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메시지128(마태21)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4)
서론: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애통이 무엇이냐? 본문에 애통(哀痛, 헬라어 펜둔테스 πενθουντες)으로 번역된 말은 부모나, 자녀나, 남편이나, 아내같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슬픔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슬픔이나 애통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은 하나님과 천국을 위한 신령한 애통이며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의로운 애통입니다.
이 시간에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은 영적 애통이며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는 의인의 애통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팔 복(八福)은, 이 땅의 부귀영화나 무병장수 같은 세속적인 복이 아니라, 영적인 복(福)입니다. 팔 복 중 첫 번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며 두 번째 복은 “애통하는 자의 복”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도 불행이나 고통으로 인한 애통이 아니라 영적인 애통입니다. 신앙의 문제와, 죄의 문제와, 정의와 진리의 문제로 애통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광야에는 사랑과 결혼과 가정이라는 행복의 오아시스도 있지만, 죄악과 질병과 고통과 죽음이라는 슬픔과 불행의 골짜기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은 영적인 애통이며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는 의인의 애통이란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관용과 침묵, 관용과 회피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뜻에 역행하는 불의와 불법은 관용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불의를 보면 분노할 줄 알아야 하고, 죄를 지었을 때는 애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작고 사소한 일에도 감사하라는 뜻이지, 죄악에 침묵하고 불의에 눈을 감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와 불의하고 타락한 현실을 보면 분노하고 애통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얼마나 자주 애통하셨습니까?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슬퍼하시고 탄식하신 장면은 있지만, 기뻐하시고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비친 세상은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인자하고 잔잔한 미소와 밝은 표정은 구원받고 은혜받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불의와 불법을 보면 분노하고 애통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애통하느냐? 구원받은 사람이 죄악과 불법에 애통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정의감으로 충만한 사람이 애통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은 내가 하나님 앞에 진실하지 못해서 애통하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지 않기 때문에 애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은 슬픔이나 불행을 예찬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애통이며,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는 의인의 애통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애통해야 할까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애통해야 할까요? 먼저 자기의 죄를 애통해야 합니다. 자기의 죄와 허물을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흰색 옷을 입은 사람이, 회색이나 어두운 색의 옷을 입은 사람보다 조심해서 행동하고 옷에 신경을 씁니다. 또 목욕을 하지 않은 사람보다 목욕을 한 사람이 청결에 신경을 씁니다. 죄에 대한 태도도 그와 같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죄에 민감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한 성도가 죄를 두려워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작은 죄와 사소한 실수에도 애통하며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악하고 불의한 인간들은 죄를 밥 먹듯 먹고 마시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애통하지 않습니다. 악인들은 자기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간다고 주장합니다. 악인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다 죄를 짓는다고 나의 죄가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이 있습니다. 자기 죄를 시인하는 죄인과 나는 죄가 없다고 자기 죄를 부인하는 죄인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자기 죄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는 사람이 애통하겠습니까? 자기 죄를 부인하는 사람이 애통하겠습니까? 자기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는 사람이 애통합니다. 애통하는 사람이 왜 복이 있느냐? 애통하고 회개해야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은혜와 축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로 애통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구원받은 심령이며 천국에 가까이 간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증거가 무엇이냐? 회개와 애통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회개하고 애통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과 우리 사회의 죄악과 불의한 문제로 애통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5:13).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소금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지만, 음식의 부패와 변질을 막는 방부제로도 사용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부패와 타락을 막는 영적 방부제가 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부패와 타락을 막는 영적 방부제가 돼야 하며, 죄악과 불법을 감시하는 정의의 파수꾼이 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부패와 타락을 막는 소금이 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이웃과 우리 사회의 문제와, 세상의 정의와 세상의 평화를 위해, 애통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옛날에 제가 서울에 살고 있을 때 교회 옆에 사는 불신자로부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왜 새벽마다 시끄럽게 울면서 기도하느냐?”고 질문 겸 핀잔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새벽마다 애통하고 회개하는 성도들의 기도 소리에 잠을 설쳤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사람에게 “당신은 다른 사람이나 이웃을 위해 애통하고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느냐? 당신은 당신 자신과 당신 가족밖에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애통하며 눈물로 기도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웃의 불행과 고통을 보고 마음이 아프지 않는 사람, 그리고 불의와 죄악을 보고 분노를 느끼지 못하고, 애통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백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누가복음 9:41).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까?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유대인들이 당할 고난과 불행을 안타까워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나의 행복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하나님도 되시지만, 온 세상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사회의 불법과 타락과 불신앙과 우상숭배를 애통하는 사람이 돼야 하며 모든 사람의 행복을 기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오늘의 이 세대를 보면 애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교회를 비방하는 것은 그래도 참을 수 있습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을 낙심시키고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타락한 교회와 타락한 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 전라남도 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세월호 여객선 참사로, 3백여 명이 목숨을 잃고 온 나라가 슬픔에 빠져있는데, 어떤 목사라는 인간들이 박근혜 정부를 지지하고 두둔하는 발언으로 교회가 얼마나 온 국민의 공분을 사고 비난을 받았습니까? 이런 인간들은 목사가 아니라 한국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탄, 마귀의 하수인들입니다.
오늘날 국민정서와 동떨어진 정치적 발언으로, 한국 교회를 말아먹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전광훈이와 장경동이 같은 정치꾼 목사들은 하나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타락한 교회와 타락한 성도들 때문에 하나님과 교회가 비난을 받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도 이렇게 아플 때 하나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시편 기자는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라고 탄식했습니다(시편 119:136). 진실한 성도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애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과 인류의 미래를 너무 낙관하면 안 됩니다. 오늘날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인간의 삶의 질은 향상됐지만, 우리 사회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질의 풍요는 물질만능주의를 가져왔고, 물질만능주의 앞에 인간의 가치는 철저하게 부정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과학과 문명이 발달해서, 인간의 의식주(衣食住) 문제가 해결되고, 풍요로운 세상이 되면 살인이나 강도와 같은 범죄와 사회적인 문제도 해결되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우리 사회의 중심에서 몰아냈습니다. 인간의 일자리가 로봇으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질의 풍요는 빈부격차를 더욱 심화시키고 알콜과 마약중독자와 성범죄와 흉악범과 실업자만 양산해내고 있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날까요? 왜 교육이나 물질이나 눈부신 과학의 발달로도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우리 사회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이 잘못 됐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돼야 합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입니까? 인간은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 형상이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아가도록 부여받은 이성과 지혜와 영적 자질과 영적 성품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하나님 뜻에 역행하는 동성애, 동성결혼, 독신주의, 에이즈, 제삼의 성 등 추악하고 저주스러운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사회학자와 정치인과 시민운동가들은 앵무새처럼 포용과 문화라는 주장만 되뇌고 있습니다. 동성애와 성적 타락도 시대의 흐름으로 받아들이고, 살인과 테러를 일삼는 이슬람도 포용하고 받아들이라고 주장합니다. 포용하고 받아들이면 문제가 해결됩니까? 암에 걸린 환자에게 암은 별것 아니라고 덮어두고 부정하면 암이 저절로 치료가 됩니까? 사회의 구성원인 인간이, 사회를 바로 세우지 않으면, 그 사회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사회가 개혁되지 않고,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리 물질이 풍족하고 아무리 과학과 문명이 발달해도 그 사회는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변해야 사회가 개혁되고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방법이 무엇이냐? 살아서 역사하는 하나님 말씀이 들어가서 사람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성경 로마서 7장은 바울 사도가 중생하고 회심한 다음에 겪었던, 신앙의 갈등을 고백한 주옥같이 귀한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7:15),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7:19),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습니다(7:24). 바울 사도의 탄식이 구원받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애통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신령한 애통입니다.
오늘날 목사의 설교는 죄에 대한 책망이 없습니다. 목사가 죄를 무섭게 꾸짖고 책망해야 그리스도인이 죄를 두려워할 텐데, 목사들이 죄의 문제에 벙어리가 되어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알’이란 우상 사이에서 머뭇거린 것처럼, 오늘날 목사는 하나님과 교인들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양 떼를 위로한답시고 명백한 죄악을 보고도 눈을 감고 침묵합니다. 목사가 성도들의 죄악을 침묵하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겠습니까? 목사가 강단에서 죄를 죄라고 꾸짖지 않으면, 누가 죄의 문제로 애통하겠습니까? 목사가 강단에서 사회의 불의와 불법을 꾸짖지 않으면 누가 사회문제로 애통하겠습니까? 목사는 이 시대에 필요한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회개한 사람이 애통하고, 의로운 사람이 애통하며, 애통한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와 위로를 받기 때문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동성애와 동성결혼과 독신주의와 성평등을 주장하는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과 교회와 정의와 진리를 위해 애통하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4, 7, 21.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4)
서론: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애통이 무엇이냐? 본문에 애통(哀痛, 헬라어 펜둔테스 πενθουντες)으로 번역된 말은 부모나, 자녀나, 남편이나, 아내같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슬픔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슬픔이나 애통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은 하나님과 천국을 위한 신령한 애통이며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의로운 애통입니다.
이 시간에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은 영적 애통이며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는 의인의 애통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팔 복(八福)은, 이 땅의 부귀영화나 무병장수 같은 세속적인 복이 아니라, 영적인 복(福)입니다. 팔 복 중 첫 번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며 두 번째 복은 “애통하는 자의 복”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도 불행이나 고통으로 인한 애통이 아니라 영적인 애통입니다. 신앙의 문제와, 죄의 문제와, 정의와 진리의 문제로 애통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광야에는 사랑과 결혼과 가정이라는 행복의 오아시스도 있지만, 죄악과 질병과 고통과 죽음이라는 슬픔과 불행의 골짜기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은 영적인 애통이며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는 의인의 애통이란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관용과 침묵, 관용과 회피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뜻에 역행하는 불의와 불법은 관용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불의를 보면 분노할 줄 알아야 하고, 죄를 지었을 때는 애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작고 사소한 일에도 감사하라는 뜻이지, 죄악에 침묵하고 불의에 눈을 감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와 불의하고 타락한 현실을 보면 분노하고 애통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얼마나 자주 애통하셨습니까?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슬퍼하시고 탄식하신 장면은 있지만, 기뻐하시고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비친 세상은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인자하고 잔잔한 미소와 밝은 표정은 구원받고 은혜받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불의와 불법을 보면 분노하고 애통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애통하느냐? 구원받은 사람이 죄악과 불법에 애통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정의감으로 충만한 사람이 애통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은 내가 하나님 앞에 진실하지 못해서 애통하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지 않기 때문에 애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은 슬픔이나 불행을 예찬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애통이며,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는 의인의 애통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애통해야 할까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애통해야 할까요? 먼저 자기의 죄를 애통해야 합니다. 자기의 죄와 허물을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흰색 옷을 입은 사람이, 회색이나 어두운 색의 옷을 입은 사람보다 조심해서 행동하고 옷에 신경을 씁니다. 또 목욕을 하지 않은 사람보다 목욕을 한 사람이 청결에 신경을 씁니다. 죄에 대한 태도도 그와 같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죄에 민감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한 성도가 죄를 두려워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작은 죄와 사소한 실수에도 애통하며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악하고 불의한 인간들은 죄를 밥 먹듯 먹고 마시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애통하지 않습니다. 악인들은 자기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간다고 주장합니다. 악인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다 죄를 짓는다고 나의 죄가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이 있습니다. 자기 죄를 시인하는 죄인과 나는 죄가 없다고 자기 죄를 부인하는 죄인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자기 죄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는 사람이 애통하겠습니까? 자기 죄를 부인하는 사람이 애통하겠습니까? 자기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는 사람이 애통합니다. 애통하는 사람이 왜 복이 있느냐? 애통하고 회개해야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은혜와 축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로 애통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구원받은 심령이며 천국에 가까이 간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증거가 무엇이냐? 회개와 애통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회개하고 애통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과 우리 사회의 죄악과 불의한 문제로 애통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5:13).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소금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지만, 음식의 부패와 변질을 막는 방부제로도 사용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부패와 타락을 막는 영적 방부제가 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부패와 타락을 막는 영적 방부제가 돼야 하며, 죄악과 불법을 감시하는 정의의 파수꾼이 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부패와 타락을 막는 소금이 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이웃과 우리 사회의 문제와, 세상의 정의와 세상의 평화를 위해, 애통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옛날에 제가 서울에 살고 있을 때 교회 옆에 사는 불신자로부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왜 새벽마다 시끄럽게 울면서 기도하느냐?”고 질문 겸 핀잔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새벽마다 애통하고 회개하는 성도들의 기도 소리에 잠을 설쳤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사람에게 “당신은 다른 사람이나 이웃을 위해 애통하고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느냐? 당신은 당신 자신과 당신 가족밖에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애통하며 눈물로 기도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웃의 불행과 고통을 보고 마음이 아프지 않는 사람, 그리고 불의와 죄악을 보고 분노를 느끼지 못하고, 애통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백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누가복음 9:41).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까?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유대인들이 당할 고난과 불행을 안타까워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나의 행복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하나님도 되시지만, 온 세상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사회의 불법과 타락과 불신앙과 우상숭배를 애통하는 사람이 돼야 하며 모든 사람의 행복을 기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오늘의 이 세대를 보면 애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교회를 비방하는 것은 그래도 참을 수 있습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을 낙심시키고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타락한 교회와 타락한 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 전라남도 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세월호 여객선 참사로, 3백여 명이 목숨을 잃고 온 나라가 슬픔에 빠져있는데, 어떤 목사라는 인간들이 박근혜 정부를 지지하고 두둔하는 발언으로 교회가 얼마나 온 국민의 공분을 사고 비난을 받았습니까? 이런 인간들은 목사가 아니라 한국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탄, 마귀의 하수인들입니다.
오늘날 국민정서와 동떨어진 정치적 발언으로, 한국 교회를 말아먹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전광훈이와 장경동이 같은 정치꾼 목사들은 하나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타락한 교회와 타락한 성도들 때문에 하나님과 교회가 비난을 받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도 이렇게 아플 때 하나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시편 기자는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라고 탄식했습니다(시편 119:136). 진실한 성도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애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과 인류의 미래를 너무 낙관하면 안 됩니다. 오늘날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인간의 삶의 질은 향상됐지만, 우리 사회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질의 풍요는 물질만능주의를 가져왔고, 물질만능주의 앞에 인간의 가치는 철저하게 부정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과학과 문명이 발달해서, 인간의 의식주(衣食住) 문제가 해결되고, 풍요로운 세상이 되면 살인이나 강도와 같은 범죄와 사회적인 문제도 해결되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우리 사회의 중심에서 몰아냈습니다. 인간의 일자리가 로봇으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질의 풍요는 빈부격차를 더욱 심화시키고 알콜과 마약중독자와 성범죄와 흉악범과 실업자만 양산해내고 있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날까요? 왜 교육이나 물질이나 눈부신 과학의 발달로도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우리 사회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이 잘못 됐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돼야 합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입니까? 인간은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 형상이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아가도록 부여받은 이성과 지혜와 영적 자질과 영적 성품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하나님 뜻에 역행하는 동성애, 동성결혼, 독신주의, 에이즈, 제삼의 성 등 추악하고 저주스러운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사회학자와 정치인과 시민운동가들은 앵무새처럼 포용과 문화라는 주장만 되뇌고 있습니다. 동성애와 성적 타락도 시대의 흐름으로 받아들이고, 살인과 테러를 일삼는 이슬람도 포용하고 받아들이라고 주장합니다. 포용하고 받아들이면 문제가 해결됩니까? 암에 걸린 환자에게 암은 별것 아니라고 덮어두고 부정하면 암이 저절로 치료가 됩니까? 사회의 구성원인 인간이, 사회를 바로 세우지 않으면, 그 사회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사회가 개혁되지 않고,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리 물질이 풍족하고 아무리 과학과 문명이 발달해도 그 사회는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변해야 사회가 개혁되고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방법이 무엇이냐? 살아서 역사하는 하나님 말씀이 들어가서 사람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성경 로마서 7장은 바울 사도가 중생하고 회심한 다음에 겪었던, 신앙의 갈등을 고백한 주옥같이 귀한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7:15),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7:19),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습니다(7:24). 바울 사도의 탄식이 구원받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애통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신령한 애통입니다.
오늘날 목사의 설교는 죄에 대한 책망이 없습니다. 목사가 죄를 무섭게 꾸짖고 책망해야 그리스도인이 죄를 두려워할 텐데, 목사들이 죄의 문제에 벙어리가 되어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알’이란 우상 사이에서 머뭇거린 것처럼, 오늘날 목사는 하나님과 교인들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양 떼를 위로한답시고 명백한 죄악을 보고도 눈을 감고 침묵합니다. 목사가 성도들의 죄악을 침묵하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겠습니까? 목사가 강단에서 죄를 죄라고 꾸짖지 않으면, 누가 죄의 문제로 애통하겠습니까? 목사가 강단에서 사회의 불의와 불법을 꾸짖지 않으면 누가 사회문제로 애통하겠습니까? 목사는 이 시대에 필요한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회개한 사람이 애통하고, 의로운 사람이 애통하며, 애통한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와 위로를 받기 때문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동성애와 동성결혼과 독신주의와 성평등을 주장하는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과 교회와 정의와 진리를 위해 애통하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4,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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