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57:8-11)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57편 8절-11절: 내 영광아 깰찌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찌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8절: ‘내 영광아, 깰찌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찌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누구의 영광이냐? 다윗의 영광을 말한다. 즉 성도의 영광이요 예수 믿는 자기의 영광을 말한다. ‘비파야, 수금아, 깰찌어다.’ 악기를 연주하라는 거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성도다윗의 잠을 자고 있는 영광을 깨우겠다는 거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 자기의 잠자고 있는 영광이 무엇이냐? 우리 궁극교회 교인은 자기의 영광이 있는데 이것이 잠을 자고 있으면 그 영광을 깨워야 한다.
다윗에게 무엇이 영광이며, 또한 성도 자기에게 무엇이 영광이냐? 자기에게 영광이 될 무엇이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으냐? 전혀 모르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이룰구원을 위해서, 즉 우리로 하나님의 온전을 덧입게 하려는 것인데, 이를 위해 본문처럼 다양하게 용어를 달리하면서 다각적인 면으로 우리를 깨닫게 한다. 우리에게 무엇이 잠을 자고 있는 거냐? 자기에게 잠자고 있는 것을 깨워라. 성도로서 믿는 자기에게 깨울 것이 많다. 깨달아야 할 것이 많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잠을 잤느냐? 배에서. 그러니까 뭐가 일어났느냐? 파도가 일어났다. 그러면 이 배가 밧줄에 묶여서 정박을 하고 있었는데 이 배 안에 예수님이 혼자서 주무시다가 밧줄이 풀려서 떠내려가는 거냐? 그게 아니라 이 배에 제자들도 같이 타고 있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주님에게 천국에 대한 말씀을 죽을 때까지 들어도 모자랄 판이니 자신들과 같이 배에 탄 예수님께 천국에 대한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할 텐데 같이 한 배를 타고 있으면서도 이런 대화가 없었기 때문에 주님이 주무신 거다. 이렇게 되니 풍랑이 일었다.
믿는 우리는 자기를 진리지식으로 깨우치고, 지혜지식적으로 깨우치고, 하나님의 도덕성으로 잠자고 있는 자기를 깨우치고, 하나님의 능력성으로 잠자고 있는 자기를 깨우치고, 영적 기능과 지능 면에서 잠자고 있는 자기를 깨우쳐야 한다. 자기가 깨우침을 받으면 자기의 존영성은 그만큼 올라간다. 모든 크고 작은 사건과 환난과 시험과 핍박을 이겨나갈 수 있는 자기로 깨우치고, 영능의 실력이 있는 신앙으로 자기가 될 수 있도록 깨우쳐라. 그 다음에는 많은 사람을 자기처럼 되도록 인도하고 깨우쳐서 주님께 밀착되게 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이 자기의 영광이 되는 거다. 정복을 하면 자기에게 그만큼 영광이 되는 거고, 무장을 하지 않으면 정복을 할 수 없는 거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교회에서 철야기도나 하고 뭘 달라고 하는 차원이 아니다. 우리교회에서 예수 믿는 것은 말씀으로 무장해서 적극적으로 정복을 해 나가는 거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해도 적극적으로 해야 되는데, 돈이 목적이 아니라 일의 방편을 통해서 상대를 진리로 정복하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일을 하다가 그 일이 망하건 흥하건 상관이 없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바로 하느냐가 문제다.
자타가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이 되게 하려면 먼저 진리지식으로 자기 사상화 되어야 하고, 이러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것이 자기의 소원이 된다. 그리고 이런 소원성의 사람이 되면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한 시간이 들어가고, 노력이 들어가고, 물질이 들어가고, 또한 사람과의 연관이 들어간다. 사람과의 대화를 매개물로 해서 진리복음을 전하는 거다.
진리지식을 자기 머릿속에만 집어넣어 놓고 다른 사람을 이 진리로 연관을 시키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무장을 하는 것은 써먹으려는 거고 싸우려는 거지 안 싸울 바에야 뭐하려고 무장을 하느냐? 일을 안 할 바에야 뭐하려고 먹느냐? 왜 먹는 거냐? 살려고 먹는 거냐, 일을 하려고 먹는 거냐? 살려고 먹는다면 이 사람은 일을 안 해도 살기만 하면, 먹기만 하면 된다는 것인데, 이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게 뭐냐? 우리는 장사를 하던, 공부를 하던, 기술을 가지던, 무엇을 하던 다른 사람과 연관관계를 가지며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에 목적이 있다.
우리가 경험상으로 보면 길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는 것보다 직장에서 같이 일을 하는 사람에게 전도하기가 더 수월하다. 그러니까 우리들에게는 일을 하는 장소가 전도처다. 그리고 전도를 하다보면 이방종교나 이단성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데, 이들이 자신의 종교를 설파하려고 하지 않는 이상 원수 삼지 말아라. 우리로서는 어떤 상황에서건 상대를 진리로서 계속 정복해야 한다.
우리가 전도를 하는 것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건데, 사람을 적극적으로 살리는 게 있는가 하면 적극적으로 죽이는 것도 있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는 어떤 상황에서건 사람을 적극적으로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대화가 들어간다. 대화가 잘 되지 않으면 물질을 통해서 대화의 기회를 만들기도 하는데, 이런 방법은 상대를 하나님께 밀착을 시키겠다고 하는 것이니 참 좋은 방편이다.
세상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사람에게 일을 시키지만 우리는 사업을 해도 사람을 예수 믿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을 시키는 거다. 이런 방편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예수님을 믿게 하고 예수님을 닮게 하는 거다. 단순히 하나님 앞에 십일조나 바치고 감사나 하는 게 예수 믿는 게 아니다.
자기에게 무엇이 잠을 자고 있느냐? 자기가 자기에게 영광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자기가 자기 신앙을 깨워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를 가르치는 인도자는 진리이치를 발굴해서 주고, 교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깨닫는 족족 자타에게 써먹어야 한다. 양이 양을 낳는 거다. 그러니까 교회의 인도자는 먼저 자기가 진리사상으로 무장을 하고 이 진리사상을 성도들에게 줘서 성도들이 진리정신으로 자라게 해야 하고, 그리고 성도는 양으로서 양을 낳아야 한다. 영은 영으로 되어 들어가는 거다. 이게 교회의 바른 질서다.
성도는 늘 자기를 살피며 자기의 잘못된 점이나 부족한 점을 발견하면 ‘내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라고 하며 자기를 채찍질하고 자기를 깨우치는 면으로 정신을 차려야 한다. ‘내가 이렇게 약해서야 되겠느냐? 내가 매일 아프다고 드러누워만 있으면 되겠느냐?’ 라고 하며 정신력으로 바로 서야 한다. 정신부터가 허물렁하면 몸이 무너지는 것은 자동적으로 따라온다. 사람은 정신력으로 죽음을 이겨내기도 한다. 정신이 그만큼 강한 거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사람이 비파나 수금소리를 들으면 귀가 그 쪽으로 쏠린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면 ‘좋은 음악이구나’ 라고 하면서 마음이 감동을 받는다. 그렇다면 비파나 수금의 소리처럼 누가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거냐? 암흑 속에 방치되어서 깨지 못한 사람을 누가 깨울 수 있는 거냐? 구약시대에는 선지 사도들이 했는데 지금은 누가 깨우느냐? 먼저 진리와 성령으로 자기를 깨워야 한다. 그래야 이 자기가 악기가 되어 많은 사람을 깨우치게 되는 거다. 이러면 그게 자기 영광이 되는 거다.
우리 목사님들도 경험을 했겠지만 자기가 옳은 것을 가지고 교인들을 가르칠 때 어느 교인이 이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하나님께 달라붙는 것이 보이면 목사 자기의 마음이 기쁘고 어딘지 모르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 같지 않더냐? 반대로 새롭게 깨달은 것을 열심히 전했는데도 싫다고 다 도망을 가버리면 뭔가 허전하지 않더냐? 그럴수록 ‘나에게 어떤 면이 부족한가?’ 하고 자기를 살피며 자기를 부지런히 깨워야 한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누가 이런 말을 잘 하느냐? 새벽기도를 하는 사람이냐?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라고 하는 것이 새벽기도를 하라는 강조의 말이냐? 새벽을 깨우는 사람이 누구냐? 청소하는 분들이냐? 종교적으로 보면 절의 중들이 새벽에 잠을 잘 안 잔다. 새벽이 되면 종을 치고 목탁을 두드린다.
일반적으로 새벽잠은 더 깊이 잔다. 깊은 잠을 자다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보다는 새벽잠을 깨우러 다니는 사람이 더 부지런하다. 그러면 누가 새 아침이 온다고 하면서 새벽잠을 깨우겠느냐? 세상을 붙들고 코를 골며 깊이 잠들어 있는 정신을 누가 깨울 수 있을까? 본문에서는 누가 이 잠을 깨우겠다고 하느냐? 다윗이다. 다윗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누가 깊이 잠든 것을 깨우겠느냐?
내가 다른 사람을 깨우려고 한다면 어떤 나라야 하겠느냐? 영의 눈이 밝은 나, 영의 귀가 밝은 나, 신앙정신 사상 면에 분별하고 깨어있는 내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다른 사람의 새벽잠을 깨우려면 나부터 깨어야 한다. 오늘날 마지막 시대의 교회상을 보면서 이런 점을 생각해 봐라. 우리의 신앙은 사적인 면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 공적인 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게 옳은 신앙이다. 개인적으로도 공적인 신앙으로 들어가야 공적인 일이 되는 거지 개인적 사적으로 하는 건 안 된다. 우리교회의 신앙이 ‘우리교회만’ 이게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보고 자타를 하나님께서 인정해 줄 수 있는 신앙이 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이 시대를 이길 수 있다.
9절: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내가 만민 중에서’ 라는 이 말이 자기는 다른 사람과 같다는 거냐, 특수라는 거냐? 자기는 특수다. ‘그 중에 너, 무리 중에 너’ 이 말이다. 진리로 깨어있는 성도는 만민 중에 하나의 인간, 열방 중에 하나의 인간이냐, 아니면 특수하고 특출한 인간이냐? 후자다. 주님은 어떤 인간이 특수한 인간인지 아신다. 특수한 이 인간에게는 만인과 같은 취급이 아니다. 새벽에 깊이 잠이 든 사람과, 새벽잠을 깨우는 다윗이 같으냐?
내가 건방진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우리교회 교인들은 다른 교회의 성도와 같지 않다고 본다. 왜냐? 첫째는 진리교훈을 받고 있으니까. 진리본질의 교훈을 받으면 이 사람 속에서 뭐가 자라겠느냐? 진리정신이 자란다. 이 자람의 성질은 ‘예수 믿어 세상에서 복 받자’ 라고 하는 일반교인들과 같지 않다. 진리의 교훈을 받다보면 인격적으로 만들어지지는 못했더라도 하다못해 귀문은 열리는 거다.
특별히 따로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의미가 있는 거다. 그러면 어떤 면이 같지 않은 건지? 이단이라서 같지 않은 건지, 진리라서 같지 않은 건지 그 이유가 있는 거다. 진리로 깨어있는 성도가 있다면 이 사람이 만민 중에 하나의 인간이냐? 많은 교회, 많은 교인들 중에 하나의 인간이냐? 아니면 특수하고 특출한 인간이냐? 우리가 자기의 위치와 신분을 한 번 생각해 봐라. 진리를 버리면 특수하고 특출한 것은 없는 거다.
우리 주님이 예수 믿는 내가 만민 중에 하나의 인간으로, 열방 중에 하나의 인간으로 살게 하려고 하늘나라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거냐? 세상사람들과 똑같이 하나의 인간으로 살게 하려고 피 값을 주고 자기를 산 것이냐? 열방들과 같은 수준의 정신을 가지라고 자기를 하나님의 백성의 인도자, 교회의 인도자로 세운 거냐? 자기는 피조물 중에 하나인가? 기독교가 모든 종교 중에 하나인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 이방신들과 같은 하나의 신인가? 주님께서 왜 자기를 만민 중에서 구속을 하셨느냐? 왜 열방 중에서 자기를 부르신 거냐? 만민 중에 선택된 자기, 열방 중에 선택된 자기, 뽑히고 뽑히고 또 뽑히고, 구별하고 구별하고 또 구별한 특수적인 자기가 아니냐?
사도가 일반이냐, 특수냐? 특수다. 목사가 일반이냐, 특수냐? 특수다. 하나님의 일꾼은 특수다. 그런데 이 특수를 자기의 육적인 목적에 이용해 먹으려고 하다가는 큰일 나는 거다. 특수적인 사상, 특수적인 정신인 진리를 버리고 일반적인 목회, 세상적인 목회를 한다면 이 사람이 예수님께서 교회에 보내신 하나님의 종이겠느냐?
성도에게 기본구원을 입혀서 성경을 주시고, 사건을 주시고, 보혜사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것은 일반보편의 정신으로 살라고 역사하심이더냐?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자기를 만민 가운데 두셨고 왜 열방 가운데 두신 거냐? 자기를 만민 가운데 둔 것은, 사람 가운데 둔 것은 ‘너는 저 사람들과 똑같으니 그들과 똑같은 레벨로 살아라’ 이 말이냐?
일반보편의 정신으로 살라고 기본구원을 입힌 거냐? 너만큼은 특수로 살아라. 먹고 마시고 입고 일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같아 보이지반 그것을 활용 이용 사용하는 너는 특수한 자로 살아라. 우리에게는 이러한 특수한 성질, 소원 목적, 정신이 있기 때문에 자기의 노력 시간 활동을 아무렇게나 할 수 없는 거다. 이런 정신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주님께 밀착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자기의 몸은 주님의 몸이다.
‘너는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할 자이고, 너는 열방 중에 주께 감사할 자이다’ 라고 하는 것이 간증하고 돌아다니고 찬송하고 돌아다니라는 말이냐? 그 말은 아니다. 왜 만인 가운데 자기를 두었는지? 왜 열방 가운데 자기를 두었는지? 인간 자기를 만드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게 되니 감사 찬송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거다.
10절: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주의 인자’란 하나님의 극진하고 크신 사랑을 말하는 것인데, 이 사랑을 받은 자들이 신령천국에서 영화로운 그 세계를 누린다는 거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능의 실력을 키워주려고 시련과 연단을 할 때는 무척 힘이 들고 죽을 맛이지만 그것을 이기고 나올 때는 그 기쁨이 영원히 간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주의 진리의 말씀은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절대 정확하게 이루시니 헛됨이 없다. 하신 말씀대로 궁창이 생겼고, 그 궁창의 허공에 모든 천체를 만드셨고, 모든 것들을 법칙대로 운행이 되게 했고, 사시와 연한을 이루니 이것이 창세 이후 지금까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즉 진리의 말씀은 영원히 변함이 없고 말씀대로 이루심도 영원히 변함이 없다는 말이다.
11절: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모든 악한 자들은 선악과 따먹은 사상으로 주 하나님을 땅으로 끌어내리는 일을 한다. 모든 교회를 땅의 소원 목적을 갖게 하여 땅에 속한 일을 하게 한다. 이게 악한 자들이다. 그러나 거룩한 진리의 종들은 주 하나님을 높이는 일을 한다. 성도들을 한 점 오류가 없고 실수가 없는 절대 정확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격화 시켜서 하늘의 소원 목적을 갖게 하고, 주의 영광으로 온 세계 위에 높아져서 하늘에까지 영광이 되는 특수한 정신 사상을 갖게 하는 일을 한다. 사람이 이렇게 되면 얼마나 높으냐 그 말이다.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려면 성도가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이룰구원 면으로 볼 때 성도 자기의 영광이 높아져야 주님이 올라간다. 주님과 우리와는 이렇게 밀접한 관계성이 있다. 주님은 원래부터 낮은 분이 아니다. 이 주님을 낮은 차원으로 떨어지게 하려면 그냥 끄집어 내리면 되는 거냐? 그게 아니라 성도가 낮아지면 주님도 떨어져버린다. 반대로 성도의 가치가 높아지면 주님도 올라간다. 연결이 되어있어서 그렇다.
그렇다면 주님을 올라가게 하기 위해서 성도 자기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성도 자기가 주님을 높이는 일을 해야 하느냐, 깎아내리는 일을 해야 하느냐? 주님을 깎아내리면 자기가 올라가느냐? 주님을 높이는 일을 해야 자기가 높아지는데, 주님을 높이는 일이 어떤 거냐? 자기가 속성적으로 주님처럼 되어지는 거다. 주님의 정신 사상을 가지는 거다. 이러면 자기로 인해 주님이 올라간다.
그러면 주님을 끄집어 내리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주님이 땅에 밟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믿는 자기가 저질적으로 되어서 술이나 먹고 오줌이나 싸면서 길바닥에 누워있다면 주님이 어떻게 되겠느냐? 주님을 떨어지게 하려면 자기부터 떨어져야 하고, 주님을 높이려면 자기부터 올라가야 한다. 연관성을 말하는 거다. 만일 자기가 저질적으로 떨어져서 주님을 떨어뜨리며 산다면 주님이 이런 나를 보고 ‘잘 한다. 잘 한다’ 그러겠느냐, 두들겨 패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8절: ‘내 영광아, 깰찌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찌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누구의 영광이냐? 다윗의 영광을 말한다. 즉 성도의 영광이요 예수 믿는 자기의 영광을 말한다. ‘비파야, 수금아, 깰찌어다.’ 악기를 연주하라는 거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성도다윗의 잠을 자고 있는 영광을 깨우겠다는 거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 자기의 잠자고 있는 영광이 무엇이냐? 우리 궁극교회 교인은 자기의 영광이 있는데 이것이 잠을 자고 있으면 그 영광을 깨워야 한다.
다윗에게 무엇이 영광이며, 또한 성도 자기에게 무엇이 영광이냐? 자기에게 영광이 될 무엇이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으냐? 전혀 모르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이룰구원을 위해서, 즉 우리로 하나님의 온전을 덧입게 하려는 것인데, 이를 위해 본문처럼 다양하게 용어를 달리하면서 다각적인 면으로 우리를 깨닫게 한다. 우리에게 무엇이 잠을 자고 있는 거냐? 자기에게 잠자고 있는 것을 깨워라. 성도로서 믿는 자기에게 깨울 것이 많다. 깨달아야 할 것이 많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잠을 잤느냐? 배에서. 그러니까 뭐가 일어났느냐? 파도가 일어났다. 그러면 이 배가 밧줄에 묶여서 정박을 하고 있었는데 이 배 안에 예수님이 혼자서 주무시다가 밧줄이 풀려서 떠내려가는 거냐? 그게 아니라 이 배에 제자들도 같이 타고 있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주님에게 천국에 대한 말씀을 죽을 때까지 들어도 모자랄 판이니 자신들과 같이 배에 탄 예수님께 천국에 대한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할 텐데 같이 한 배를 타고 있으면서도 이런 대화가 없었기 때문에 주님이 주무신 거다. 이렇게 되니 풍랑이 일었다.
믿는 우리는 자기를 진리지식으로 깨우치고, 지혜지식적으로 깨우치고, 하나님의 도덕성으로 잠자고 있는 자기를 깨우치고, 하나님의 능력성으로 잠자고 있는 자기를 깨우치고, 영적 기능과 지능 면에서 잠자고 있는 자기를 깨우쳐야 한다. 자기가 깨우침을 받으면 자기의 존영성은 그만큼 올라간다. 모든 크고 작은 사건과 환난과 시험과 핍박을 이겨나갈 수 있는 자기로 깨우치고, 영능의 실력이 있는 신앙으로 자기가 될 수 있도록 깨우쳐라. 그 다음에는 많은 사람을 자기처럼 되도록 인도하고 깨우쳐서 주님께 밀착되게 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이 자기의 영광이 되는 거다. 정복을 하면 자기에게 그만큼 영광이 되는 거고, 무장을 하지 않으면 정복을 할 수 없는 거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교회에서 철야기도나 하고 뭘 달라고 하는 차원이 아니다. 우리교회에서 예수 믿는 것은 말씀으로 무장해서 적극적으로 정복을 해 나가는 거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해도 적극적으로 해야 되는데, 돈이 목적이 아니라 일의 방편을 통해서 상대를 진리로 정복하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일을 하다가 그 일이 망하건 흥하건 상관이 없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바로 하느냐가 문제다.
자타가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이 되게 하려면 먼저 진리지식으로 자기 사상화 되어야 하고, 이러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것이 자기의 소원이 된다. 그리고 이런 소원성의 사람이 되면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한 시간이 들어가고, 노력이 들어가고, 물질이 들어가고, 또한 사람과의 연관이 들어간다. 사람과의 대화를 매개물로 해서 진리복음을 전하는 거다.
진리지식을 자기 머릿속에만 집어넣어 놓고 다른 사람을 이 진리로 연관을 시키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무장을 하는 것은 써먹으려는 거고 싸우려는 거지 안 싸울 바에야 뭐하려고 무장을 하느냐? 일을 안 할 바에야 뭐하려고 먹느냐? 왜 먹는 거냐? 살려고 먹는 거냐, 일을 하려고 먹는 거냐? 살려고 먹는다면 이 사람은 일을 안 해도 살기만 하면, 먹기만 하면 된다는 것인데, 이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게 뭐냐? 우리는 장사를 하던, 공부를 하던, 기술을 가지던, 무엇을 하던 다른 사람과 연관관계를 가지며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에 목적이 있다.
우리가 경험상으로 보면 길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는 것보다 직장에서 같이 일을 하는 사람에게 전도하기가 더 수월하다. 그러니까 우리들에게는 일을 하는 장소가 전도처다. 그리고 전도를 하다보면 이방종교나 이단성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데, 이들이 자신의 종교를 설파하려고 하지 않는 이상 원수 삼지 말아라. 우리로서는 어떤 상황에서건 상대를 진리로서 계속 정복해야 한다.
우리가 전도를 하는 것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건데, 사람을 적극적으로 살리는 게 있는가 하면 적극적으로 죽이는 것도 있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는 어떤 상황에서건 사람을 적극적으로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대화가 들어간다. 대화가 잘 되지 않으면 물질을 통해서 대화의 기회를 만들기도 하는데, 이런 방법은 상대를 하나님께 밀착을 시키겠다고 하는 것이니 참 좋은 방편이다.
세상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사람에게 일을 시키지만 우리는 사업을 해도 사람을 예수 믿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을 시키는 거다. 이런 방편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예수님을 믿게 하고 예수님을 닮게 하는 거다. 단순히 하나님 앞에 십일조나 바치고 감사나 하는 게 예수 믿는 게 아니다.
자기에게 무엇이 잠을 자고 있느냐? 자기가 자기에게 영광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자기가 자기 신앙을 깨워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를 가르치는 인도자는 진리이치를 발굴해서 주고, 교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깨닫는 족족 자타에게 써먹어야 한다. 양이 양을 낳는 거다. 그러니까 교회의 인도자는 먼저 자기가 진리사상으로 무장을 하고 이 진리사상을 성도들에게 줘서 성도들이 진리정신으로 자라게 해야 하고, 그리고 성도는 양으로서 양을 낳아야 한다. 영은 영으로 되어 들어가는 거다. 이게 교회의 바른 질서다.
성도는 늘 자기를 살피며 자기의 잘못된 점이나 부족한 점을 발견하면 ‘내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라고 하며 자기를 채찍질하고 자기를 깨우치는 면으로 정신을 차려야 한다. ‘내가 이렇게 약해서야 되겠느냐? 내가 매일 아프다고 드러누워만 있으면 되겠느냐?’ 라고 하며 정신력으로 바로 서야 한다. 정신부터가 허물렁하면 몸이 무너지는 것은 자동적으로 따라온다. 사람은 정신력으로 죽음을 이겨내기도 한다. 정신이 그만큼 강한 거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사람이 비파나 수금소리를 들으면 귀가 그 쪽으로 쏠린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면 ‘좋은 음악이구나’ 라고 하면서 마음이 감동을 받는다. 그렇다면 비파나 수금의 소리처럼 누가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거냐? 암흑 속에 방치되어서 깨지 못한 사람을 누가 깨울 수 있는 거냐? 구약시대에는 선지 사도들이 했는데 지금은 누가 깨우느냐? 먼저 진리와 성령으로 자기를 깨워야 한다. 그래야 이 자기가 악기가 되어 많은 사람을 깨우치게 되는 거다. 이러면 그게 자기 영광이 되는 거다.
우리 목사님들도 경험을 했겠지만 자기가 옳은 것을 가지고 교인들을 가르칠 때 어느 교인이 이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하나님께 달라붙는 것이 보이면 목사 자기의 마음이 기쁘고 어딘지 모르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 같지 않더냐? 반대로 새롭게 깨달은 것을 열심히 전했는데도 싫다고 다 도망을 가버리면 뭔가 허전하지 않더냐? 그럴수록 ‘나에게 어떤 면이 부족한가?’ 하고 자기를 살피며 자기를 부지런히 깨워야 한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누가 이런 말을 잘 하느냐? 새벽기도를 하는 사람이냐?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라고 하는 것이 새벽기도를 하라는 강조의 말이냐? 새벽을 깨우는 사람이 누구냐? 청소하는 분들이냐? 종교적으로 보면 절의 중들이 새벽에 잠을 잘 안 잔다. 새벽이 되면 종을 치고 목탁을 두드린다.
일반적으로 새벽잠은 더 깊이 잔다. 깊은 잠을 자다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보다는 새벽잠을 깨우러 다니는 사람이 더 부지런하다. 그러면 누가 새 아침이 온다고 하면서 새벽잠을 깨우겠느냐? 세상을 붙들고 코를 골며 깊이 잠들어 있는 정신을 누가 깨울 수 있을까? 본문에서는 누가 이 잠을 깨우겠다고 하느냐? 다윗이다. 다윗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누가 깊이 잠든 것을 깨우겠느냐?
내가 다른 사람을 깨우려고 한다면 어떤 나라야 하겠느냐? 영의 눈이 밝은 나, 영의 귀가 밝은 나, 신앙정신 사상 면에 분별하고 깨어있는 내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다른 사람의 새벽잠을 깨우려면 나부터 깨어야 한다. 오늘날 마지막 시대의 교회상을 보면서 이런 점을 생각해 봐라. 우리의 신앙은 사적인 면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 공적인 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게 옳은 신앙이다. 개인적으로도 공적인 신앙으로 들어가야 공적인 일이 되는 거지 개인적 사적으로 하는 건 안 된다. 우리교회의 신앙이 ‘우리교회만’ 이게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보고 자타를 하나님께서 인정해 줄 수 있는 신앙이 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이 시대를 이길 수 있다.
9절: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내가 만민 중에서’ 라는 이 말이 자기는 다른 사람과 같다는 거냐, 특수라는 거냐? 자기는 특수다. ‘그 중에 너, 무리 중에 너’ 이 말이다. 진리로 깨어있는 성도는 만민 중에 하나의 인간, 열방 중에 하나의 인간이냐, 아니면 특수하고 특출한 인간이냐? 후자다. 주님은 어떤 인간이 특수한 인간인지 아신다. 특수한 이 인간에게는 만인과 같은 취급이 아니다. 새벽에 깊이 잠이 든 사람과, 새벽잠을 깨우는 다윗이 같으냐?
내가 건방진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우리교회 교인들은 다른 교회의 성도와 같지 않다고 본다. 왜냐? 첫째는 진리교훈을 받고 있으니까. 진리본질의 교훈을 받으면 이 사람 속에서 뭐가 자라겠느냐? 진리정신이 자란다. 이 자람의 성질은 ‘예수 믿어 세상에서 복 받자’ 라고 하는 일반교인들과 같지 않다. 진리의 교훈을 받다보면 인격적으로 만들어지지는 못했더라도 하다못해 귀문은 열리는 거다.
특별히 따로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의미가 있는 거다. 그러면 어떤 면이 같지 않은 건지? 이단이라서 같지 않은 건지, 진리라서 같지 않은 건지 그 이유가 있는 거다. 진리로 깨어있는 성도가 있다면 이 사람이 만민 중에 하나의 인간이냐? 많은 교회, 많은 교인들 중에 하나의 인간이냐? 아니면 특수하고 특출한 인간이냐? 우리가 자기의 위치와 신분을 한 번 생각해 봐라. 진리를 버리면 특수하고 특출한 것은 없는 거다.
우리 주님이 예수 믿는 내가 만민 중에 하나의 인간으로, 열방 중에 하나의 인간으로 살게 하려고 하늘나라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거냐? 세상사람들과 똑같이 하나의 인간으로 살게 하려고 피 값을 주고 자기를 산 것이냐? 열방들과 같은 수준의 정신을 가지라고 자기를 하나님의 백성의 인도자, 교회의 인도자로 세운 거냐? 자기는 피조물 중에 하나인가? 기독교가 모든 종교 중에 하나인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 이방신들과 같은 하나의 신인가? 주님께서 왜 자기를 만민 중에서 구속을 하셨느냐? 왜 열방 중에서 자기를 부르신 거냐? 만민 중에 선택된 자기, 열방 중에 선택된 자기, 뽑히고 뽑히고 또 뽑히고, 구별하고 구별하고 또 구별한 특수적인 자기가 아니냐?
사도가 일반이냐, 특수냐? 특수다. 목사가 일반이냐, 특수냐? 특수다. 하나님의 일꾼은 특수다. 그런데 이 특수를 자기의 육적인 목적에 이용해 먹으려고 하다가는 큰일 나는 거다. 특수적인 사상, 특수적인 정신인 진리를 버리고 일반적인 목회, 세상적인 목회를 한다면 이 사람이 예수님께서 교회에 보내신 하나님의 종이겠느냐?
성도에게 기본구원을 입혀서 성경을 주시고, 사건을 주시고, 보혜사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것은 일반보편의 정신으로 살라고 역사하심이더냐?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자기를 만민 가운데 두셨고 왜 열방 가운데 두신 거냐? 자기를 만민 가운데 둔 것은, 사람 가운데 둔 것은 ‘너는 저 사람들과 똑같으니 그들과 똑같은 레벨로 살아라’ 이 말이냐?
일반보편의 정신으로 살라고 기본구원을 입힌 거냐? 너만큼은 특수로 살아라. 먹고 마시고 입고 일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같아 보이지반 그것을 활용 이용 사용하는 너는 특수한 자로 살아라. 우리에게는 이러한 특수한 성질, 소원 목적, 정신이 있기 때문에 자기의 노력 시간 활동을 아무렇게나 할 수 없는 거다. 이런 정신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주님께 밀착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자기의 몸은 주님의 몸이다.
‘너는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할 자이고, 너는 열방 중에 주께 감사할 자이다’ 라고 하는 것이 간증하고 돌아다니고 찬송하고 돌아다니라는 말이냐? 그 말은 아니다. 왜 만인 가운데 자기를 두었는지? 왜 열방 가운데 자기를 두었는지? 인간 자기를 만드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게 되니 감사 찬송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거다.
10절: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주의 인자’란 하나님의 극진하고 크신 사랑을 말하는 것인데, 이 사랑을 받은 자들이 신령천국에서 영화로운 그 세계를 누린다는 거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능의 실력을 키워주려고 시련과 연단을 할 때는 무척 힘이 들고 죽을 맛이지만 그것을 이기고 나올 때는 그 기쁨이 영원히 간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주의 진리의 말씀은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절대 정확하게 이루시니 헛됨이 없다. 하신 말씀대로 궁창이 생겼고, 그 궁창의 허공에 모든 천체를 만드셨고, 모든 것들을 법칙대로 운행이 되게 했고, 사시와 연한을 이루니 이것이 창세 이후 지금까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즉 진리의 말씀은 영원히 변함이 없고 말씀대로 이루심도 영원히 변함이 없다는 말이다.
11절: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모든 악한 자들은 선악과 따먹은 사상으로 주 하나님을 땅으로 끌어내리는 일을 한다. 모든 교회를 땅의 소원 목적을 갖게 하여 땅에 속한 일을 하게 한다. 이게 악한 자들이다. 그러나 거룩한 진리의 종들은 주 하나님을 높이는 일을 한다. 성도들을 한 점 오류가 없고 실수가 없는 절대 정확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격화 시켜서 하늘의 소원 목적을 갖게 하고, 주의 영광으로 온 세계 위에 높아져서 하늘에까지 영광이 되는 특수한 정신 사상을 갖게 하는 일을 한다. 사람이 이렇게 되면 얼마나 높으냐 그 말이다.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려면 성도가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이룰구원 면으로 볼 때 성도 자기의 영광이 높아져야 주님이 올라간다. 주님과 우리와는 이렇게 밀접한 관계성이 있다. 주님은 원래부터 낮은 분이 아니다. 이 주님을 낮은 차원으로 떨어지게 하려면 그냥 끄집어 내리면 되는 거냐? 그게 아니라 성도가 낮아지면 주님도 떨어져버린다. 반대로 성도의 가치가 높아지면 주님도 올라간다. 연결이 되어있어서 그렇다.
그렇다면 주님을 올라가게 하기 위해서 성도 자기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성도 자기가 주님을 높이는 일을 해야 하느냐, 깎아내리는 일을 해야 하느냐? 주님을 깎아내리면 자기가 올라가느냐? 주님을 높이는 일을 해야 자기가 높아지는데, 주님을 높이는 일이 어떤 거냐? 자기가 속성적으로 주님처럼 되어지는 거다. 주님의 정신 사상을 가지는 거다. 이러면 자기로 인해 주님이 올라간다.
그러면 주님을 끄집어 내리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주님이 땅에 밟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믿는 자기가 저질적으로 되어서 술이나 먹고 오줌이나 싸면서 길바닥에 누워있다면 주님이 어떻게 되겠느냐? 주님을 떨어지게 하려면 자기부터 떨어져야 하고, 주님을 높이려면 자기부터 올라가야 한다. 연관성을 말하는 거다. 만일 자기가 저질적으로 떨어져서 주님을 떨어뜨리며 산다면 주님이 이런 나를 보고 ‘잘 한다. 잘 한다’ 그러겠느냐, 두들겨 패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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