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이적 (막 2:1-12)
1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를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이 시간에 “말씀의 이적”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기적을 원하십니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길 원합니다. 기적은 어떻게 일어날까요? 미국의 러시모어 산 화강암 절벽에는 미국에 기적을 이룬 네 명의 대통령 흉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그 이름은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즈벨트, 그리고 에이브라함 링컨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미국을 위대하게 했고 그리고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아주 중하게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그 예로 워싱턴은 말하기를 “성경이 아니면 세계를 다스릴 수 없다.”, 제퍼슨은 “미국은 성경을 반석으로 삼아 서 있는 나라다.”, 루즈벨트는 “어떤 방면에 일하는 사람이든 그가 자신의 생을 참되게 가꾸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에게 성경을 묵상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링컨은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세계 초일류국가인 미국이 그냥 탄생한 것이 아니라 말씀의 기적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에 기초했더니 위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이적도 말씀입니다. 31운동의 민족대표 대부분도 기독교인이었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하나님을 만난 사람으로, 기독교정신에 입각하여 자유민주주의의 나라를 세웠고, 애국가에 하나님이 들어갈 만큼 대한민국은 말씀에 기초한 나라입니다. 사람들은 한국인은 부지런하고 영리하고 훌륭해서라고 말하지만 그럼 같은 민족인데 북쪽은 왜 못삽니까? 만약 이 나라가 무신론 독재 공산주의를 따랐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복을 굳게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한국의 기적은 성경의 기적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도 놀라운 기적이 나타납니다. 2절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한 말씀대로 말씀하실 때 일어난 이적입니다. 죽어가던 중풍병자가 낫는 이적도 이적이지만, 그 회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변화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이적을 가져다줄까요?
1. 사모하는 이적입니다.
2절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얼마나 입추 여지없이 모였으면 집 안팎으로 들어설 자리가 없었을까요?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사모하는 열정입니다. 얼마나 사모했으면 집 안팎을 가득히 채웠겠습니까? 날씨는 덥지요, 사람들은 많지요, 자리도 없죠. 예수님 얼굴도 보기 어렵죠. 그러나 그들의 사모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냉난방이 있습니까? 차량이 있습니까? 길은 멀고 장화가 아니면 다닐 수 없는 때였지만 얼마나 믿음의 열정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이처럼 주의 음성이 그렇게 위대합니다. 한 번 주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열정을 버리지 못합니다. 요10:3-5에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하셨어요.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요. 그 음성을 들으면 양들이 기뻐 뜁니다. 이 음성을 들을 때 죽은 심령도 살아납니다. 요5:25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 열심히 보시고, 설교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2. 말씀 이적은 믿어지는 이적입니다.
3-4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를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이 말씀을 읽고 보통 메고 온 네 사람의 믿음만 말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도록 했어요. 사람들이 이 일의 주체입니다. 이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입니다.
즉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로 데려오면 고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지조차 쓰지 못하는 중풍병자를 데려온 것입니다. 중풍병은 당시는 물론 의학이 발달되었어도 지금도 어려운 병입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병은 아니니 낙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세상적으로는 말도 안 되지만 주님을 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모든 것은 은혜의 차이입니다. 90이 다 된 사라에게 아들을 낳으리라 했을 때 사라 본인도 웃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은 세상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은혜받은 사람은 언제나 할 수 있다는 믿음이지만, 은혜받지 못한 사람은 할 수 있어도 할 수 없다. 할 수 없어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3. 말씀 이적은 불가능이 없는 이적입니다.
4-7절에 “무리를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부류의 사람을 봅니다. 긍정적인 사람과 부정적인 사람입니다. 중풍병자를 데려왔으나 예수님께로 가기가 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중풍병자를 예수 앞에 데리고 갈 수 있다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서기관들처럼 쥐꼬리만한 지식으로 말씀을 꼬투리 잡으며 하나님의 일을 훼방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가 절실해서 길을 양보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네 사람에게는 불가능의 사고가 없었습니다. 최대한 가능한 방법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방법은 지붕을 뚫고 병상을 내려보내는 길이었습니다. 유대의 옥상은 뚫기가 쉽다고 하나 남의 지붕을 뚫고 내린다는 생각을 보통 사람이 할 수 있습니까? 여기서 그들이 얼마나 긍정적인 믿음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말씀에서 은혜를 받으면 언제나 긍정적인 믿음을 갖습니다. 홍해가 가로놓였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막9:23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암담해도 무슨 방법이라고 있을 것이라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은혜 받으면 하늘에서라도 길이 생기고 바다라도 갈라져 길이 날 것을 믿고 그 길을 찾게 됩니다.
4. 말씀의 이적은 순종하며 행하는 이적입니다.
9절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하셨습니다. 어느 편이 더 어려울까요? 전능하신 예수님이시니 어느 것이 더 쉽거나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사람 보기에는 병자에게 걸어가라 하는 말이 더 어렵습니다. 죄를 사하는 것은 보이지 않으니까 증거를 내놓을 필요가 없지만, 걸어가라 할 때 걸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 역시 걸어가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누운지가 언제고 몸의 상태가 어떠한데 사람의 생각이라면 어떻게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어느 집사님은 병들어 누운지가 오래 되서 손가락도 발가락도 눈동자까지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을 떠나 산 잘못이 생각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데 다리를 뻗고 기도하는 모습이 어찌나 죄송스러운지 하나님께 발만이라도 오그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기를 몇 주가 지났고 다리를 오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또 몇 주 후에는 무릎을 꿇 수 있었고, 또 몇 주 후에는 서서 걷다가 쉬다가를 반복하여 교회에 나올 수 있었고 완치되어 교직에 복직이 되었고 지금은 수십 년이 지나 8순이 되신 목사님이십니다.
이처럼 중풍병자는 자기를 맘대로 할 수 없는 몸임을 아는데도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힘써서 움직여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고쳐주셔서 움직이게 되었고 자기 상을 들고 걸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할 수 없다고 남까지도 못하게 막아서는 안 됩니다. 나도 할 수 있고 모두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모스 선지자는 외쳤습니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12). 바로 지금이 그런 시대입니다. 이 절망의 세상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거나 들려줄 수 있다면 그것은 최고의 행복이요 소망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날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의 음성인 성경을 읽을 뿐 아니라 나아가 주의 사역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에 “말씀의 이적”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기적을 원하십니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길 원합니다. 기적은 어떻게 일어날까요? 미국의 러시모어 산 화강암 절벽에는 미국에 기적을 이룬 네 명의 대통령 흉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그 이름은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즈벨트, 그리고 에이브라함 링컨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미국을 위대하게 했고 그리고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아주 중하게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그 예로 워싱턴은 말하기를 “성경이 아니면 세계를 다스릴 수 없다.”, 제퍼슨은 “미국은 성경을 반석으로 삼아 서 있는 나라다.”, 루즈벨트는 “어떤 방면에 일하는 사람이든 그가 자신의 생을 참되게 가꾸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에게 성경을 묵상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링컨은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세계 초일류국가인 미국이 그냥 탄생한 것이 아니라 말씀의 기적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에 기초했더니 위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이적도 말씀입니다. 31운동의 민족대표 대부분도 기독교인이었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하나님을 만난 사람으로, 기독교정신에 입각하여 자유민주주의의 나라를 세웠고, 애국가에 하나님이 들어갈 만큼 대한민국은 말씀에 기초한 나라입니다. 사람들은 한국인은 부지런하고 영리하고 훌륭해서라고 말하지만 그럼 같은 민족인데 북쪽은 왜 못삽니까? 만약 이 나라가 무신론 독재 공산주의를 따랐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복을 굳게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한국의 기적은 성경의 기적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도 놀라운 기적이 나타납니다. 2절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한 말씀대로 말씀하실 때 일어난 이적입니다. 죽어가던 중풍병자가 낫는 이적도 이적이지만, 그 회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변화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이적을 가져다줄까요?
1. 사모하는 이적입니다.
2절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얼마나 입추 여지없이 모였으면 집 안팎으로 들어설 자리가 없었을까요?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사모하는 열정입니다. 얼마나 사모했으면 집 안팎을 가득히 채웠겠습니까? 날씨는 덥지요, 사람들은 많지요, 자리도 없죠. 예수님 얼굴도 보기 어렵죠. 그러나 그들의 사모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냉난방이 있습니까? 차량이 있습니까? 길은 멀고 장화가 아니면 다닐 수 없는 때였지만 얼마나 믿음의 열정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이처럼 주의 음성이 그렇게 위대합니다. 한 번 주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열정을 버리지 못합니다. 요10:3-5에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하셨어요.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요. 그 음성을 들으면 양들이 기뻐 뜁니다. 이 음성을 들을 때 죽은 심령도 살아납니다. 요5:25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 열심히 보시고, 설교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2. 말씀 이적은 믿어지는 이적입니다.
3-4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를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이 말씀을 읽고 보통 메고 온 네 사람의 믿음만 말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도록 했어요. 사람들이 이 일의 주체입니다. 이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입니다.
즉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로 데려오면 고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지조차 쓰지 못하는 중풍병자를 데려온 것입니다. 중풍병은 당시는 물론 의학이 발달되었어도 지금도 어려운 병입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병은 아니니 낙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세상적으로는 말도 안 되지만 주님을 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모든 것은 은혜의 차이입니다. 90이 다 된 사라에게 아들을 낳으리라 했을 때 사라 본인도 웃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은 세상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은혜받은 사람은 언제나 할 수 있다는 믿음이지만, 은혜받지 못한 사람은 할 수 있어도 할 수 없다. 할 수 없어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3. 말씀 이적은 불가능이 없는 이적입니다.
4-7절에 “무리를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부류의 사람을 봅니다. 긍정적인 사람과 부정적인 사람입니다. 중풍병자를 데려왔으나 예수님께로 가기가 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중풍병자를 예수 앞에 데리고 갈 수 있다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서기관들처럼 쥐꼬리만한 지식으로 말씀을 꼬투리 잡으며 하나님의 일을 훼방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가 절실해서 길을 양보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네 사람에게는 불가능의 사고가 없었습니다. 최대한 가능한 방법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방법은 지붕을 뚫고 병상을 내려보내는 길이었습니다. 유대의 옥상은 뚫기가 쉽다고 하나 남의 지붕을 뚫고 내린다는 생각을 보통 사람이 할 수 있습니까? 여기서 그들이 얼마나 긍정적인 믿음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말씀에서 은혜를 받으면 언제나 긍정적인 믿음을 갖습니다. 홍해가 가로놓였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막9:23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암담해도 무슨 방법이라고 있을 것이라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은혜 받으면 하늘에서라도 길이 생기고 바다라도 갈라져 길이 날 것을 믿고 그 길을 찾게 됩니다.
4. 말씀의 이적은 순종하며 행하는 이적입니다.
9절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하셨습니다. 어느 편이 더 어려울까요? 전능하신 예수님이시니 어느 것이 더 쉽거나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사람 보기에는 병자에게 걸어가라 하는 말이 더 어렵습니다. 죄를 사하는 것은 보이지 않으니까 증거를 내놓을 필요가 없지만, 걸어가라 할 때 걸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 역시 걸어가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누운지가 언제고 몸의 상태가 어떠한데 사람의 생각이라면 어떻게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어느 집사님은 병들어 누운지가 오래 되서 손가락도 발가락도 눈동자까지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을 떠나 산 잘못이 생각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데 다리를 뻗고 기도하는 모습이 어찌나 죄송스러운지 하나님께 발만이라도 오그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기를 몇 주가 지났고 다리를 오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또 몇 주 후에는 무릎을 꿇 수 있었고, 또 몇 주 후에는 서서 걷다가 쉬다가를 반복하여 교회에 나올 수 있었고 완치되어 교직에 복직이 되었고 지금은 수십 년이 지나 8순이 되신 목사님이십니다.
이처럼 중풍병자는 자기를 맘대로 할 수 없는 몸임을 아는데도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힘써서 움직여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고쳐주셔서 움직이게 되었고 자기 상을 들고 걸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할 수 없다고 남까지도 못하게 막아서는 안 됩니다. 나도 할 수 있고 모두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모스 선지자는 외쳤습니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12). 바로 지금이 그런 시대입니다. 이 절망의 세상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거나 들려줄 수 있다면 그것은 최고의 행복이요 소망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날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의 음성인 성경을 읽을 뿐 아니라 나아가 주의 사역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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