새파 사람들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뒤에 국민 생활의 재건을 위해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힐렐 학파의 요하난 벤 자카이였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과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서도 하나님께 제사와 같은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 이들에게 예배란 피의 제사(성전의 제사장이 드렸던 예배)가 아니라 기도와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성전 이외의 예배장소로서 성전과 분리된 회당(Synagogue)을 많이 발달시켰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유대교의 중심이 된 회당을 바리새파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김으로 발달시켰으며 유대인의 종교적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정통 유대교의 발전에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이 있었던 운동이었던 바리새파의 활동 시기는 AD 2세기에서 AD 3 세기까지 이어졌고 바리새파는 변화하는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유대인의 성서해석에 융통성을 부여함으로써 유대교를 보존하고 전수해 왔던 것입니다. 그들이 회당 교육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일은 유대인들이 디아스포라로 세계로 흩어진 이후에도 유대인들의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AD 70년 유대사람들의 로마에 저항하는 폭동이 있었을 때 로마에서는 티투스 장군을 선두로 하여 군대를 파견하여 진압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루살렘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던 유대교는 성전이 없는 유대교로 변화되었고, 정치적 지배 세력을 지지하며 주로 권력층에 속하였던 제사장 그룹이었던 사두개파는 성전이 무너지면서 자연적으로 약화되었으며, 무력항쟁을 지지하던 젤롯파는 이스라엘이 패망하게 되면서 더 이상 존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유대교의 종파 중에서 마지막으로 남게 된 바리새파는 이후에 유대교의 주류가 되었고, 성전 없이 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를 형성하여 유대교의 중요한 종파로 남게 되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초기 기독교도와 첨예하게 대립하였습니다. 바리새파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회당과 유대사회에서 축출하고, 추방하였으며, 기독교 전파와 형성을 유대교의 위험요소로 인지하여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제지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신약성서 마태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파의 대부분은 반기독교, 반그리스도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생(Born Again)에 대하여 예수님께 질문하였던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체포하려하였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을 변호하였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을 장사지내기 위하여 자신의 새 무덤을 내어 주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바리새인으로 알려졌고,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에 대하여 적대적인 행동을 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부활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사두개파
BC 2세기경부터 AD 66-70년 전쟁 때까지 계속해서 존재했던 유대주의의 한 종파가 사두개파입니다. 그 사두개(Sadducees)라는 이름은 다윗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삼하8:17, 왕상2:35)”으로부터 유래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제사장을 편애하였으며, 율법해석에 있어서도 제사장의 역할을 가장 존중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들과 그에게 충성하였던 친인척들, 예루살렘의 부유한 귀족들은 대부분 사두개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소수의 부유한 유대 귀족 가문들과 연합하여 성전을 관할하였는데, 이를 위해 성전에 “수호장”(성전 맡은 자, 행 4:1)을 두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이었던 예수님 시대에 유대의 자치 사법기구였던 산헤드린의 회원들은 대부분 사두개인들이었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헤롯 왕궁이나 로마에서 파견된 집정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록 사두개인들이 로마 권력의 비호 아래 정치적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일반 백성들 사이에선 그다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을 지배한 것은 엄격한 금욕적 율법주의를 따르던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절기에 성전예법이나 정결법 등과 같은 율법해석에 있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의견이 다를 때, 사두개인은 바리새인의 관점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두개인은 율법, 즉 기록된 성경(모세5경) 만을 인정하였지만, 이를 해석한 서기관들의 전승 기록과 장로들의 유전 율법들은 거부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사두개인은 변화와 혁신을 거부하는 당시 유대의 보수적 기득권층을 대변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은 육신의 부활과 사후심판,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리스도(메시아)의 오심” 등에 대해선 거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철저한 정치적, 물질적 실리주의자들로 이들의 관심은 오직 현재 그들이 당면하고 있던 현실뿐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악과 분리시키기 위하여 그들은 주장하기를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힘 안에 있으므로,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의 복지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반면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분별없음으로 인해서 불운을 겪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레위지파 출신의 제사장들을 포함한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로서 고대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주장하였고, 초자연적인 것을 부인하는 종교 합리주의자들이었으며, 세속주의적이고 현세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운명”)을 인간 역사에서 배제하고, 인간의 존재와 복을 이 세상에서의 삶으로만 제한시켰으며, 자신들의 권력과 위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어떠한 짓이라도 서슴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약 성서에 예수님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만났던 사건을 마태복음 22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못박히기 전 마지막 주간을 예루살렘에서 보낼 때 예루살렘 성전의 뜰에서 그들은 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2:24~28) “선생님, 모세는 ‘남자가 아들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형을 대신하여 아들을 낳아 주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첫째가 결혼했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어, 아내를 자기 동생에게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둘째도, 셋째도, 그리고 일곱째까지 첫째와 똑같이 되었습니다. 결국엔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일곱 형제 모두가 이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부활 때에 이 여자는 이 일곱 형제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사두개인들은 부활에 관한 어려운 문제를 예수에게 제시하였습니다. 이들은 부활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일찍 죽은 일곱형제의 예를 들면서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칠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은 후에 후사가 없이 죽었으므로 그 동생들이 후사를 잇게 하여야 하는데 그의 형처럼 후사가 없이 죽게 되어 모세의 법에 따라 계속하여 그 형의 아내를 아내로 맞이 하였는데, 부활 때에 그녀가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하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2:30) “부활할 때에는 누구도 장가가거나, 시집 가지 않으며, 오직 사람들이 하늘에 있는 천사처럼 될 것이다.”
(누가복음 20:34~3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은 장가가고 시집간다. 그러나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여 하늘 나라에서 살 자격이 인정된 사람들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서 다시 죽을 수도 없다. 그들은 부활의 아들들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바리새인 중의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의 대답에 감명을 받아서 칭찬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눅 20:39) “율법학자 몇 사람이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 옳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은 신약에서 자주 함께 언급되고 있는데(마 3:7 ; 16:1-12), 많은 관점의 차이와 반목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항상 연합한 것은 아니었지만 예수님과 초대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대하여서 함께 힘을 합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은 “부활”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는 예수님과 그리스도인들과 의견을 함께 하였습니다. 이러한 증거로 성경에 그리스도인이 된 바리새인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행 15:5 ; 빌 3:5) 그리스도인이 된 사두개인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유대의 한 종파였던 사두개파는 AD 66-70년 사이에 성전이 무너지면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비교
“율법”에 있어서 바리새파는 기록된 율법인 모세5경과 더불어 구전되어온 율법도 인정되었지만 사두개파는 오직 기록되어진 율법인 모세5경만 인정되었습니다.
“자유의지와 예정”에 있어서 바리새파들은 하나님이 정하여 놓으신 예정에 따라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밖에는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두개파는 운명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는 없다고 하는 예정은 없다고 믿었으므로 모든 행동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기 때문에 선한 일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람이 죽은 다음의 생에 대하여” 바리새파는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삶에 따라서 영혼은 상과 벌을 내세에서 받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내세에 받게 되는 벌은 영원한 지옥이며 영원한 상은 부활과 영생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두개파는 영혼불멸설을 부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예배하는 이유는 그분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이지 부활과 영생이라는 다른 목적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천사”에 대하여 바리새파는 그의 존재를 인정하였지만 사두개파는 천사의 존재를 부인하였습니다.
성서의 레위기에 기록되어 있는 “정결법”에 대하여 바리새파는 모든 유대백성들이 지켜야 하는 법이라고 하였지만 사두개파는 제사장들과 성전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법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회당을 그들의 근거지로 하였으며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는 율법을 준수함으로만 유지된다고 믿었던 반면, 사두개파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성전이라고 믿었습니다.
“메시야(Messiah)관”에 관하여서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메시아의 도래설(到來說)을 믿었지만 사두개파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시딤(거룩한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헤브라이즘이 종교의 순수성을 보장한다고 생각하는 종교적인 이상주의적이었지만 사두개파 사람들은 성전제의(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일)만 보장된다면 어떠한 정치 체제와도 손잡을 수 있다고 하는 실용주의적인 정치적 성향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회당과 제휴한 유대인의 중류계급인데 비하여 사두개인들은 제사장적 귀족계급이었으며 성전과 제휴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들은 권력과 돈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도계급이었습니다.
1세기의 역사가 조세프스는 바리새인들은 서로 사랑하였고 공동체와 조화로운 관계를 창출해 냈으나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행동에서 야비했으며 그들의 동료와의 대화에서 외국인(이방인)에게 하듯이 무례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War 2.166)
에세네파와 셀롯(열심)당
“에세네”라는 명칭은 “경건한”, “거룩한”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이 특별히 거룩하다거나 경건하다고 여기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들을 메시야가 이스라엘에 오실 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될 신비한 “진리의 수호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1896년경에 카이로 회당에서 발견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선과 악 사이의 최후의 싸움을 묘사하고 있는 “사독 문서들”이 에세네 집단에 의해서 기록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에세네파들은 이러한 유형의 정보를 적절한 시기까지 비밀로 간직할 것을 서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마 자신들을 “마스킬림(지혜로운 사람)” 혹은 다니엘서에 기록된 것처럼 혼란기에 유대인들을 인도할 자들로 믿었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에세네파들은 멀리 떨어진 광야 지역에서 공동체를 이루어서 살았으며, 또 다른 에세네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에서 살기도 하였는데 그들은 육체적 및 정신적으로 그들 자신들을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정결한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그들의 문서들은 (즉, 사해사본으로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에세네파에 의해서 기록한 문서로 간주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신실함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소망가운데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의해서 타락하지 않도록 대단한 주의를 기울였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해 옆에 있는 쿰란 공동체 유적지
에세네파는 쿰란공동체라고 불리는 공동체생활을 하던 유대교의 한 사조였습니다. 에세네파가 쿰란공동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들이 금욕생활을 하던 정착지가 쿰란(Qumran)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앞으로 다가오게 될 종말에 대한 기대와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와 격리되려는 경향을 보였던 종파입니다.
AD 70년에 있었던 유대항쟁의 와중에 로마 군대에 의해서 궤멸된 것으로 보이며, 이들 공동체의 유적에서 현존하는 구약성서 사본들 중 가장 오래된 사해사본이 1947년 베드윈 목동에 의해서 우연하게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대부분의 사본들은 마카비 시대에 기록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아직도 쿰란 공동체의 사람들이 실제로 에세네파인 사람들이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논쟁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몇몇 점의 문서들이 현재까지 잘 알려진 에세네 가르침들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의 사두개파는 제사장 계층으로 세속적 권력에 깊이 빠져 있었고, 바리새파는 제사, 십일조, 경건 등에 관심을 가졌었으나 속사람의 변화보다는 사람의 칭찬을 구하는 종교적 외형, 체면 등을 중시하였으며, 헤롯 당파는 세속적인 권력을 잡은 헤롯 왕권을 지지하고 보존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열심당(셀롯당)은 당시 로마 지배세력에 대한 무력항쟁으로 유다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에세네파는 당시의 유대교적 삶으로부터 퇴각한 은둔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세네파 사람들(Essenes)은 BC 130년부터 AD 70년경까지의 시기에 광야에서 고립된 집단생활을 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구별된 자라고 자처했던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대해 철저하지 못함을 비판하면서 에세네인들은 광야로 은둔생활을 하면서 사실상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였던 종파였습니다.
에세네파는 세속과의 철저한 단절 속에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에세네파 가운데 여러 공동체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쿰란이라는 마을에서 집단생활을 한 쿰란공동체(Qumran community)는 다른 어떤 공동체 보다 엄격한 율법공동체였습니다.
쿰란공동체는 구약성서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했지만,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에서 드려지는 희생제사는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고유한 정결의식을 거행했으며 태양력을 사용하는 절기들을 제정하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세우실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은 앞으로 오시게 될 “의의 교사(teacher of Righteousness)”를 기다렸습니다. 세례 요한은 에세네파 중의 한 사람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열심당 (Zealots)
열심당(Zealots)은 AD 1세기에 유대교의 영향력이 있는 당파였습니다. B.C. 63년,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팔레스타인 지방을 침공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소원이었던 이스라엘의 회복의 소망을 여지없이 파괴시키고 말았습니다. 이때에 어떤 집단들이 유대인들이 로마군을 대항하여 침략군들을 격퇴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일어나게 된 열심당들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민족적이고 애국적으로 로마에 대항하는 반역을 선동하였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열심당 지도자는 갈릴리 사람이었던 “유다”였습니다. (행 5:37)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내린 칙령으로 인하여 모든 유대 사람들이 호적을 하도록 하였을 때, 갈릴리 사람이었던 “유다”가 로마에 반항하여 폭동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습니다. 갈릴리 사람 “유다”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들의 나라가 어떤 다른 나라의 세력에 의해서 지배당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격분하였던 것입니다.
AD 1세기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것이 로마 제국에 대한 유대인들의 투쟁의 시작이었다고 관찰했는데, 이러한 투쟁들은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더불어 종식되었던 항쟁이었습니다.
벨릭스가 유대 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AD 52-60) 열심당들은 “시카리”(Sicarii, “단검 사람들”)라고 알려진 급진적인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시카리”는 축제 동안에 군중들 틈에 섞여 있다가 그들의 품속에 숨겨온 단검으로 로마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유대인의 반역자라고 간주하여 찔러 죽이는 일을 자주 저질렀습니다.
AD 70년에 있었던 폭동을 진압하러 왔던 로마군대와 싸움을 하는 동안에 (AD 66-70) 그들(시카리)은 “마사다”에 있는 옛 유대의 요새로 도피해서 그 곳을 본부로 삼아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지 2년 후까지도 저항하기를 끊이지 않았던 “마사다”를 로마 군대가 포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방인의 손에 잡혀 죽느니보다는 자결의 길을 택했는데, 자결한 숫자는 그들의 가족들을 포함하여 모두 960명이었다고 AD 1세기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 항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마사다 요새
유다는 비느하스(Phinehas), 엘리아, 마타디아스(Mattathias)에 의하여 세워진 열심의 전통을 따르면서 이스라엘 하나님 때문에 열심이라고 자신을 불렀습니다. 유다는 약속의 땅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 지배자에게 세금을 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가이사(시져)에게 세금을 내야합니까? 내지 말아야 합니까? 라고 질문하였을 때,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쳐라”고 대답을 하였던 기록이 있습니다. (막 12:17) 이것이 예루살렘에서 예수에게 던져진 로마의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가라는 질문의 배경이었습니다.
이들은 혁명적인 행동으로 새로운 메시아 왕국의 건설을 꿈꾸어 왔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에도 이전에 이들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가나안 사람 “시몬”입니다. “가나안 사람”으로 번역된 “카나아니아”라는 아람어는 “셀롯 당원(열심 당원)”이라는 말입니다.
한편 (마가복음 15:7)에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풀려났던 바라바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 15:7) “바라바라고 하는 사람이, 폭동이 일어났을 때, 살인을 저지른 폭도들과 함께 감옥에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의 전례대로 예수를 놓아주기를 원했지만 백성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요청하였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열심(Zealot) 당원이었던 바라바 대신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막 15:15)
인간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서 인간의 각 구성요소와도 같은 각 종파들은 그들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역할을 사용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속섭리를 위하여 일하도록 사용하신 것입니다. 각 당파(종파)들은 전적으로 자기들의 정치적 종교적 유익을 위하여 일했지만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사업을 이루는데 일조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을 고발한 자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었고, 그를 사형선고 하도록 한 자들은 헤롯 당파였으며, 그리고 열심당원이었던 바라바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에세네파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경건한 자들이었습니다. 참으로 오묘한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예수님 대신에 풀려났던 죄수, 바라바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실 때, 구름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환영하면서 열광하였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예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되었으며, 유대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의 잘못 된 점을 찾지 못하여 풀어주려고 하였지만 제사장들과 군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쳤던 소요에 두려움을 느껴 예수님을 군중들에게 내어 준 바가 되었는데 그때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전통적으로 유월절과 같은 유대인들의 커다란 명절이 되면 죄수 한 명을 사면하여 주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이런 관례에 따라 아무런 죄가 없다고 판단된 예수를 풀어주기 위하여 빌라도 총독은 군중들에게 물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놓아줄까, 아니면 바라바를 놓아줄까?”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그들을 선동하고 있었다고 하는 주장도 있었지만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던 예수의 재판을 지켜보고 있었던 군중들은 예수 대신에 바라바를 놓아 주라고 소리쳤습니다.
예루살렘의 채찍질 교회의 창문의 스테인 그라스 그림, 풀려나면서 좋아하는 죄수 바라바(Jesus Barabbas).
마태복음에서는 이 “바라바”라는 사람을 “이름이 잘 알려진 죄수”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누가복음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소요와 폭동을 일으켰던 정치범이며, 폭동 중에 살인도 저지른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서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바라바”의 이름은 “예수 바라바”였다고 합니다. 마태복음서에는 원래 “바라바”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예수라는 이름이 바라바라는 흉악한 죄수의 이름과 함께 있다는 것을 혐오스럽게 생각하였던 성서 사본가들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삭제되었다고 성서학자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학자들은 “바라바”라는 이름이 “바르 아바(아바의 아들, son of Father)”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는데, “아바”라는 이름은 당시에 존경을 받고 있었던 사람이나 랍비의 이름으로 많이 사용되었던 이름이었기 때문에 “바르 아바”도 어떤 랍비의 아들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또 요한복음에서는 “바라바”를 소개하기를, “그는 유명한 강도”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1세기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 땅을 다스리고 있었던 때에는 “강도”라고 불렸던 죄수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반적인 서민들의 인기와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부르는 “강도”들은 세롯(Zealot) 당의 한 멤버로서 로마와 결탁하여 부를 누리고 있었던 상류층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소요를 일으키고 테러를 일삼으면서 강도질을 하고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적용시킨다면 “홍길동”과 같이 “의적”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반 서민들은 비폭력 메시아로 자처하던 “예수 그리스도”보다 정의롭지 못하고 부패한 상류사회를 정면으로 대항하며 의적과 같은 행동을 함으로써 힘이 없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속 시원하게 활동하였던 “바라바”라는 의적강도를 예수님 대신에 풀어 달라고 소리쳤다고 하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로마에 대항하여 테러를 일삼으면서 위험인물이었던 열심당원의 주요 인물이었던 “바라바”를 로마의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군중들이 원한다고해서 그렇게 손쉽게 내어 주었을 리가 없다고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대신하여 살아남게 되었던 “바라바”에 대한 이야기에는 그가 나중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전설도 있다고 하지만 아무런 이야기도 남아 있지 않고 마침내 잊어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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