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갈 5장 16~26절)
---------------------------------------------------------------------------------------------------------------
8월은 질투(시기, 투기)에 대한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질투하심에 대해 말씀을 들었고, 오늘부터 3주간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질투의 상황들과 그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 결과들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질투(시기, 투기)는 성경의 중요한 7가지 죄에도 포함된다고 했는데, 도대체 사람이 지니고 있는 질투란 무엇일까를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질투(시기,투기)는 기본적으로 나보다 남이(이웃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감정입니다. 남이 가진 것을 빼앗으려는 마음, 남이 가진 것보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 남을 깍아내리고 무시하는 마음, 남을 비웃고 조롱하는 마음, 이런 마음들은 전부 다 질투(시기, 투기)의 여러 경향들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우월감을 가지려는 교만함이 있는 반면에, 남과 비교하여 열등감이 생기는 비교의식이 너무나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나보다 잘 생겼고, 나보다 넓은 집, 좋은 차를 가지고 있고, 나보다 많이 배웠고, 나보다 높은 지위에 있고, 내 자녀 보다 남의 자녀가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등, 총체적으로 내가 남보다 못하다고 여기면 질투하고, 시기하는 마음이 일어나 화부터 치밀어 오르는 것이 인간의 연약한 습성입니다.
이럼 감정 표출이 심하냐, 적당하냐에 따라 각자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는 강도는 천차 만별입니다. 질투심이 있으면서도 아무 말 않고 꾹 참아 내는 사람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짜증 내며 다 토해내는 사람이 있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낙심과 절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질투의 끝은 곧 절망이고 절망은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질투에 대한 이런 일반적인 현상은 병적인 증상이나 심리적인 분출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다 이런 질투심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이 질투가 건강한 신앙생활을 어떻게 망쳐 가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일생 동안 깊은 절망의 늪에 빠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질투가 생기는 원인은 가정에서 부모의 편애, 사회적으로는 경쟁 의식이나 차별, 개인적으로는 실력이나 배경, 외모 등 온갖 열등 의식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라가 잉태한 하갈을 학대한 것(창 16:5-6), 야곱을 두고 라헬과 레아가 경쟁 한 것 (창 30:1),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팔아버린 사건(창 37:19-20)등은 가족 안에서 일어난 질투 사건들로, 가정 안에서조차 질투로 인해 심각한 분쟁과, 불화와, 음모등이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각한 것은 질투가 선을 넘으면 사람을 죽이려는 극단의 상황이 일어나게 되어,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나(창 4:5-6, 8),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심년 넘게 쫓아다닌 것이나(삼상 18:8-9, 29; 20:31),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으로 몰아간 것(마 27:18; 막 15:10; 요 11:47)과 같이 서슴 없이 살인을 저지르려는 일들이 일어아게 됩니다. 모두 질투와 시기가 빚은 사건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질투(시기, 투기)에 대해서 말하기를, ‘질투는 스올(음부) 같이 잔인하다’(아 8:6), ‘투기 앞에 설 자는 아무도 없다’(잠 27:4), 시기는 뼈를 썩게 하며(잠 14:30), 분쟁을 일으키고(고전 3:5),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한다(갈 5:19-21)고 말하고 있습니다.
질투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무서운 결과를 만들어 내기에, 사도 베드로는 질투(시기)를 버리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힘쓰라고 당부하였습니다(벧전 2:1-2).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질투’라는 단어(헬, 젤로테스)는 ‘시기’, ‘질투’라는 부정적 의미 외에도(행 5:17; 롬 13:13; 고후 12:20; 갈 5:20; 약 3:16) 긍정적 측면에서 ‘열심’, ‘열정’이란 뜻도 있습니다.
이 경우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이나 하나님의 성전을 향한 간절한 심령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요 2:17; 롬 10:2). 질투라는 마음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양날의 검처럼 사용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질투를 오로지 남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무차별적으로 악용하여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의 마음으로 선용하여 사용할 것인가,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양날의 칼이 쥐어져 있습니다.
그 양날의 칼에 달려 있는 질투를 잘 다스리는 길이 무엇인지 오늘 말씀을 보겠습니다. 16~18절 말씀입니다.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아멘.
질투라는 양날의 칼을 다스리는 것은 오직 하나, 성령만이 해답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마음과 생가과 말과 행동을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흔히 “주장하여 주오서”라고 기도할 때, ‘주장하다’는 말이 다스려 달라, 지도해 달라, 자제시켜 달라,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 달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1~15절의 말씀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말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육체 안에서(소욕대로-육체가 하고자 하는대로 사는 것) 마음대로 행하는 것은 절대로 자유가 아니며 오직 성령 안에서만 자유함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주셔서 자유함을 주셨는데 어찌하여 다시 종의 멍에(죄의 사슬, 굴레)를 메려고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믿음이 주는 가장 탁월한 효과는 성령안에서의 자유인데 그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여전히 육체로 사는 것은 참으로 불쌍한 인생이며, 아직도 성령으로 거듭나서 구원받지 못한 단지 육체로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유를 신앙생활 하시면서 얼마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느끼고 계십니까? 민주국가에서는 개인의 자유가 보장 되어 있으니 충분히 자유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 자유는 독재국가나 전제 국가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누리고 있는 육체의 자유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런 자유함을 뛰어 넘어 아주 특별한 성령의 자유함을 찐하게 누리고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도록 이미 우리는 상상하지 못하는 자유함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자유함의 실체는 무얼까요? 평안인가요, 건강인가요, 화목인가요, 여유로움 인가요. 다 좋습니다. 그런 것들이 자유함의 파편들 일 수 있으나 진정한 그리스도의 자유라고 말하기에는 아주 부족합니다. 우리가 성령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으면서도 정작 우리가 누려야 하는 자유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려야 하는 자유함은 갈라디아서 5장 5절에 나와 있습니다. 성경책을 보십시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아멘. 믿음, 의, 소망 세 단어가 나옵니다. 이것이 자유함의 핵심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는 확실한 고백, 의인이 되었으니 의인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확고한 결단, 땅의 것을 버리고 위의 것(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명확한 전진,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며 우리가 누려야 할 자유함의 내용입니다. 믿음, 의, 소망이 일상이 되고 습관이 되고, 그래서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이 그리스도인이 누려야 할 참 자유함입니다.
이러한 믿음, 의, 소망이 내 안에서 화산같이 분출하도록 열정적으로 솟아나게 하는 능력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자유함과 위로와 소망을 주는 거룩한 영이십니다. 왜 성령이 중요하냐? 첫째는 자유함을 누리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이며, 둘째는 자유함을 방해하는 어떤 육체의 소욕도 솟아나지 못하도록 싹을 잘라내 주시기 때문입니다.
16~18절은 성령이 우리에게 자유함을 주시려고 어떻게 역사하고 계신지와 그에 맞서 육체의 소욕이 어떤 방해를 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17절에, 서로 대적하고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뿐이 아니라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성령으로 살고자 했던 대단한 믿음의 사람 조차 육체의 소욕을 이겨내기가 이토록 힘들었음을 스스로 고백했습니다.
오늘 말씀 16절에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실제로 내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까지는 참으로 결사항전의 영적 전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루어 내지 못할 말씀입니다.
그것도 단한번의 각오가 아니라. 매사에, 매 순간마다, 매번의 말 한마디마다 육체의 소욕을 누르고 성령에 따라 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필코 그렇게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반드시 성령으로 행하도록 이기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아감으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함을 누리며, 믿음, 의, 소망 안에서 머물도록 동행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기게 해 주시고, 동행하여 주심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나를 다드려 주시도록, 주장해 주시도록 맡겨 드리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만들어지는지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그 결과들이 어떤지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19~24절을 읽어 드립니다.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아멘.
육체의 일을 따랐을 때 수 많은 범죄들이 발생하는데, 우리가 다루고 있는 시기, 투기도 포함 되어 있습니다. 질투에만 한정시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쉽게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남이 가진 것을 빼앗으려 하고, 저주하고 폭삭 망해 버리기를 바라는 나쁜 마음들(질투, 시기, 투기)은 전부 다 성령의 일하심을 거부하고 육체(자아)가 하라고 하는 것(소욕)에 굴복했을 때 발생하는 일들입니다.
우리는 다 이러한 육체의 소욕에 패배하고 굴복당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사탄이 집요하고 교묘하게 공격하기 때문에, 내 욕심이 제어 불가능 하도록 욕심이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이러한 질투심을 막아내지 못하고 무수하게 매일 같이 질투하는 말들이 내 입에서 멈추지 않았을 때, 산더미 같이 쌓인 그 질투의 결과물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질투해 놓고도 아무 생각이 없으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수이든, 의도적이든 질투를 해버리고 말았다면, 우리는 성령을 따라가지 못하고 결국 내 몸과 마음을 질투심에게 내어주어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했다는 모멸감이 들어야 합니다, 질투로 인해 내 몸과 영혼이 썩은 냄새가 나도록 더럽혀졌다는 수치스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로 인해 질투를 행한 것으로 인해 징계 받을 것을 각오하고 즉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참회하려는 엎드림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죄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절대로 이런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나에게 악이 붙어 있습니니다. 악의 법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못하게 하여 죄의 법에 나를 사로 잡습니다. 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 7:21~24)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를 쓴 사도 바울이 질투를 포함한 죄를 상대 할 때 항상 이런식으로 모욕감을 느끼고, 더럽게 생각하고, 치욕스럽게 상각 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경계하고, 전쟁하고, 패배 했을시 즉시 엎드려 호소하고, 다시 민감하게 경계의 자세를 취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와 같이 질투와 시기와 투기에 사로잡혔지만, 바울이 우리와 다른 점은 죄에 대한 철저한 인식, 재빠른 회개, 그리고 다시 성령에 의지하려는 절대적인 순종의 자세를 무한 반복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9가지 열매를 맺어가는 것이 목표이고 결과이면 참으로 좋겠지만,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언행은 하루가 멀다하고 질투, 시기, 투기를 멈추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지금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21절에 “이런 일(질투, 시기, 투기)을 하는(일삼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유업은 천국을 소유 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아니, 질투 한번 했다고, 시기하는 말 한 번 했다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너무 한 것 아닌가요? 라고 항의 할만 합니다.
자, 질투가 육체의 소욕, 즉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서 생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성질나서, 기분 나빠서, 서러워서, 속이 타서 한 번 던진 말이지만 성경은 이러한 질투의 말 한마디를 분명히 죄라고 정의 했습니다.
육체의 소욕에 따라 죄를 짓는 이러한 사소한 행위가 반복되고, 누적되고, 습관이 되는 것은 더 이상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이성(머리로)으로만 하나님의 법을 따르며 마음은 계속해서 질투하는 것을 멈추지 않겠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잠시 동안 궁핍하고 곤고함을 핑계로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보다 육체의 법을 취하며 살았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질투가 습관이 되고 일상이되면 더 이상 변명도 핑계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질투하면 살다가 인생을 마치면 됩니다. 하나님도 더 이상 말리지 않을 겁니다.
“네가 세상과 사람을 그토록 질투하며 살기로 작정한다면 나도 너를 영원히 질투의 대상으로 삼을 수 밖에 없고, 네가 나를 그토록 마음에 담아두기를 싫어한다면 나도 너와 영원히 따로 살 수 밖에 없겠구나” 라고 판단 하실 겁니다. 질투는 이 세상에서만 통할 뿐이지 하나님 나라에서는 통하지도, 필요하지도, 허락되지도 않습니다.
질투라는 것이 우리가 짓는 죄 중에서 사소하고 작은 것 같지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너무나도 큰 원인으로 작동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로 믿음, 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단 하나의 질투하는 말도 입 밖에 내면 안 됩니다.
남을 미워하고, 남의 것을 탐내고, 남의 것을 빼앗으려고 하고, 남이 잘 되는 것을 욕하고, 남의 인생이 저주 받기를 말했던 그 동안 내 삶속에서 행해진 질투의 죄악된 언행들은 진실로 회개하여 용서함을 구해야 합니다.
내 인생에 다시는 그러한 질투하는 말, 시기하는 생각, 투기하는 행동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오호라 나는 곤곤한 사람이로다” 사도 바울의 탄식으로 호소하면서 정말 내 마음의 법과 맛서 성령의 능력으로 죄와 죽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사소한 것 같은 질투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엄청난 결말을 가져오는지 우리 스스로 그 심각성을 재 인식해야 합니다. 믿음, 의, 소망을 지니고 끝까지 인내하고 끝내 이기는 자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질투는 이제 내 인생에 없게 하겠다는 다짐과 결단을 가지고 오늘 마지막 말씀 25~26절을 읽어 드립니다.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아멘.
서로가 서로를 노엽(화가 날 만큼 분하고 섭섭하다)게 하거나 투기(질투, 시기) 하는 것은 성령으로 살지 않는 언행이고, 성령으로 행하지 않는 불순종의 죄악입니다. 이것은 헛된 영광, 즉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며 이 세상의 것만을 차지하려는 탐심일 뿐입니다.
성령으로 사는 것, 성령으로 행하는 것,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화두이자 이 시대 기도교인들의 구호 아니겠습니까? “삶으로 살아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삶을 보아야 성령의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말입니다.
개혁교회(르포테스탄트) 목사도, 카톨릭의 교황도, 정교회의 대주교도, 구세군 국제본영 대장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모든 사람은 직분이나 신앙 연수에 상관 없이 성경의 법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서로를 노엽게 하거나 투기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야 진정한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살 수가 있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죄와 죽기까지 싸워 몸부림치는 자들이 결국에는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허락 받게 될 것입니다.
“헛된 영광을 위하여 서로 투기하지 말라”는 오늘 설교 제목과 오늘 선포된 말씀내용 전부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빛이 되고, 성령의 능력으로 발휘되어, 삶의 열매로 맺어지는 복된 은혜의 말씀이 되셨을 것으로 믿습니다.
작은 것에 충성된 사람,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내민 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합당한 자가 되는 것처럼, 사소하다고 여기는 질투의 말 한마디를 참아내고 남을 화나게 하지 않는 사랑의 말을 자주하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합당한 자들입니다. 천국은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자들이 모여있는 곳이고, 하나님 앞에서는 다 그렇게 말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번 달의 주제가 질투임을 잊지 마시고, 일상에서 내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가정 안에서 서로를 노엽게 하거나 투기하는 말을 하여 헛된 영광을 구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도록 늘 언행에 주의하며,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도록 항상 성령 충만함을 구하며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 내시기를 간절히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무심코 행하여 왔던 질투와 시기와 투기의 언행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앞으로 남은 인생만큼은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여 오직 하나님 나라의 영광만을 소망으로 삼고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설교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 ! (0) | 2024.08.09 |
---|---|
마지막 사명을 감당하여 살아봐요 == 신명기31;14-29(240811) (0) | 2024.08.08 |
요14;21-23계명을 지켜 사랑 받는 자 되라 하십니다. 20150503 (0) | 2024.08.08 |
인생이란 무엇 입니까. (0) | 2024.08.08 |
스크랩 왕들이 집합하고 함께 회의함 (시편 48편 4절, 창 14:1~2) (0) | 2024.08.08 |