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가요 = 신명기25;1-16(240519)

열려라 에바다 2024. 5. 17. 08:16


한상원목사
추천 2조회 4924.05.16 07:05댓글


PW : 믿음                 BIW : 거룩하게 살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거룩한 백성답게 거룩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아뇨. 더 빨리 갈 수 있습니다.


담배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목사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 담배 피우면 천국에 못 가나요.”
그러자 목사님께서 아니요. 더 빨리 갈 수 있는데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담배는 만병의 근원이요 친구라고 합니다.
담배를 사랑하는 사람은 담배를 사랑하지 않는 이들보다 아주 빨리 저 세상으로 이사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빨리 천국 가고 싶으면 더 많은 담배를 사랑하고 담배와 연애하면 됩니다.
전에는 담배는 남자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남자들보다 아가씨들이 더 많이 담배와 연애하는 것 같습니다.
아가씨들이 담배를 물고 피우면서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혼인하고 아기를 낳아야 할 몸인데...
하는 생각이 걱정이 앞섭니다.
신앙인들은 담배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천국 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구원의 문제는 아닙니다.
담배를 피워도 예수님을 제대로 믿음으로 신앙고백하면 구원받고 천국으로 갑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서 흘리신 보혈의 피값으로 구원을 받은 신앙인의 몸, 거룩한 성전이 되는 거룩한 몸에 좋지 않은 것들이 넣는 행위는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술이나 담배나 더 나아가 마약은 절대로 넣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술이나 담배나 마약 대신에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 은혜, 사랑, 축복으로 신앙인들의 영육에 가득 채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P4


00답게 산다는 것처럼 애매모호한 말이 있을까 싶다.
00답게 산다는 말처럼 어려운 말도 없지 않을까 싶다.
정치인들이 정말로 국민들이 원하는 만큼 올곧게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기 자신은 국민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바치고 헌신하며 산다고 떠벌릴 수 있을지 몰라도 국민들의 시선에는 한없이 추락하여 낙제점을 줄 수밖에 없는 이들이 너무 많다.
국민들의 시선에서 국회의원처럼 산다는 것이 그리 녹녹치가 않다.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은 어느 기업을 이야기하면서 그 회사에는 거의 예수 믿는 이들이 많지만, 60%이상이 사기꾼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한없이 부끄럽고 수치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대신 사과드린다. 내가 덜 된 사람이라서 그렇다.”라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처럼 산다는 것이 어떤 삶일까를 계속 고민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없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도 인정해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들도 인정해 주시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인정받는 진정한 삶, 거룩한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D4


 지나친 체벌을 막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1-3절에서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면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앞에서 그의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때리게 하라.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라고 말씀하신다.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서 시비가 생기고 분쟁이 일어났다면 지혜롭게 해결하여 시시비비를 가리고 잘잘못을 분명하게 분별하여 잘못이 있는 사람에게는 악하다라고 판결하고, 잘못이 없는 사람에게는 의롭다라고 분별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잘못한 사람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리라고 말씀하신다.
벌을 내리되, 벌금으로 낼 정도의 잘못이라면 벌금형을 내리고, 매로 때리는 태형이라면 수를 정확하게 세면서 매를 때리는 벌을 내리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매를 때리는 벌을 내렸다면 40회까지만 때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만일에 40회 이상 때리다가 혹시 그 당사자가 생명을 잃는다면 살인죄에 적용되는 것이다.
매를 때리더라도 제한을 두지 않으면 도대체 언제까지 때려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때리는 사람의 기분과 마음에 따라서 적게 때릴 수도 있고, 상상을 초월하게 많이 때릴 수도 있다.
너무 많이 때리게 되면 사람의 생명까지도 위협을 당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40회까지라고 제한하시는 것이다.
사실은 40회도 많이 때리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11장에 보면 매를 수없이 맞았고, 태장으로 맞고 돌로도 맞았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특히 40에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노라고 고백한다.
아마도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재판하면서 채찍으로 때릴 때도 40에 하나를 감한 매를 때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중죄인의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인격을 보장하고 생명권을 지켜주도록 말씀하고 계신다.
그래서 지나치게 체벌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계신다.
체벌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인격이요 생명을 지키는 것이다


 동식물에게도 충분히 영양분을 제공해 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4절에서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라고 말씀하신다.
소로 쟁기질을 해야 곡식 씨앗을 뿌릴 수 있다.
소로 곡식 떠는 일을 해 주어야 곡식알을 추수할 수 있다.
소를 활용하여 농사하는 농부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운다.
소가 곡식을 먹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소도 먹어야 일을 할 수 있는데, 소의 입에 망을 씌워버리면 소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하면서 일만 해야 하는 것이다.
소에게 일을 시키기 전에 충분하게 목초를 먹이고 일을 시키라고 하는 것이다.
흔히 화초를 키우는 사람들이 간혹 화분이나 화초에 물만 주는 사람들이 있다.
물만 주면 화초들이 잘 자라준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밥도 먹지 않고 물만 마시면서 살 수 있느냐?”라고 반문한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 물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런다고 해서 물만 마시고 살지는 못한다.
여러 가지 음식을 먹으면서 골고루 영양분이 공급되어야 살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식물들에게도 물만 주는 것이 아니라, 각종 영양분을 공급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퇴비와 거름도 주고, 비료도 주어야 그 식물들이 영양분을 충분하게 공급받아서 잘 자라는 것이다.
잘 자라야 병충해도 걸리지 않고 예쁘고 멋지게 자라고 꽃도 피고, 열매도 맺는 것이다.
그래야 그 식물들을 보는 이들에게 힐링도 주고 행복과 기쁨도 줄 수 있는 것이다.
소를 비롯한 동물들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시대는 특정동물을 반려동물이라는 미명 아래 키우는 가정들이 많다.
어떤 신혼부부는 자식을 낳지 않고 반려동물을 자기 자식인양 키우는 가정들도 많다.
반려동물을 키우면서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인다.
최고급으로 음식을 제공하고, 병원에도 데리고 가서 수술도 시켜준다.
전라북도 완주군에서 진안군으로 넘어가는 산 중턱에 반려동물 장례식장까지 있을 정도이다.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단순하게 소의 입에 망을 씌워서 소가 곡식을 먹지 못하도록 막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일을 시켰으면 그에 따르는 정당한 보상을 해 주라는 말씀이다.
고린도전서 9:9-10에 보면 사도바울은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신다.
농부가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추수하는 것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웃들과 함께 누릴 행복에 대한 소망 때문이다.
가장이 직장과 일터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며 일하는 것은 하나님과 가족들에게 주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꿈과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은 시켰는데 정당하게 보상하지 않는 악덕 기업인들, 농장주인들이 마치 자기 집에 하인, 노예처럼 취급하는 일들이 너무 많다.
데살로니가후서3:10에서 사도바울이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라는 말씀을 하신 것처럼 일을 하지 않았으면 보상해 줄 이유가 없다.
좌파 세력의 근간이 되는 민주노총과 같은 일부의 특권층 노조들이 일하지 않고 보상만 받으려고 하는 악덕 노동자들에게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품삯이나 월급을 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정당하게 열심히 일을 한 사람에게는 그에 따르는 보상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삶의 원리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악덕 기업인이라든지, 농장주인이라든지, 사기꾼이라든지, 폭군이라는 말은 더 이상 안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신앙인이라면 좀 더 너그럽게 배려하고 베풀고 나누고 다같이 행복한 사회와 가정을 만들어간다는 의식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가계도(家系圖, Pedigree)가 끊어지지 않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5-10절에서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한 가정의 가계도를 굳건하게 세워나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제도는 이른바 형사취수제(兄死取嫂制)를 제정해 주시는 말씀이다.
형사취수제는 시댁에서 요구할 수도 있고, 남편 잃은 여인이 직접 시댁 형제들에게 요구할 수도 있다.
오늘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제도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고고고고고대사회에서는 생존을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제도이다.
우리나라에도 칠거지악이 있는가 하면, 삼불거가 있다.
칠거지악이란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거나(不順父母), 자식이 없거나(無子), 음탕하거나(不貞), 질투하거나(嫉妬), 나쁜 병이 있거나(惡疾), 타인을 향하여 비방하고 중상하거나(口說), 도둑질을 하는 것이다.(竊盜),
이렇게 7가지를 칠거지악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런 칠거지악에 해당하는 잘못을 지었더라도 내쫓을 수 없는 3가지,  3불거가 있다.
내쫓아도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거나(有所取無所歸不去), 함께 부모의 삼년상을 치르었거나(與共更三年喪不去), 전에 가난하였으나 혼인한 후 부자가 되었을 경우(前貧賤後富貴不去)에는 쫓아낼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시집을 온 여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반드시 이행해야 할 의무는 아들을 낳아서 가계(家系)의 대()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후사도 보기 전에 급작스럽게 남편이 세상을 떠남으로 인하여 더 이상 후사를 남길 수 없는 형편이 되었을 때, 시댁에서 다른 형제에게 형사취수제를 요구할 수 있다.
시댁에서 차일피일 미루면서 이 제도를 시행하려고 하지 않으면 여인이 직접 성읍의 유지들에게 이런 제도를 행할 수 있도록 요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제도화시켜 주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 제도를 고엘제도로 승화시키고 있다.
고엘제도는 하나님께서 본래 주신 기업을 회복시킨다는 의미이다.
성경에서는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 룻의 이야기, 사두개인과 예수님이 부활의 논쟁에서, 또한 수가성 여인의 이야기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우리 신앙인들은 신앙의 가계도를 계승시켜 나갈 의무와 권리가 있다.
신앙인들과 다른 세대를 형성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의 다음 세대를 세워나가는 것이다.
사사기 2;10-12절의 말씀을 보면 여호수아가 11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후에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의 광야생활과 가나안 땅 정복전쟁에 직접 참전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직접 체험하고 고백한 조상들의 신앙을 따라가는 다음의 세대가 형성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형성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거역하고 가나안의 신들을 섬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 신앙인들은 신앙인의 가계도를 확실하게 세워갈 수 있는 가정으로, 나라와 민족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로 세워져 나가기를 소망한다.


 부인 외에는 절대 금지지역을 지정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11-12절에서 두 사람이 서로 싸울 때에 한 사람의 아내가 그 치는 자의 손에서 그의 남편을 구하려 하여 가까이 가서 손을 벌려 그 사람의 음낭을 잡거든, 너는 그 여인의 손을 찍어버릴 것이고 네 눈이 그를 불쌍히 여기지 말지니라.”라고 아주 엄하게 말씀하신다.
음낭은 오지 부인만이 잡을 수 있는 영역이다.
음낭은 남자의 생식기, 성기, 음부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부부로 맺어주신 부인만이 만질 수 있는 영역이다.
오직 부인만이 성관계를 맺을 때, 서로의 쾌감과 행복한 시간을 위해서 애무하며 만질 수 있는 영역이다.
부인이 아닌 다른 여인이 남자의 그것을 만지면 간음죄가 성립된다.
그렇지만 서로 격한 맘에서 격하게 몸 싸움을 하다보면 닥치는 데로 아무 것이나 여기저기 붙잡게 된다.
그래도 절대로 다른 여자가 남자의 그것을 붙잡아서는 안 되는 금지구역이다.
만약에 너무나 격한 마음으로 다른 여자가 다른 남자의 그것을 만지게 되면 생식기의 기능을 잃을 수도 있다.
생식기의 기능을 잃게 된다면 그 가계의 가계도가 끊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다른 여인이 잡았다면 그 손을 자르는 징계를 내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른 남자의 생식기를 붙잡으로써 손을 잘라야 하는 징계를 받은 여인에게는 조금의 긍휼이나 자비나 불쌍한 마음도 가지지 말라고 매우 엄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상대의 배우자까지 싸움에 연루되는 일을 자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쩌면 씨족사회요 대가족사회요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에 아예 처음부터 분란이 일어날 수 있는 소지를 제공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져주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이라는 마음으로 약간씩 양보하고 배려하고 뒤로 물러서고 좀 억울하게 손해 보는 일도 감수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지니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정당하게 장사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13-16절에서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이런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라고 말씀하신다.
무게가 서로 다른 두 저울추, 크기가 서로 다른 두 되를 가지고 장사한다는 것은 거룩하시고 온전하시고 정결하신 하나님 앞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행위는 거짓과 속임, 그리고 탐욕을 전제로 하는 장사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은 추호의 거짓도, 속임도, 탐욕도 용납할 수 없는 죄악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악행을 여호와 하나님께 가능한 일이라고 단정하고 계신다.
많은 이윤을 남기려고 하는 탐욕 때문에 이런 유혹과 죄악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조금 덜 이윤을 보더라도 정직하고 정당하게 장사해야 신뢰를 얻게 된다.
신뢰를 얻는 것은 당장에 조금 더 많은 이윤을 남기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장사꾼이 무게가 서로 다른 저울추, 크기가 서로 다른 되를 가지고 장사한다는 것은 신앙인이 두 마음, 곧 믿음과 불신의 두 마음을 소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야고보서1:6-8절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책망하신다.
한편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나안의 신들을 믿는 것은 두 마음을 품은 꼴이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의 온갖 잡동산이 신들을 따라서 살아가는 행위가 두 마음을 품은 것이다.
두 개의 저울추와 두 되를 가지고 장사하는 것이나 여호와 하나님과 가나안의 신들을 동시에 믿는 것들이나 예수님과 세상의 신들을 동시에 믿는 행위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런 일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믿어줄 수 없고, 세상 사람들도 신뢰해 줄 수 없는 이들이다.
여기도 배척당하고 저기서도 배척당하는 꼴이 되고 만다.


신앙인들은 좀 덜 이윤을 남기더라도 사람을 얻을 수 있는 신뢰를 앞세울 수 있어야 한다.
신앙인들은 두 마음으로 사는 변절자, 기회주의자, 사기꾼이라는 망언을 더 이상 듣지 않도록 정당하게,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이 사회인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된 지 이미 오래지만, 그래도 우리 신앙인들만큼이라도 사회인들에게 신뢰와 감사와 믿음을 심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젠 더 이상 예수쟁이들을 믿을 수 없다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우리들 스스로 경각심을 가지고 냉정하게 자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L4 & B4


이젠 우리 신앙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비난을 자제하며 살자.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과 교회가 좋지 않은 악영향을 너무나 많이 끼쳤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좋은 것들만 이야기해도 복음의 길이 쉽게 열리지 않는 현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제발 교회나 노회나 교단총회의 좋지 않은 소식을 SNS에 올리거나 사회인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느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속 SNS에 교회와 노회와 총회가 사회법정에서 재판받는 일을 올려서 저가 그 분에게 정중하게 이런 소식은 개인적으로만 알고 있지, 불특정 다수가 볼 수 있는 SNS에 더 이상 올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의 입에서 욕을 자제했으면 좋겠다.
제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의 입에서 동물의 새끼라든지, 거칠게 욕하면서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사회인들보다 더 악하다는 말은 더 이상 듣지 않았으면 한다.
사회인들에게 예수님을 믿어서 좋은 일들만, 교회의 좋은 일들만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젠 좀 손해 보면서 살자.


좀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아등바등하면서 남에게 상처주고 교회에 누를 끼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하지 말자.
이젠 좀 손해 보면서 살아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처지가 되지 않았나?
70년대, 80년대, 90년대처럼 굶주려 죽는 시대가 아니지 않은가?
당당히 세계 10대 선진국 대열에 올라선 대한민국이지 않은가?
좋은 것들로 세계 1위인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대한민국이지 않은가?
그러니 이젠 좀 손해 보더라도 악하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윤을 조금 더 남기려고 하다가 신뢰성을 상실하면서 사람을 잃는 것이고, 사람을 잃어버리면 조금의 이윤조차도 사라지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제는 좀 손해 보면서 살아보자.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사는 길은 어렵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어려운 일이지만, 쉽다고 생각하면 생각보다 쉽게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사는 길이 어렵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이젠 좀 더 쉽게 우리들의 일상에서 얼마든지 예수그리스도의 빛으로, 소금으로, 향기로, 편지로 살아갈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