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스크랩 알면서도 행하지 못한 신앙

열려라 에바다 2024. 8. 8. 11:22
 알면서도 행하지 못한 신앙
 
선한양치기추천 3조회 22924.08.02 15:19댓글 2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1-5)


오늘은 본문에 나오는 에베소교회의 신앙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어떻게 실천 되었는지를 살펴보면서 은혜의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우리가 에베소교회의 역사를 정확히 알면 에베소교회가 우상의 도시 에베소에서 어떤 신앙으로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의 큰 지표가 됩니다.


에베소교회는 아볼로에 의하여 시작된 교회입니다. 아볼로가 가진 구원관은 주의 복음을 정확히 몰랐기에 세례 요한과 같은 구약의 메시야적 구원관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 되심을 증거하였고, 그 예수를 믿을 때에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치는 수준의 구원관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볼로의 사역은 세례 요한의 사역과 같은 수준의 사역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렇게 목회하는 분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전부입니다.


(행 18:25-26)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그래서 바울이 에베소로 가서 에베소교회를 복음 위에 바로 세우는 작업을 합니다. 바울이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그 분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무엇을 하셨으며, 구원한 자기 백성의 임금으로 어떤 복음을 주셨는지를 가르쳤고, 그 복음의 말씀 따라 살아가는 것이 이 땅에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 삶임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에베소교회 성도들로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이 되도록 만듭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는 우리에게 주의 복음의 말씀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지막 당부도 “복음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당부하신 주의 말씀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습니다.


그 바울을 이어서 에베소교회를 목회한 사람이 디모데입니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주의 복음의 말씀을 바로 알고 있는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통해서 신앙의 교육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를 바울은 복음의 군사로 택하여 훈련시켰고,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교회들을 복음위에 서서 신앙생활 하도록 교육하도록 하였습니다.


바울이 순교하자 데모데는 자기 교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우상의 도시 에베소로 발길을 돌립니다. 그곳에서 순교의 신앙으로 복음을 가르치다가 “아데미 여신은 신이 아니고 우상에 불가하다”고 외치며 전도하다가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사업을 하면서 생업을 이어가던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순교합니다.


디모데가 순교하자 사도 요한이 에베소교회의 목회자로 나서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오직 주의 복음만을 강조한 목회자였습니다. 그의 요한복음 첫 서두로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오신 분이요, 그 분이 세상의 빛이 되심을 강조합니다.


사도요한은 단순히 우상과의 영적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교리를 가지고 헬라 사상과 혼합하여 영지주의를 만든 이단들과의 영적 싸움까지 한 목회자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첫 서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로고스(말씀,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로고스는 영지주의 자들이 최고의 신이라고 말하는 신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영지주의 자들은 최고의 신이 빛에 거하는 신이라고 하였기에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이 되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고, 영생을 누리게 됨을 가르칩니다.


(요 1:4-13)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이렇게 에베소교회는 복음을 잘 모르는 아볼로로 시작 되었지만 바울과 데모데와 사도요한을 통해서 복음위에 귿게 세워지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잘못된 가르침이고, 누가 이단인지를 알았던 교회입니다. 그러나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 속에서 생계를 어어갈 사업을 할 수가 없어 삶이 곤고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도 어럽기 때문에 가난한 다른 사람을 돌아볼 형편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가난을 못이기고 예수를 버리고 배교하고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삶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내어주던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던 신앙도 잃고, 이제는 용서하는 마음도 잃어버리고 서로 원망하고,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복음 위에서 살던 그 아름다운 신앙을 다시 회복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에베소교회를 통해서 아무리 복음을 잘 알고 굳건한 신앙을 가졌어도, 삶의 곤고함이 오면 흔들릴 수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저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요한복음 3:16절이 생각이 납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셨으니,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기 위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눈물 흘리며 복음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우리를 “잘했다, 내 종아”라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신앙은 환경이 좋을 때에 들어나는 것이 아니고 삶이 힘들 때에 들어나는 것 같습니다.


에베소교회는 복음을 바로 알고 있는 목회자들을 만나 우상의 도시에서 복음적 신앙을 바로 가진 교회가 되지만, 삶의 곤고함이 오자 복음의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교회가 됩니다.


삶이 곤고할 때에 우리는 복음의 말씀을 실천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하고 싶어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우리에게 형제를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삶의 곤고함 때문에 복음을 실천하지 못하는 신앙을 가시밭에 떨어진 씨와 같은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마 13:18,22)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요일 3:17-18)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므로 복음에 순종하며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복음을 알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신앙을 가지도록 우리는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에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양의 무리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 6:25-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곤고한 삶속에서 울면서 복음을 이루어 갈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에 순종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